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믿음과 행함은 본질적으로 하나입니다(1)
12/12/2018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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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2장은 1절 시작부터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라고 말씀하면서믿음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믿음이 있다고 하는 성도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2장 14절 말씀에,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며 행함이 없는 믿음을 논하기 시작합니다여기서 행함이 없는 믿음이라는 말씀은 믿음은 좋은데 행함이 없는 것을 뜻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17절 말씀에서,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설명하듯이 행함이 없는 믿음이라고 말씀하는 것은 행함을 일으키지 못하는 믿음” 곧 믿음의 질()에 관한 지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2 : 14 ? 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2: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2: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2:18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2: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2:23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2: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들어가는 말


야고보서 2장은 1절 시작부터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라고 말씀하면서, 믿음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믿음이 있다고 하는 성도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214절 말씀에,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행함이 없는 믿음을 논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행함이 없는 믿음이라는 말씀은 믿음은 좋은데 행함이 없는 것을 뜻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17절 말씀에서,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설명하듯이 행함이 없는 믿음이라고 말씀하는 것은 행함을 일으키지 못하는 믿음곧 믿음의 질()에 관한 지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에도 다양한 종류가 있어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믿음이 있음을 예수님이 말씀하신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잘 알 수 있는데, 이 비유에서 돌밭에 뿌려진 씨에 해당하는 사람과,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에 해당하는 사람입니다. 이 두 사람은 전혀 믿지 않는 사람은 아니지만, 결국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고보서 218절에서,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씀함으로써, 야고보 사도가 행함의 문제를 논하는 이유가 행함을 통한 믿음의 증명을 가르치기 위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자신의 신앙이 어떤 종류의 신앙인지 살필 것을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제가 봉독해 드린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오늘부터 몇 주 동안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라는 주제를 가지고 함께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사도 야고보는 야고보서 217절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고,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7절에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226절 말씀은 야고보서 전체에 걸쳐 가장 문제가 되는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믿음이냐? 행함이냐?, 믿음이 중요하냐? 행함이 중요하냐? 초대교회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논란을 불러 일으켜 온 이 문제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믿음과 행함을 대조해서 자세히 설명한 다음에 본문 26절 말씀에서 못 박듯 결론을 내렸습니다.

 

26절 말씀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본문 말씀을 명확하고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도 야고보가 이해하고 있는 구원론과 사도 바울이 이해하고 있는 구원론이 표면상 왜 다른가를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로마서 42절에서 3절 말씀에,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갈라디아서 36절 말씀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야고보는 사도 바울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합니다. 야고보서 221절 말씀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율법주의와 율법폐기론

 

왜 사도 바울과 사도 야고보는 완전히 상반되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사도 바울과 사도 야고보가 서로 다른 이단들을 성경 말씀의 예를 들면서 반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직면한 문제가 서로 다른 것입니다. 로마교회와 갈라디아교회에 침투한 이단은 유대주의적인 행위 구원론자들입니다. 즉 율법주의입니다. 이들의 주장은 간단합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믿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인간이 의롭게 되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힘써 증거 한 것입니다. 반면 사도 야고보는 정반대의 이단을 다루고 있습니다. 율법 폐기론자들입니다. 이 시대의 구원파들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으니 행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말씀입니다.

 

현대교회의 극단적 구원론

 

많은 분들이 구원을 둘 중의 하나로 이해하고 있는데, 하나는 내가 무엇을 해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율법주의적 접근입니다. 처음 신자들이 주로 범하는 실수입니다. 아직까지 복음의 도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세속적 종교, 사상, 도덕적 관점으로 복음을 이해합니다. 교회를 나와야 하고 헌금을 해야 하고 술과 담배를 끓어야 하고 선행을 베푸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는 복음을 깨닫고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오래하다 보면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점점 율법 폐기론으로 흘러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인간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구원에 있어서 우리의 행위가 단 1%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나의 행위와 삶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어떤 교리를 정확하게 알고 있고 그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 마치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문제를 지성과 느낌의 문제로 규정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신앙을 놓고 보더라도 신앙의 삶을 처음 시작할 때에는 행함은 고려하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피 공로로 구원을 받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받은 믿음뿐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바로 천국에 가면 괜찮겠는데 그렇지가 않아서 점점 문제가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믿었는데 행함을 보면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고 달라진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은 그런 대로 참을 수 있으나, 도대체 내가 나를 보아도 거의 변화가 없습니다. 미워하던 사람을 보면 여전히 밉고, 좋은 것을 보면 여전히 탐나고, 질투도 시기도 여전하고, 사촌이 논을 사면 여전히 배가 아픕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인가?, 어디에 와 있는 것인가?, 믿음은 왜 가지는 것인가?, 이렇게 의문을 갖게 되고 회의에 빠지고,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과 행함에서 다음의 2 가지 원칙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는, “믿음만이 중요하다, 행함은 필요 없다”-믿음만이면 된다는 착각을 조심해야 합니다.

