행동하는 믿음은 무엇입니까?, 믿음과 행함은 본질적으로 하나입니다(3)
01/02/2019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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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성도들로 하여금 오직 그리스도만을 자신의 존재 근거로 고백하게 만듭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더 이상 자신의 삶을 자신의 것으로만 고집하지 않고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앞에 전 존재를 완전히 드리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실한 믿음을 가진 자에게는 삶에 대한 가치관, 행동 하나 하나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삶은 예수님을 알기 전과 동일하다면 이 믿음은 죄인을 의인으로 변화시키는 참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믿음에는 늘 행위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알 수 있는 것처럼 행동을 보면 그 사람의 믿음을 알 수 있습니다



행동하는 믿음은 무엇입니까

 

야고보서 2 : 18 - 19

 

2:18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들어가는 말


오늘까지 한국교회가 이룩한 성장은 실로 괄목할만합니다. 특히 지난 몇 십년동안 한국교회의 수()적인 증대는 세계 기독교 역사에서도 그 유래를 찾기 어려울 만큼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이 같은 급성장이 반드시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사실 교회의 성장을 교인수의 증가로 측정한다는 것부터가 모순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성장도는 수치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신앙적으로 성숙한 모습을 나타내 보이지 않으면서 교인수의 증가만을 자랑삼는 것은 순수한 복음의 전파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교회는 외적인 성장, 양적인 팽창을 자랑하기 전에 먼저 믿음을 행동으로 나타내 보여야 합니다. 신앙의 행동화는 기독교의 성장이 속 빈 강정이 아니라 알찬 결실임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입니다행함 없는 믿음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본문 말씀을 통해 신앙에 뒤따르는 실천의 중요성을 살펴보고 행동하는 신앙인이 되는 길을 살펴보겠습니다. 


실천적인 행동은 믿음을 완전하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알고 이것을 진리로 인정한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앎이 믿음의 토대가 된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학문을 연구하는 과정 에서 밝혀낸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의 진리 명제의 성립을 위해서는 앎을 토대로 가설을 형성하고 실제적인 실험을 통해 진위 여부를 가려야 합니다. 실험 또는 실천을 통한 검증 과정이 없이는 진리를 진리로 확신하는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곧 그리스도라는 진리를 아무런 내적 확신 없이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완전하고 확고히 세우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포괄적으로 알고자 할 뿐 아니라, 이 진리를 실제 삶 속에 수용해 들이는 실천이 있어야 합니다. 즉 모든 인간의 죄를 속하려 대속물로 죽으신 예수님의 성육신한 생애를 알고 이 구속의 은혜 속에 직접 참여하여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실천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은 결코 관념이 아닙니다. 일시적으로 일어나는 정서적인 감흥도 아닙니다. 완전한 신앙은 앎과 실재의 일치를 온 몸으로 느끼고 체험하는 충만한 기쁨이며 삶을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이를 삶 속에서 진리로 체험해 보고자하는 실천적인 노력이 있을 때 완전한 신앙이 형성됩니다.

 

성도는 행함을 통해 의로움을 인정받습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는 죄에 인박힌 존재입니다. 다만 인간이 죄악에서 벗어나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입니다. 사도행전 1339절 말씀에,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로마서 51절 말씀에,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그리스도의 자비에 자신을 완전히 내맡기는 믿음이 있을 때 인간은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됩니다. 죄악 된 인간을 의로운 존재로 변화시킬 수 있는 이 믿음의 힘은 실로 엄청납니다.

 

믿음은 성도들로 하여금 오직 그리스도만을 자신의 존재 근거로 고백하게 만듭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더 이상 자신의 삶을 자신의 것으로만 고집하지 않고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앞에 전 존재를 완전히 드리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실한 믿음을 가진 자에게는 삶에 대한 가치관, 행동 하나 하나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삶은 예수님을 알기 전과 동일하다면 이 믿음은 죄인을 의인으로 변화시키는 참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믿음에는 늘 행위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알 수 있는 것처럼 행동을 보면 그 사람의 믿음을 알 수 있습니다.

