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 그는 정말 친일파였나? 자세히 살펴보자
03/28/2015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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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개하고 천박한 인간 말종들이 박정희가 일본천황에게 혈서를 보냈다고 사기치고, 

미개하고 천박한 인간 말종들이 박정희가 "일본사관학교에 들어가서 

일본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혈서를 쓰고" 등의 거짓말을 지어낸다. 


여기 중불방에도 미개하고 천박한 인간 말종들이

박정희 대통령을 끌어 내리기에 전념을 다하는 모습을 본다.     

                        

일본군복 



일본군복...--> 김대중의 일본군복과.박정희 군복비교

동만주에 거주하던 고구려의 유민, 즉 발해의 유민 후예들이 건국의 한 주체요, 

한 기둥이었기에 일제 치하의 조선인들에게는 제2의 조국과도 같았던 

만주국에서 군관이었던 박정희를 일본군이라고 부르면 

듣는 사람들이 박정희가 일본군복을 입고 있었던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박정희는 단 한번도 일본군복을 입고 있었던 적이 없었음에도 

일부 몰지각한 이들과 좌빨들은 사람들에게 그런 착각을 일으키게 하려는 나쁜 심보들이 있다. 

만주국 엄연한 독립국이었다. 
그럼에도 무지한 사람들은 정서상 만주국에서 근무하면 친일파였다는 주장을 한다.
그런데, 당대 사람들에게는 행정상뿐만 아니라 정서상으로도 
만주국이 일본과 혼동될 수 없음이 너무도 분명하였다.
만약 만주국이 일본 통치권 안에 있었으면 광복군 대장의 조카 김일련은 일본 신원조회에 걸렸을 것이다.
행정적으로 엄연히 제3국이었기에 김일련은 태연히 만주국 관리로 복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정서상으로도 생각해 보라. 삼촌은 광복군 장군 김학규인데 

김희선 아버지 김일련이 만주국에서 경찰로 복무할 수 있었을까. 

오늘날의 무지한 사람들의 시각에서는 그런 일은 정서상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발해의 유민 후예들이 거주하던 간도는 우리땅임을 알던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조선인이 만주국 건국에 동참하면 친일파라는 정서가 전혀 없었다.

자기 부친 김일련이 만주 독립군이었다는 김희선 의원의 주장은 무지에서 비롯된 거짓말이었다
.
많은 좌빨들이 이 거짓말에 속았으며, 이 거짓말을 확대 재생산하여 국민을 기만하였다. 

그러나 만주국 경찰은 일본 경찰이라는 좌빨들의 주장 또한 성립될 수 없는 거짓말이다. 
만주 경찰이 결코 일본 경찰일 수 없었듯이 그 만주국군도 일본군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무지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큰 오늘날의 시대에 많은 한국 국민이 
마치 박정희가 일본군복을 입은 일본군이었던 것처럼 속고 있다. 
사실 김대중이 그 상징적 존재인 좌빨들의 친일인명사전은 박정희를 겨냥하고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동시대에 

일본군복을 입었던 김대중의 사진이 
박정희는 일본군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정말로 전교조와 노사모 부류의 미개인들의 거짓말 창작 능력은 대단하다.
어떤 미개인은 박정희가 일본천황에게 혈서를 보냈다고 사기치고, 

한 미개인이 박정희가 "일본사관학교에 들어가서 

일본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혈서를 쓰고" 등의 거짓말을 지어낸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혈서를 썼다고 주장하는 반면, 

윤리강사 이현은 박정희가 일본사관학교에 들어간 후 혈서를 썼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미개인들과 좌빨들이 이런 거짓말들을 창작해낼 수 있었던 시절도 한 철이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지난 5일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 사본을 공개한 후로는
좌빨들이 이제 더 이상 이런 픽션소설쓰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여태껏 좌빨들은 박정희가 일본천황에게 혈서 보냈다는 거짓말
박정희가 1939년에 독립군을 토벌했다는 거짓말을 동시에 해왔었다,

박정희가 일본 천황에게 혈서를 보낸 적이 없다는 사실은

지난 5일의 만주신문 기사 공개로 확증되었지만, 

박정희가 1939년에 독립군을 토벌하였다는 주장은 허위주장이었음이 

이미 지난 2005년에 서울중앙지검 형사8부에 의해 확인되었었다.

