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믿음과 행함은 본질적으로 하나입니다(2)
12/19/2018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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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말씀에서 사도 야고보는 믿음이 행함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죽은 믿음이라고 증거합니다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삶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같지 않다면 그 사람의 믿음은 이미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데도 세상은 전혀 달라지지 않는 이 시대에 사도 야고보의 증거는 많은 의미를 시사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야고보서 2 : 14 - 17

 

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2: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2: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사도 야고보가 말씀하는 것은 믿음이냐 행위냐를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믿음이 진정성이 있는가를 확인해 보라는 도전입니다. 사도 바울도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고린도후서 135절 말씀에,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리운 자니라”. 내가 가진 믿음이 진짜인가를 검증하라는 도전입니다. 검증의 기준은 명확합니다. 그것은 지식이나 느낌이 아닙니다. 어떤 교리를 알고 동의하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평안한 느낌, 북받치는 감정이 믿음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검증의 기준은 단 하나입니다. 지금 내 안에 살아계시는 예수님과 날마다 교제하고 그분의 임재 속에서 살고 있는가? 그것을 날마다 확인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 이런 확신이 있는 믿음은 반드시 나타나는 표징이 있는데 행함이라는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지만 행함이라는 열매를 통해 믿음을 확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름대로 세운 삶의 원칙과 실제 삶이 일치되는 것이 진정 잘 사는 삶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의 공통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나 삶과 행함이 일치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서 많은 사람들이 삶에 회의를 느끼고 고민합니다. 로마서 719절 말씀에,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지식이 현실에 적용되지 않고 생각과는 정반대로 다른 모습으로 살아갈 때 무력해지고 상실감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행함으로 표현되지 않는 생각, 삶과 동떨어진 가치관은 이미 생명을 잃은 화석(化石)과도 같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사도 야고보는 믿음이 행함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죽은 믿음이라고 증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삶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같지 않다면 그 사람의 믿음은 이미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데도 세상은 전혀 달라지지 않는 이 시대에 사도 야고보의 증거는 많은 의미를 시사합니다.

 

야고보서는 전체적으로 우리의 믿음이 어떤 증거로 드러나느냐?”, “참된 믿음이 무엇으로 입증되는가?”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믿기만 하면 된다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그 말은 맞는 말이지만 한편으로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말입니다. 믿고 나면 그것으로 끝이고, 이후의 삶은 어떻게 살든지 상관이 없다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맞지만,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무엇을 포함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처음에 복음이 유대인들에게 전파되었을 때 그들은 오랫동안 율법을 통해 의를 이루려고 노력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나 복음이 전파될 때도 그들은 여전히 율법의 행위로 의를 이루려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받는 구원이라는 복음을 들었을 때 그들은 이 말에 대해 두 가지로 오해를 했습니다.

 

하나는, 어떻게 믿음만으로 의를 이룰 수 있겠느냐,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자가 되기 위해 우리가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 사도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통해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또 하나의 오해는, 율법에 눌렸던 유대인이 복음을 듣고 자유를 얻어 기쁜 나머지 이제는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행위는 구원과 상관이 없으니 마음대로 행하며 살아도 된다고 방종했던 것입니다. 그런 믿음에 대하여 사도 야고보가 바로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도 바울의 서신서와 야고보서는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므로, 우리가 알고 있는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야고보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했지만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도 사도 야고보도 믿음과 행위에 대해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각각 잘못된 것들을 바로 잡은 것입니다.


본문 14절에서 17절 말씀을 살펴보면 사도 야고보는 구원받지 못하는 믿음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지 못하는 믿음이 과연 있을까요? 이 사람은 믿음이 있다고 입술로 고백을 한 것입니다. 단지 한 순간의 고백이 아니라 계속해서 이렇게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14절 말씀에,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는 입술의 고백만 있을 뿐 행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행함은 율법의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자로서 드러내야 할 삶의 모습을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행위로 구원받지 않는다고 말씀할 때 행위는 구원받기 위한 행위, 즉 율법적인 행위를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행위는 구원받은 이후의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믿는 성도가 믿음 이후에 마땅히 따라야 할 삶의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시험 가운데 인내하는 것, 믿은 자의 정결한 삶,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 가난한 자를 돌아보는 것, 차별 없이 사람들을 공정하게 대하는 것, 긍휼을 베푸는 삶입니다. 믿는 성도로서 이런 모습들이 삶의 증거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증거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입술로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 자들에게 그 증거가 어디에 있느냐고 묻습니다. 증거가 없는데 있다고 말한다면 그 믿음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고 말씀합니다.