 

20절 말씀에서 사도 야고보가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 믿음은 허탄한 것이라고 단언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삶의 모습을 변화시킬 수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이미 죽은 것입니다. 예레미야 1710절 말씀에,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고린도후서 510절 말씀에,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하나님은 장차 임할 마지막 심판 날에 믿음과 행위를 근거로 모든 사람을 심판하실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따라서 행함 없는 믿음으로는 하나님께 의로움을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믿음을 증거할만한 행함이 있는 자만이 최후의 심판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행함으로 나타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있다 하더라도 실생활에 응용하지 못하면 그것은 있으나마나한 무용지물이 되고 맙니다. 성도의 믿음도 행함의 원동력이 되지 못하고 언제까지나 잠재하고만 있다면 결코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악이 만연한 이 세상에 행함으로 구원받은 증거를 보여야 합니다. 성도가 삶을 통해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신앙의 힘을 내비칠 때 이것은 입술로 증언하는 어떤 설교보다도 분명한 복음 전파의 메시지가 될 것입니다.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성도들은 모두 행동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들이 행함으로 신실한 신앙을 증거 할 때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 위에서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귀신의 것과 같습니다.

 

1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사람들이 주님을 믿는다고 입으로 고백하는 내용은 귀신들도 그렇게 고백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마가복음 5장 말씀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이방지역 거라사에서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시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를 건너 거라사 지방 해안에 도착하셨습니다. 막 배에서 내리실 때 귀신들린 사람이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절하며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아직 아무도 예수님의 정체를 모를 때입니다. 그 누구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일이 없는 때입니다.

 

나중에 1-2년이 지난 뒤에 사도 베드로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처음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너무 기뻐하셨고 이 고백의 믿음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귀신들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영적인 지식을 우리보다 더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귀신들의 믿음은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일까요? 한 마디로 믿음의 역사를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못합니다. 그 믿음으로 기도하지 못합니다. 그 믿음으로 봉사하지 못합니다. 그 믿음으로 헌금하지 못합니다. 그 믿음으로 어려운 이웃을 돕지 못합니다. 그 믿음으로 전도하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앙만을 가지고 있다면 그 믿음은 귀신의 믿음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귀신의 믿음과 다르려면 구체적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신앙하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성도의 신앙의 삶을 신앙생활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믿음을 그 삶의 터로 삼는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만큼 믿음이란 성도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 삶 전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큰 믿음과 더불어 바른 믿음을 가지는 것을 중요시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믿음에 대한 언급들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아니 성경은 바로 믿음의 책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말씀만 하옵소서 그리하면 내 하인이 낫겠나이다!”라고 고백했던 백부장의 믿음이나, “주여! 옳소이다 만은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부르짖었던 가나안 여인의 감동적인 믿음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중언부언하는 이방인의 믿음도, 책망 받았던 제자들의 믿음도 읽을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영생을 얻을 뿐 아니라, 큰 능력들도 행하기도 합니다.

 