 

사이비 교파 가운데 믿음만 있으면 된다고 주장하는 구원파라는 교파가 있습니다. 이 교파는 이제 구원을 받았으니 믿음만 있으면 빚진 것을 갚지 않아도 된다라는 망언까지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 과거의 죄도 현재의 죄도 미래의 죄도 모두 사함 받았다, 천국 가는 티켓을 받아놓았으니 걱정할 것 없다, 이제부터 행함은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상관하지 않아도 된다, 오로지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믿음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행함을 송두리째 무시하고 있습니다마는 참으로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하나는, 행함만을 강조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믿는 것으로는 안된다,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식교나 천주교가 이런 교리와 사상인데 행함만을 전적으로 강조합니다. 또 수많은 설교들이 바로 살아야 한다,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고 외치다보니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인본주의(人本主義)에 빠지고 공로주의로 치우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3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이것입니다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했을 때에는 오직 믿음으로였습니다 마는, 시간이 지나가면서 행함으로, 행함으로가 되었습니다.

 

행함을 강조하는 것은 물론 바람직한 일입니다. 믿는 성도로서 행함을 바로 가져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문제는 행함을 가지고 평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서 공로주의에 빠지고 율법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선행을 사다리 삼아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고 합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가 온데간데없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행함이 있는 공로로 구원받는다. 은혜 없이는 공로를 세울 수없다.”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참 아리송한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두 마디의 말 속에서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발견합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믿음과 행함”, 이 둘의 관계를 바로 소화하고 이해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에 흔들림이 없게 됩니다. 나 자신을 비판하거나 남을 비판하게 될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행함만으로 따지려고 합니다. 선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구제하고 봉사하고 희생해야 한다, 이렇게 평가하다 보니 어느새 믿음은 다 빠져나갔습니다. 이제는 내가 선한 일을 하였다, 내가 의를 행하였다 하고 전적으로 나의 의가 되어버렸습니다. 나도 모르게 율법주의나 공로주의에 빠지게 되어 버립니다.