(http://www.chosun.com/national/news/200512/200512190078.html).


그럼에도 이현같은 픽션소설가들이 여전히 학생들에게 거짓말을 가르치며

인터넷에 동영상으로 그런 허위사실 유포를 하였으나, 

금번의 만주신문 기사 공개 사건을 계기로 사람들의 관심이 객관적인 사실로 쏠리게 되었다.



위에서 우리는 일본 인명사전에 기록된 박정희의 경력을 본다. 

중앙의 19-7이라는 연대 표시 바로 옆에 

박정희는 "만주국군 소위"였음이 명기되어있다. 


만약 자국군이었다면 일본군(日本軍)이라고 명기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외국군이었기에 만주국군이라고 명기되어 있다.

일본인들이 박정희는 일본군이 아니었다는데, 

도대체 왜 한국의 어떤 무지한 이들은 

박정희가 일본군이었다는 황당한 주장을 하는가?

박정희는 유학생이었으며, 유학생은 일본군 장교가 될 수 없었다. 

한국 육사에도 아프리카나 동남아 등지에서 유학생이 온다.
만약 아프리카 사람들이 한국 육사에 유학했던 아프리카 군인을 한국군이라 부르면
우리가 기절초풍하지 않겠는가? 위에 네째 줄에 보면 "일본육군사관학교 유학"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자, 박정희 준장이 1954년에 미국 육사(정확히 말해 포병학교)에 유학하였다. 
그렇다고, 박정희가 미군이었는가? 전두환 역시 두 차례에 걸쳐 미국 육사에 유학하였었다. 

그렇다고 전두환이 미군이었는가? 박정희는 일본육사에 입학한 것이 아니라, 

포병학교 과정을 일년간 이수하였다. 

자, 박정희와 전두환이 1950년대에 미국육사 연장교육 프로그램에 유학해 있는 동안 

미국 대통령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혈서를 써야 했던가? 

아니다. 유학생들은 유학생반에서 따로 수업을 받았다. 

1940년대의 일본 육사 유학생반도 마찬가지였다. 

유학생들은 일본사관생도 제복도 입지 않았을 뿐더러 수업도 유학생들끼리 따로 받았다. 

위의 박정희 학력에 57기생 상당으로 되어있다. 

일본의 육사 57생기생들은 유학생들을 동기생으로 여기지 않았다. 

단지, 같은 해에 재학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일본육사 유학생들이 혈서를 썼다는 거짓말을 지어낸 

윤리강사 이현의 픽션소설 쓰는 실력은 실로 대단하다. 

그러나, 팩트(facts)와 너무도 동떨어진 거짓말을 하는 자가 

역사와 윤리를 강의하면 교육이 망가지지 아니하겠는가?


나의 조국 / 박정희 작사·작곡

백두산의 푸른정기 이땅을 수호하고
한라산의 높은기상 이겨레 지켜왔네
무궁화꽃 피고져도 유구한 우리역사
굳세게도 살아왔네 슬기로운 우리겨레

영롱한 아침해가 동해에 떠오르면
우람할 손 금수강산 여기는 나의 조국
조상들의 피땀어린 빛나는 문화유산
우리모두 정성다해 길이길이 보전하세

삼국통일 이룩한 화랑의 옛정신을 
오늘에 이어받아 새마을 정신으로
영광된 새 조국에 새역사 창조하여
영원토록 후손에게 유산으로 물려주세

자, 도대체 좌빨들은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하였기에 
우리의 박정희 대통령을 친일인명사전에 등재하였다는 말인가? 

민족문화연구소가 지난 5일 혈서 기사라며 공개한 

만주신문 기사에는 혈서 사진도 혈서 목격자도 없고,

당초의 민문연측 주장과 달리 
그 글자도 "진충보국 멸사봉공"(盡忠報國 滅私奉公)이 아니라, 
"일사에 어봉공"(一死以テ御奉公)으로 밝혀졌다.