 

14절 말씀에,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이 말씀은 구원할 수 없는 믿음입니다. 입술로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그를 구원할 수 없는 것입니다. 17절 말씀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26절 말씀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죽은 것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기에 이 믿음은 그를 구원할 수 없는 것입니다.

 

15절에서 16절 말씀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예수 그리스도 안의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 상태입니다. 이것을 잘 알고 있는 자가, 가난한 형제에게 평안히 가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당시 일반적인 인사이나 특별히 구걸하는 사람들이 왔을 때 그들을 돌려보냈을 때 쓰던 말입니다. 축복이라기보다는 이 자리에서 나가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헐벗고 굶주려 있는 형제, 자매에게 네가 알아서 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도움을 청하려고 온 사람을 조롱하는 말과 다름없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이와 같다고 말합니다. 17절 말씀에,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믿음의 고백만 있고 행함이 없다면 고백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 고백은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겉이 행함이 없는 것은, 속이 죽어 있기 때문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왜 죽은 믿음입니까? 행함과 믿음이 분리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6절 말씀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이 말씀은 우리의 영혼과 몸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살아 있으려면 영혼과 몸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이 둘이 분리되면 죽은 것입니다. 믿음과 행함도 이런 관계입니다. 행위를 떨어트려 놓고 믿음만 가지고 있다면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 말씀에서 사도 야고보가 강조하는 것은 믿음과 행함을 분리시켜 놓고 행하라고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행함이 함께 있는 것인데 왜 분리시키느냐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믿음과 행함의 상호 연관관계를 생각해보겠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사도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며 이런 믿음으로는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고 단언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믿음이 없는 행함은 공허하며 믿음이 전제되지 않은 행함만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말씀으로 바꾸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09절 말씀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히브리서 1039절 말씀에,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어떤 성도들은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사도 바울의 말씀과 본문 말씀의 증거를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믿음과 행함의 상호 연관성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구별하는 데서 기인한 오해입니다.

 

믿음과 행함은 따로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깊은 연관성으로 맺어져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믿음이란 한 인간의 사고 전반을 지배하고 세세한 행동에도 영향력을 미치는 의식의 큰 흐름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의식의 반영입니다. 인간이 굳이 애쓰지 않아도 확고하고 완전한 마음은 자연스럽게 행동 속에 표출됩니다. 만약 믿음이 있는데도 행함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것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행함을 믿음의 증거라고 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믿음은 행함의 토대가 되며 행함은 믿음의 증거가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진 성도에게는 행함이 곧 신앙고백이 됩니다. 진심으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는 성도에게는 결코 믿음과 행함이 별개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이 성도에게는 행함이 곧 신앙고백이며 신앙이 바로 행함이 되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과 사도 야고보는 둘 다 마음과 행함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 의로움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믿음과 행함이 밀접한 상호 연관 속에서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고 성도들을 교훈하는 것입니다.

 

죽은 믿음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믿음에 바탕을 두지 않은 행함이 맹목적인 것처럼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허탄합니다. 오늘날, 교회 일에 열심을 다하는 성도들이 종종 광신자로 오인 받는 것은 성도들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과 실제 삶을 접목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사도 야고보가 본문 말씀에서 예를 든 것처럼 말로만 믿음을 실천하고 신앙을 고백합니다. 실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뜨거운 체험이나 좀 더 가까이서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진지한 노력도 없으면서 자신만이 가장 신실한 신앙인인 체하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믿는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계명을 힘써 지키며 이것을 통해 영혼의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요한복음 1415절 말씀에,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한복음 1421절 말씀에,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그리고 단 한순간도 예수님을 떠나지 않기 위해 늘 믿음을 다지며 주님의 말씀을 상고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실천적인 노력이 없이 그저 습관처럼 신앙고백을 읊조린다면 그 사람은 광신자이며 죽은 믿음의 소유자입니다.

 

살아 있는 믿음을 소유하는 길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고 한다면 살아 있는 믿음은 실천의 원동력이 되는 믿음이라고 규정합니다. 살아 있는 나무만이 계절을 따라서 잎을 내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처럼 살아 있는 믿음만이 의로운 삶의 열매를 맺습니다. 성도들이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구원의 근거로 제시할 수 있는 것은 행함의 열매로 증명될 살아 있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살아 있는 믿음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성도들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먼저 믿음이 살아 있기 위해서는 깨달은 믿음을 곧 실천 즉 행함으로 옮기는 삶의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시간 시간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새롭게 체험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추스르는 신앙의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성도의 신앙고백이 공허한 문구에 그치고 마는 것은 삶 속에서 시간 시간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체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삶이 실제 삶과 분리된 하나의 형식이 되어버리면 성도의 믿음은 깊은 침체의 늪에 빠져 생명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깨달은 믿음을 실천에 옮기고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기 위해 경성하는 성도만이 살아 있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우리는 사도 야고보가 믿음과 행함의 관계에 대하여 조금도 충돌함이 없이 유연하게 설명하는 것을 본문 말씀에서 보게 됩니다. 사도 야고보는 믿음에 대하여 2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상하게 말씀합니다.