본문 말씀은 구원받은 성도에게 주시는 말씀인 동시에, 이미 믿음을 가지고 있는 성도에게 특별히 주시는 말씀입니다. “어떤 성도는 행함으로, 어떤 성도는 믿음으로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또 특별히 잘 믿으려고 하거나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성도는 반드시 야고보서를 읽어야 합니다. 야고보서에서 비로소 참 신앙이 무엇이며 바른 신앙은 무엇인지, 그리고 진정 살아있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본문 말씀은 거짓 믿음, 외식적인 믿음, 의식적인 믿음에 대하여 가차 없이 비판하고 있습니다. 불신자들에 대하여 믿음이냐 행함이냐를 논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미 믿는 성도에 대하여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야 된다고 강하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사도 야고보가 말하는 믿음은 무엇입니까? 믿음이 있는데 행함이 없는 것을 말합니까? 아니면 믿음 자체가 없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믿음 자체가 없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믿음이 있는데 행함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오해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야고보서가 이신칭의에 역행한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은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비하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르틴 루터가 사도 야고보가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믿음을 잘못 이해한데서 오는 오해였습니다. 사도 야고보가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믿음은 믿음이 있는데 행함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있다고 말하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믿음 자체가 없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는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본문 말씀에서 사도 야고보가 말하는 믿음이 믿음은 있는데 행함이 없는 것을 말한다면 이것은 분명히 이신칭의의 진리를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한 다른 복음입니다. 갈라디아서를 보면 당시 갈라디아 교회 가운데 예수님을 믿어야 하지만 율법도 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갈라디아서 31절에서 7절 말씀에,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저주를 선포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 16절에서 9절 말씀에,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사도 야고보가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바로 갈라디아서에 말하는 행함이 없는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곧 믿음이 있는데 행함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믿음 자체가 없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마르틴 루터가 오해한 것처럼 여기서 사도 야고보가 말하는 믿음이 믿음은 있는데 행함이 없는 것을 말한다면 우리는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도리어 저주를 받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한 것 같이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행함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다 행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마태복음 520절 말씀의 산상수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마태복음 521에서 48절 말씀을 살펴보면 우리가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형제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마음에 음욕을 품지 않을 수 있습니까? 오른 빰을 치면 왼편도 돌려 댈 수 있습니까? 속옷을 달라는 자에게 겉옷도 줄 수 있습니까? 원수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성취된 율법 곧 예수님이 원하는 뜻을 다 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행함으로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는 주님의 긍휼로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는 자는 반드시 믿는 자로서의 합당한 삶이 나타나게 됩니다. 믿는 자는 시간이 있으면 반드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물론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와 같이 시간이 없는 경우는 예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노라 말만하고 믿는 자로서의 합당한 삶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것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이런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바르게 정립해야 합니다.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받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곧 이신칭의로 구원을 받습니다. 한 사람도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310절에서 13절 말씀에,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319절에서 율법은 죄를 죄 되게 하기 위해 주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합니다. 갈라디아서 324절 말씀에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행함으로 구원 받을 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오직 믿음으로!”(이신칭의) 이것이 없으면 교회가 아닙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로 구원해 주신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구원함을 받기 위해 율법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기초해서 마땅함으로 나타나는 삶인 것입니다. 믿음은 지,정,의로 이루어집니다. 주님께서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신 것을 알고, 그 은혜에 감사하여 감격하며 기뻐하고, 나의 의지를 다하여 그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곧 온 몸으로, 온 삶으로 우리의 믿음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바로 알 때 사도 야고보가 말하는 참된 믿음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한대로 교회사적으로 보아 오래도록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려온 문제가 믿음이냐 행함이냐입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는 갈라디아서나 로마서를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반면 야고보서를 덜 중요한 지푸라기 복음정도로 생각했습니다. 지푸라기라고 하면 쓸데없는 것으로, 아무 가치가 없어 내버릴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여기서 지푸라기 복음이라고 한 것은 그런 뜻에서가 아닙니다.

 

마르틴 루터의 성경관은 이렇습니다. 말구유 안에 아기 예수가 누워 있습니다. 말구유는 성경이고, 아기 예수는 복음입니다. 성경 안에 예수님이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보십시오. 여기 말구유가 있습니다. 구유 안에 지푸라기가 깔려 있고, 그 위에 강보에 싸인 아기 예수가 누워 있습니다. 아기 예수는 복음이요, 갈라디아서나 로마서는 강보쯤 될 것입니다. 그 다음의 지푸라기가 바로 야고보서에 해당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복음이라 한 것이지, 내버릴 정도로 쓸데없다고 하여 지푸라기라는 표현을 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흔히 마르틴 루터가 야고보서를 소홀히 했다고들 말합니다마는, 깊이 알고 보면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사도 바울과 사도 야고보를 놓고 사도 바울 쪽을 선택하여 구원 받는 믿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사도 바울의 믿음과 야고보의 행함을 조화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믿음을 강조한 사도 바울과 행함을 강조한 사도 야고보, 그 사이에는 무엇인가 분명 통하는 것이 있을 것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에서 중요한 말씀은 22절 말씀입니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마침내 믿음과 행함이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믿음과 행함의 문제를 놓고 아우구스티누스가 지혜로운 설명을 합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에 앞선 행함을 논했다”. 믿음과 관계없는 행함, 믿음 이전의 행함, 예수 믿기 전에 가지는 행함,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행함을 논했다는 말씀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행함은 율법주의자의 행함이요, 믿지 않는 사람들의 행함이요,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들의 행함이므로 단어 자체가 사도 야고보의 그것과는 다르다”. 사도 바울의 행함은 믿음에 앞선 행함이요 사도 야고보의 것은 믿음에 따르는 행함이라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아우구스티누스가 밝게 보았습니다. 지혜롭습니다.