만약 그 시대 학생이 열심히 공부하여 
좋은 학교에 진학하겠다는 결심을 밝히면 친일이었는가? 아니었다.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말을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했다는 말로 
해석하면 그 해석은 틀린 해석이다. 
"일사에 어봉공"은 입학시켜 주면 좋은 생도가 되겠다는 결심을 밝힌 말이다. 

이 말귀에 전혀 친일논란의 소지가 없다.

무엇이 한 인물의 친일을 입증하는 기사인가? 


바로 아래의 여운형의 기사이다.




기사 제목이 "황민반도"이다. 
여운형이 조선민족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글을 쓰고 조직을 키웠던 것이다. 

바로 여운형같은 인물이 

일제의 조선인 황국신민화 정책에 앞장섰던 

친일 부역자였던 이다.


아래 사진에서 보듯 여운형의 친일 행적들은 그 물증이 분명하다. 



▲ 여기 여운형의 학병 권유 격문이 실린 

반도학도출진보(半島學徒出陣譜)』사진이 있다.



▲ 그리고 여기 '반도이천오백만동포에게 호소함'

이라는 격문 제목과 '여운형씨 수기'라는 

필자의 이름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좌빨들이 

여운형 등 진짜 친일파들의 이름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 만주국군 소위 시절의 박정희의 사진이 있다. 
보라! 박정희의 군복은 일본군복이 아니었다. 
그는 결코 일본의 황군이 아니었기에 일본군복을 입지 않았다. 

조선인 일개 학도병도 일본군복을 입었으나,
만주국군 군관 박정희는 일본군복을 입지 않았다. 
그 이유는 만주국군은 일본의 황군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많은 국민들이 군복에 대한 상식이 없기 때문에 좌빨들의 선동에 놀아났었다.


그러나, 아래의 김대중의 목포상고 졸업 앨범이 박정희의 누명을 벗겨준다.

고등학생이 사회 유지로 여겨지던 시대에 목포상고 회장은 그 지역의 지도자였다.
그런데, 여운형이 조선인 황군 지원 권유 격문을 쓰던 바로 그때에

김대중 몸소 일본군복을 입고 연극 공연을 하며 졸업 사진을 찍었다~!!!!!!!!!!!!!!!!!!!!. 

해방이 되자마자 여운형의 공산당 조직은 건준으로 변신하는데, 
이때 김대중이 목포지부 간부가 되었다. 

즉, 김대중은 일제시대에 
여운형이 조선인 황군 지원 권유 격문을 쓰던 때부터 여운형의 추종자였으며, 
일본군복을 입고 조선인 학생들을 선동했던 그 행동 대장이었던 것이다.





자, 여기서 박정희의 군복은 전혀 일본군복이 아니었고,

김대중제복이 일본 황군 복장이었음을 아래 일본군 사진 자료들로 확인해 보자.



여기 윗사진 왼편의 일본군 장교가 긴 칼을 차고 있는 자세를 보라.

바로 김대중의 앨범 사진에서 차고 있는 칼이 일본검이었던 것이다. 




학도병이라도 일본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 황제로부터 봉급을 받는 군인은 누구든 반드시 저 복장 차림이어야 했다.

박정희는 단 한번도 저런 군복들을 입은 적이 없다.~!!

그럼에도 무지한 이들과 좌빨들이 박정희를 일본군이라고 부를 때 

사람들에게 마치 박정희가 저런 일본군복을 입고 있었던 것으로 오해하게 된다.
. 
도대체 그런 거짓 지식을 전파하는 비뚤어지고 못된 심보가 왜 필요한가? 

이순신 장군에게 왜장 옷을 입혀놓고 이순신 장군 영화를 제작하는 것이 가능할까? 

그 시대 사람들에게 만주국군은 일본군이 아니었음이 복장상으로도 너무도 분명하였다.

 

 
전범에게 고개숙인 김대중




과연 여운형과 김대중에게 그들의 친일 부역은 강요에 의한 것이었지 

결코 진심이 아니었다는 변명의 여지가 있을 수 있을까?