 

하나는, “믿음이 있노라하는 믿음입니다. 곧 말로만 하는 믿음입니다.

 

나는 예수를 믿노라.” 이름만 있습니다.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요즘 교회에 나가십니까?” “못나갑니다.” “교회에 나가본 일도 없습니까?” “제가 그래도 유아세례 받은 교인입니다.” 유아세례 받은 교인이 물간 것입니다. 이런 경우가 바로 이름만 있는 교인인 것입니다. 무슨 신상카드 같은 것을 작성하게 될 때면 종교 란에 으레 기독교라고 적어 놓습니다마는, 한 번도 교회에 나온 일이 없는 것입니다. 맹랑한 일입니다. 신분상으로 내놓는 이름만의 교인, 이름만의 이런 믿음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구원을 이루지 못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이는 가짜믿음이기에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생명이 없는 믿음이기에 나를 구원하지도 못합니다. “자기 구원이라 함은 곧 현재적인 구원입니다. 자기 정욕을 이기지 못해서, 시험을 이기지 못해서, 죄를 이기지 못해서 넘어지는, 이런 믿음으로는 아무런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인격의 변화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아무 일도 하지 못합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즉 복음 신앙, 구원 신앙입니다. “행함이라는 원어(에르가)행위들이라는 말로서 선한 행위들을 가리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자신의 영혼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구원 신앙은 선한 행위로 증거되는 믿음 즉,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56절에서 말씀한 대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

 

사도 야고보는 17절 말씀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여러분 이 말씀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행함이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그 믿음이 다 죽었다고 하면 내 믿음은 살아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이 말씀에는 2가지 의미가 있습니다어떤 사람들은 믿음의 형식들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교회를 나오고예배를 드리고신앙도 고백하고봉사도 합니다그런데 그 삶과 인격에 어떤 변화도 행함도 없다면 애초에 믿음 자체가 없는 것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2번째에 해당합니다분명히 구원 받는 믿음을 가지고 있고 구원의 확신도 있고 거듭난 체험도 있습니다그런데 어느 순간 믿음의 방식이 지성과 언어에 감금되어 버린 것입니다모든 것을 머리로 이해하고 말로 풀어버립니다그 이상을 나가지 않습니다저는 여기에는 교회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합니다신앙생활을 교회라는 공간에서 듣고 이해하고 말하는 것으로 제시했지 실제적으로 구체적인 삶의 영역에서 그 믿음을 표현하고 실천하고 적용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긴 여행이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고 합니다기독교 진리를 단지 아는 것이 아니라 깨닫는 상태를 말합니다그러나 또 하나의 긴 여행이 있습니다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입니다발은 실천과 순종의 자리를 의미합니다그 동안 한국교회는 머리에서 가슴까지 이동하는 일에 집중했습니다이제는 가슴에 있는 것을 발로 옮기는 일들을 해야 합니다실천이 없이 지성과 감정에 믿음이 갇히면 어떤 현상이 생기는지 아십니까구원의 감격이 점점 사라지게 됩니다.


사데교회의 영적 상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31절 말씀에,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고 경고합니다. 사데교회의 영적 상태는 맨 마지막까지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사데교회는 살았다는 이름을 가졌습니다. 죽었다는 것은 실제로 영적으로 죽었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는 영적 침체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으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인공호흡으로 믿음을 살려 내십시오

 

따라서 믿음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유일한 열쇠는 행동입니다. 죽어가는 믿음에 인공호흡을 하고 심폐소생술을 해서 다시 살아나게 하는 것은 실천이며 순종이며 행함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후서 15절에서 7절 말씀에,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 지식, 절제, 안내, 경건, 형제우애, 사랑은 모두 행함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믿음을 행동으로 변화할 필요성을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에 대하여 베드로후서 18절에서 9절 말씀에.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

 

오늘 우리가 누려야 하는 현재적 구원의 경험을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적인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그 능력을 체험하는 길은 행함, 즉 말씀대로 살아가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행동하는 믿음으로 전환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222절 말씀에서.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주시는 뜻을 온 존재로 받아서 그 뜻을 이루기 위해 희생하시고 투자하십시오.


이 설교는 참고문헌과 여러 목사님의 설교를 참고하여 올린 설교입니다.  


성경말씀 실천운동에 대하여 자세히 알기를 원하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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