 

사도 야고보는 믿기 전의 행함을 말씀하지 않습니다. 믿은 다음에 행하는, 그 행함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과 용어는 똑같은 행함입니다만 말씀하고자 하는 내용에서 보면 둘의 개념이 완전히 다름을 알게 됩니다. 하나는 율법적이요, 하나는 은혜적입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의 행함이요,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다음의 행함입니다. 하나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행함이요, 하나는 구원받은 성도의 행함입니다. 그러므로 이 둘이 충돌할 염려는 없는 것입니다. 참으로 분명한 설명입니다.

 

헤이즈(D.A.Hayes)는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뿌리를 보고, 사도 야고보는 열매를 보았다”. 이 또한 지혜로운 설명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 훼퍼(Bon haeffer, D)도 말합니다. “믿음과 행함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행함과 믿음, 믿음과 행함은 항상 함께 있다. 믿음만 중시하게 되면 자칫 값싼 은혜에 빠지게 된다”. 이것이 본 훼퍼의 설명입니다.

 

성도 여러분, 값싼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 은혜하고 떠들고 다니다보면 간혹 은혜를 값싸게 생각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거저 받아놓고 아무 것도 하지 않거나, 진정 살아 있는 믿음이라면 순교를 해야 한다고 떠들면서 순교는커녕 도망 다니기에 바쁘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그 믿음이 어디로 간 것입니까?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허풍선이가 아닙니다. 믿음에는 거기에 따르는 마땅한 값어치가 반드시 있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입버릇처럼 믿음, 믿음하면서 값싼 믿음에 빠지는 경향이 많습니다. 행함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행함을 통하여 율법주의에 빠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 모두 잘못입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죄인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으면 영원한 멸망을 받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담당하고 죽으셨습니다. 요한복음 316절 말씀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제 영생을 받는 길을 제시합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잠시 살다가 끝나버리는 인생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기에 영생이 있습니다. 그와 더불어 우리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증거 할 사명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영생이 있는 삶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참 믿음은 행함으로 입증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행함에서 우리의 믿음이 표현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진짜입니까?

 

고린도후서 517절 말씀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피조물은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새로워야 합니다.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반드시 섬겨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입으로만 하려고 합니다. 주변에 그런 사람들만 있으면 섬기려던 사람도 지쳐서 포기해버리고 그 다음에는 아주 마음을 닫아버립니다. 누군가가 일을 하겠다면 격려해 주십시오. 안 된다는 생각, 해봤자 별 수 없다는 말로 다른 사람들을 낙심시켜서는 안 됩니다. 자신은 안하면서 비판만 하는 신앙은 죽은 신앙입니다. 머리로만 믿는 믿음은 헛것입니다. 살아 움직이는 믿음,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끌어 올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매달려야 합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길 때 우리는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 담대함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심판을 받을 때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행한 일, 특히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 행한 일이 그대로 드러나게 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주님을 향한 우리들의 사랑이며, 그 사랑의 표현으로서 이웃을 향한 사랑을 기대하십니다. 모든 사람들을 대할 때 주님 대하듯 하며 모든 일을 주님께 하듯 하는지를 순간순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요즈음 주위 사람들을 대하면서 주님께서 섭섭하게 느끼실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형제에 대한 사랑으로 드러납니다. 주님은 도움이 필요한 형제나 자매들을 우리 가운데 두심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시험하십니다. 지금 내 주위 믿음의 사람들 중에 경제적인 면이나 환경적인 면이나 시간적인 면에서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없습니까? 지금 내가 진정으로 돌보야 할 이가 누구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다음에 계속 이어집니다.


이 설교는 주석과 참고문헌 목사님들의 설교를 인용하여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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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믿음과 행함은 본질적으로 하나입니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