김대중이 1989년에도 여전히 히로히토 일왕에게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1998년 대통령에 취임한 후 제일 먼저 서두른 일이 


히로히토의 아들을 천황으로 부르자는 것이었다~!!!!!

오늘날 서양국가들이 영국 등 유럽의 왕들은 king이나 queen으로 부르고 
일왕만 emperor로 불러주는가?

왜 우리나라만 일왕을 천황이라 불러야 하는가? 

그것은 김대중 일본군복차림의 자신의 모습을 뽐내며 활개치던 목포상고 시절에 

그의 몸에 배어있던 황민근성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그 시절의 일본군복 사진이

박정희가 일본군이었다는 누명을 지금 벗겨주고 있는 것이다.~!!


           

               박정희 친일논란 정확한 반박자료


김대중의 졸개 김삼웅이 조작한 박정희 친일 날조에 대한 반박


사기꾼 김삼웅: 만주군관학교를 투철한 친일정신과 열성적 훈련으로 수석 졸업의 영광을 차지하며, 수석졸업의 영광으로 금시계를 선물로 받고 졸업생 대표로 천황찬양으로 가득한 답사를 피로 절규하듯 읽습니다.


반박: 1942년 3월 24일 만주일보의 보도에서도 확인되듯이 박정희는 전체수석이 아니라 만계 (조선인, 한족, 만족) 중 1등입니다. 여기서 박정희가 천황에 충성하겠다는 답사를 했다는 헛소문도 나게 되지만 실제 답사는 일본인 오까미 쇼히꼬(岡見尙彦), 고야마 시게요시(小山重嘉) 두사람이 했습니다. 박정희가 경례를 붙이는 그 유명한 군관학교 졸업사진 기사의 우측에서 13번째 줄에 정확히 두 일본인이 답사했다고 쓰여 있습니다. 김삼웅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기꾼 김삼웅: 다카기 마사오는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관례대로 우등생에게 주어지는 일본육사 특전의 혜택을 누리게 되며 다카기 마사오는 남들보다 철저한 황군정신으로 몸과 마음을 닦고 열심히 공부한 것입니다. 졸업때는 조선인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일본 육군 대신상을 받으며, 이로써 박정희는 완전한 일본인 다카기 마사오가 되었습니다. 대일본제국의 군인이 되었습니다.


반박: 일본육사 입교는 군관학교 우등생에게만 주어지는 특전은 아닙니다. 만주군관학교가 일본육군사관학교의 예과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陸軍士官學校 名簿編纂會에서 발간한 '陸軍士官學校名簿 五十期以降 非賣品’의 일본육사 57기 졸업생 1,268명 중에는 박정희(다까기 마사오 高木正雄)도 등재되어 있습니다만, 은사상 수상자 25명의 명단에는 없습니다. 자료 확인도 하지 않고 박정희가 일본육군대신의 상을 받았다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는 따라지 역사전공 교수 김삼웅, 이게 과거사 역사교육의 슬픈 현실입니다.


사기꾼 김삼웅: 훗날 다카기 마사오가 10.26으로 머리에 총 맞고 황천갔을 때, 주한 일본대사관의 한 일본외교관은 ‘‘대일본제국 최후의 군인이 죽었다.’’라고 하였답니다.


반박: ‘했다’도 아니고 ‘하였답니다’군요. 남에게서 들었다는 소리입니다. 완전한 김삼웅의 소설입니다. 일고의 가치도 없는 개소리입니다.


사기꾼 김삼웅: 다시, 다카기 마사오 소위는 만주 제8연대의 소대장으로 임명되어 모란강 부근의 영안으로 전출되었다가 화북지방의 열하 보병 제8군단에 배속됩니다. 간도에서 활약한 한인 독립군부대가 북만주로 이동할 때와 노령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서쪽으로 진출할 때에 주둔하던 요충지였으며, 일본군에 대한 항일 투쟁이 끊이지 않았던 지역입니다. 