어느 시대이던 간에 바른 믿음을 가진 성도가 많은 것 같지 않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귀신의 믿음을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귀신은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성도의 영원한 원수요, 대적인, 이런 귀신의 믿음을 말씀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성도의 믿음이 귀신의 믿음보다 못하다고 질책하시기 위함이요, 또 하나는 잘못된 귀신의 믿음을 통하여 바른 믿음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오늘날 이민사회에서 사람들은 만나보면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천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전혀 실감이 나지 않는 이유는 참 믿음을 가진 성도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도들의 시대에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본문의 말씀을 하게 된 것이고, 또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88절 말씀에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 믿음을 보겠느냐!”. 성도 여러분은 귀신의 믿음을 말씀하는 사도 야고보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는,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귀신도 믿음을 가졌다고 하는 놀라운 말씀을 듣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 아는 믿음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믿음의 지식적 요소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히브리서111절 말씀에서, 바라는 것들의 실상,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믿음은 바라는 것, 보지 못하는 것, 곧 영이신 하나님과 그의 모든 약속에 대한 초자연적인 지식을 일컫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믿음이란 신령한 지식으로 영적인 것-하나님을-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귀신들도 이런 믿음 곧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을 아는 믿음이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귀신의 하나님 대한 지식은 왜곡되고, 잘못된 악한 지식입니다. 그러므로 귀신의 믿음이라고 불리어지는 것입니다. 그는 에덴동산에서 하와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어떻게 말했는지는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마치 악하고, 시기심이 많은 폭군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지 않고는 믿음을 말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과의 관계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사랑처럼-누구도 사랑이 무엇인가를 압니다. 그것은 결코 언어적으로만은 의미도 없고, 존재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오직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믿음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믿음이란 그 자체로서는 존재할 수도 없고, 의미도 없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귀신의 지식은 왜곡된 악한 지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에 근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잘못된 여러 신앙들을 보고, 듣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의 결여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깊이 연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성주의며, 신비주의를 배격해야 합니다. 이것은 다 이 바른 하나님에 지식에서 떠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믿고, 떠는 믿음입니다. 이것은 인격을 가진 존재들이 가지는 감정적 요소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 간에도, 참으로 많은 문제들을 일으키는 것이 이 감정이란 것입니다. 이성적으로는 이해가 되는 것도, 감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을 우리는 많이 경험합니다. 믿음은 인격적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는 반드시 이 감정적 요소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귀신도 하나님에 대하여 떠는 감정, 믿음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떠는 믿음도 믿음의 한 감정적 면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떠는 자세는, 분명 하나님을 아는 자의 태도요,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모르는 시대에 사람들에게 큰 도전을 주는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652절 말씀에서,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라고 하나님 앞에 떨지 않는 불신자, 악한 자들을 책망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온전한 믿음은 떨기만 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결코 성도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떨기만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실상 독생자를 주시는 하나님은 우리로 떨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여기에 귀신의 믿음의 문제가 들어 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마음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또 신명기 64절 이하의 위대한 계명에서 들으라 이스라엘아,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참 믿음은 두려워함이 아니라, 사랑함에 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바로 아는 자의 자세이며,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귀신과 같은 잘못된 믿음은 항상 하나님 앞에서 떨게만 만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복음인 율법도 자신을 얽어 메는 멍에로 여기고, 하나님 앞에서 벌벌 떱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모든 말씀들도 기뻐할 줄 모르며, 항상 무거운 짐으로 여기여 괴로워하며, 불평합니다. 이것이 귀신의 믿음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그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목적은 영원히 그를 즐거워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것을 굴레로 여기며, 하나님의 간섭을 벗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불신이요, 죄요, 악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회개에 대하여서도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회개란 사람의 윤리적, 도덕적 개과천선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적 회개는, 인간의 이런 도덕적 변화를 핵심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회개의 핵심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의 개선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바로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귀신의 믿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성도가 그들에게서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본문 말씀 전체에서 강조하는 핵심적인 내용, 곧 하나님을 알기만 하고, 떨기만하고 행함 곧 순종이 없는 믿음입니다.

 

인격적인 믿음에는 지적인 면과, 감정적인 면만이 아니라, 반드시 거기에 반응하는 행동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사랑은 언어적으로만 존재하지 못합니다. 이론적으로만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엔 뜨거움과 사랑하는 행동을 반드시 유발하게 됩니다. 지극히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은, 반드시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그 감정은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행동을 자극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결코 잠잠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귀신의 믿음은 차가운 지식뿐이요, 두려워 떨기만 하는 마음뿐이요, 어쩔 수 없어 하는 복종은 있어도, 결코 스스로 순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직 반항하고, 반역할 뿐입니다.

 

그러나 즐거워하는 자로 잠잠히 있으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차라리 괴롭게 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또 사랑하는 이의 말을 잔소리로, 무거운 계명으로 불평하지 않습니다. 오직 기쁨을 가지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원하며, 순종하기를 기뻐할 뿐입니다. 결코 희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제 나의 믿음을 점검해 봅시다. 과연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하나님에 대한 나의 감정이 어떤지,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기뻐하여 순종하는지. 우리는 귀신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은 자녀들입니다.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 자녀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하나님을 참으로 의지하며, 사랑하는 바르고 큰 믿음으로 성장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 설교는 참고문헌과 목사님들의 설교를 인용하였습니다.    


성경말씀 실천운동에 대하여 자세히 알기를 원하시면 

213 284 0050으로 연락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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