항일세력은 팔로군, 군부군, 광복군, 조선의용군, 소규모의 유격대 등이었는데 다카기 마사오는 이곳에 임관한지 1년만에 중위로 진급합니다. 다카기 마사오는 열성적으로 항일부대를 토벌했던 공로로 승진이 빨랐던 것입니다. 


반박: 박정희가 근무하게 된 만주군 보병 제8단은 원래 제2군관구 예하부대로 목단강성 목단강(모란강) 부근의 영안시에 주둔하다가 1943년 11월에 제5관구 예하부대로 변경되어 열하성 흥륭현으로 이동된 부대입니다. 군관구사령부는 승덕이고, 제8단은 흥륭현 반벽산에 주둔했습니다. 즉 박정희가 견습사관 훈련을 마치고 만주군 소위로 1945년 7월 15일 제8단 본부의 을종부관으로 부임했을 때 이미 부대는 반벽산에 주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부임도 하기 전에 간도에 주둔하지도 않는 부대에서 독립군을 토벌하다니 박정희가 귀신입니까?


제8단은 만리장성 북쪽 반벽산에 주둔해 있었기 때문에 만리장성 남쪽의 중공 팔로군과는 접전한 적이 없습니다. 김삼웅이 암시하는 간도특설대와 일본 북지나 방면군이 주력인 철석부대가 만리장성 남쪽 북녕로지구를 중심으로 중공 팔로군 제11, 12, 13단과 접전을 벌렸는데 박정희는 간도특설대에 근무한 적이 없습니다. 박정희의 제8단은 별다른 전투없이 해방을 맞이합니다. 김삼웅은 도서관에서 자료도 뒤지지도 않고 이런 저런 책에서 짜깁기를 하거나 주워들은 것만으로 책을 썼기 때문에 아마도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학자적 태도도 양심도 팽개친 불쌍한 학문돌팔이입니다.


사기꾼 김삼웅: 일본은 만주 서남부와 중국북부에 투입할 용맹한 부대를 선발하여 특수부대를 만듭니다. 다카기 마사오는 중국북쪽 (열하성 만리장성 남방 평곡,북경 동북방)로 투입되어 항일 세력과 치열한 격전을 벌였으며, 여기서 혁혁한 공(수많은 항일 독립군을 때려잡음)을 세웁니다. 조선인의 간도특설대, 러시아인의 찬야부대, 몽고인의 기야부대 등등이 있었는데 간도특설대가 가장 강력했다고 합니다. 다카기 마사오가 소속한 간도특설대 요원들이 얼마만큼 항일군의 토벌에 커다란 공을 세웠는지를 대변해주는 이야기입니다.


반박: 위에서 설명한대로 박정희는 제8단의 을종부관으로 명령을 받아 전달하거나, 부대 단기를 관리하는 본부근무를 했습니다. 그리고 간도특설대에는 간 적이 없습니다. 간도특설대에 근무한 79명의 조선인 명단에 박정희는 없고, 그 많은 조선인들이 한결같이 박정희는 본 적도 없다며 간도특설대 근무사실을 부인합니다. 김삼웅은 일본 북지나 방면군이 1945년 1월 철석부대를 조직하면서 간도특설대가 록평에서 옮겨온 사실과 시간을 헷갈려 박정희가 근무한 것으로 착각을 했거나 아니면 박정희를 음해할 목적으로 억지를 쓰는 것입니다. 아마 후자쪽이겠지요.(滿洲國軍, 蘭星會, 1970, 738페이지 참조) 김삼웅은 역사를 자신의 출세를 위해 사용한 비열한 역사 장사꾼에 불과합니다.


사기꾼 김삼웅: 다카기 마사오는 1945년 8월 15일 이후에는 어떤 행동을 하였을까? 패잔병의 낭패감을 맛보며 절망에 빠진 것도 잠시, 다카기 마사오는 곧바로 변신을 시도합니다. 일본군복을 벗어 던지고 민간복으로 같아 입고 만주군의 부대를 탈영하여 피난민으로 가장하여 피난민 대열에 끼어 들어 북경으로 들어가 광복군 대열에 합류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유리한 상황에만 빌붙는 기회주의자의 전형을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후에 다카기 마사오는 좌익계열의 장교가 되고 여순 사건 연루자로 체포되지만, 천명이 넘는 동료들을 밀고하여 죽음으로 몰아 넣고 저 혼자 살아 남습니다. 


다시 반공주의자로 변신하여, 기회주의자란 무엇인가를 일반 국민들과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완벽하게 보여 줍니다. 원래 이런 인간이니 일본 패망 후 곧 바로 광복군으로 위장하여 합류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으며, 독립운동가들을 적극적으로 토벌하던 일본의 진짜군인 다카기 마사오가 광복군 흉내를 낸 것입니다.


반박: 해방 후 구 일본군이나 만주군에 근무하던 조선인이 광복군이 되는 것은 흔한 일이었고 임시정부와 광복군은 해방이전부터 그런 정책을 꾸준히 추진했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1940년 9월 17일에 창설된 광복군은 군대꼴을 갖추려고 김학규 장군이 초모(모집)공작에 나서는 등 끊임없이 노력했지만 해방당시까지 고작 300명 정도만을 모았을 뿐입니다. 해방공간에서 임시정부의 권력강화를 위해서도 광복군의 확대개편은 절실한 과제였고, 구 일본군이나 만주군 소속의 조선인의 광복군 편입에 필사적이었습니다. 김삼웅은 대단치도 않은 만주군 중위 출신의 광복군 편입을 무슨 기회주의처럼 각색하고 있습니다. 역사학자 E. H. 카가 김삼웅이를 보았다면 뺨싸대기를 올려 부쳤을 것입니다.


박정희는 만주군 시절에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민족주의자인 만주군관학교 선배 최남근의 영향을 받았고 국군에 편입되어 최남근의 선후배인 만군출신과 동료의 신분으로 어울립니다. 게다가 1949년 10월 6일 박정희의 인격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존경하는 셋째형 박상희가 대구폭동의 여파로 경찰에게 살해됩니다. 그 영향의 반동으로 한때 좌익과 어울려 곤욕을 치렀지만 6.25 발발 후 얼마든지 북으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남하하여 국군에 합류함으로써 진심으로 전향했음을 행동으로 증명했습니다. 이것이 박정희 좌익경력의 전부입니다.


사기꾼 김삼웅: 5.16 쿠데타로 집권한 뒤에도 틈만 나면 주일 대사관을 통하여 입수한 일본 사무라이 영화를 관람하고 일본 검도를 즐기는 것이 다카기 마사오의 취미 생활이었으며, 또한 당시 조선일보 주필 선우휘씨 등과 청와대에서 술을 마시며 일본천황의 교육칙어를 번갈아 외우는 내기나 시합을 하곤 했습니다. 다카기 마사오의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지독한 향수를 엿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래도 이런 것은 얌전한 행위에 속합니다. 중앙일보 기사를 보면, 가관입니다. “…계엄선포 한 달 전쯤인가(1971. 10. 17 계엄이 선포되었다) 박대통령이 나를 불러요.(여기서 ‘나’는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 집무실에 들어갔더니 박대통령은 일본군 장교 복장을 하고 있더라고요. 가죽장화에 점퍼차림인데 말채찍을 들고 있어요. 박대통령은 가끔 이런 복장을 즐기곤 했지요. 만주군 장교시절이 생각났던 모양입니다. 다카기 마사오 중위로 정일권 대위 등과 함께 일본군으로서 말달리던 시절로 돌아가는 거죠. 박대통령이 이런 모습을 할 때면 그분은 항상 기분이 좋은 것 같았어요.” 


반박: 이런 류의 삼류소설은 자극적인 이야기 지어내기 좋아하는 일본의 저널리즘이 많이 만들어 냈는데 이미 거짓으로 판명나서 누구도 믿질 않고 있는데도 새로 입문한 얼치기 민족주의자들에 의해서 아직도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선우휘 이야기는 그야말로 평가할 가치조차 없는 ‘카더라’이고 강창성의 증언이라는 것도 강창성씨가 수차례에 걸쳐 부인했던 사안입니다. 김삼웅이 더러운 스토커임을 드러내는 증거일 뿐입니다.


사기꾼 김삼웅: 5.16후 우방 각국에 친선사절을 보냈는데 제일 먼저 보낸 곳은 일본이며, 다카기 마사오 대통령이 가장 먼저 방문한 나라는 일본이며, 최초로 대외정책을 밝힌 기자회견의 주제는 한·일 교섭의 재개이며, 다카기 마사오 대통령의 일본 방문중 동경의 한 요정에서 다음과 같은 망언을 하여 동석했던 일본인 조차 놀라게 했다고 합니다. ‘‘.... 나는 정치도, 경제도, 모르는 군인이지만 명치유신 당시 일본의 근대화에 앞장섰던 지사들의, 나라를 위한 정열만큼은 잘 알고 있다.그들 지사와 같은 기분으로 해볼 생각이다.’’ 라고, 물론 유창한 일본어로. 허긴 이 부분만 떼어 놓고 보면 이해 못할 것도 없지만, 그래도 이런 자가 18년간 대통령을 해 먹었다 생각하니 많이 창피합니다. 


1963년 12월 17일 다카기 마사오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일본의 자민당 부총재 오노는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은 걸작의 말을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과는 부자 사이 같은 관계로서 아들의 경축일을 보러 가는 것은 무엇보다도 즐겁다.’’ 라고. 사실 자민당의 보수 세력은 다카기 마사오와 군대생활을 같이 했던 일본제국의 동료 및 상관들이었습니다. 


일본군국주의 세력의 정신적 유대는 대일 굴욕회담을 (한일협정) 성사시키며, 여기서 식민지 지배 피해에 대한 거의 모든 권리와 주장을 포기합니다. 또한 1973년 서울 지하철 차량부정도입 사건을 저지르고, 일본에서 지하철차량 186량에 대한 매매계약을 체결하였는데, 일본에서 3,204만엔하는 가격을 6,350만엔이란 두 배 정도나 비싼 가격으로 계약하였습니다. 이것은 만주군 출신 선배들의 로비와 정치자금의 리베이트가 작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반박: 해방 후 최대의 사안은 먹고 사는 일이었는데 6.25 이후 전후복구와 함께 그것은 지상명령과 같았습니다. 잘난 민족주의자 이승만은 한일회담을 십년이나 끌어오면서 배상금 30억을 고집했습니다. 그 당시의 일본의 외화보유고 총액이라는 게 1957년에 5억달러, 1958년에 8억달러, 1959년에 10억달러 정도였습니다. 30억달러를 현금으로 내놓으라는 이승만은 한마디로 한일국교정상화는 안 되도 좋다는 뱃보였고, 경제개발 따위는 관심도 없이 민족주의자로 비쳐지면 그걸로 족했습니다.


혁명으로 집권한 박정희는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대일 청구권으로 대체했고, 개인보상 대신 경부고속도로 건설, 포항제철 건설 등에 썼다는 것은 누구나 다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그런 와중에 박정희도 인정하듯 ‘굴욕적 외교’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후세 사람이 박정희가 친일파여서 그렇게 했다고 평가하든지 굴욕을 참고 경제개발자금을 얻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 평가하든지 자유입니다만 없는 사실을 덧붙여 박정희를 폄하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분명한 것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풋내기 김종필의 능력만으로는 한일회담과 청구권 협상은 타결되기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지하철 도입도 청구권 자금의 사용이 일본의 기계류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결과입니다.


결론입니다. 사기꾼 김삼웅은 친일청산을 외칠 자격이 없는 사이비 민족주의자이고, 역사연구의 기초부터 무시하는 양심없는 학문사기꾼에 불과합니다. 그 댓가로 독립기념관장이 되었다는 것이 오히려 대한민국의 수치입니다. 역사는 거짓으로 깨끗해 지지 않습니다.


출처 : 네이버 '대긍모'카페 


+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개소리에 대한 반박


김대중 졸개, 김삼웅- 박정희 대통령이 오카모토 미노루라고 조작

박정희대통령이 오카모토 미노루(악명높은 왜놈)라고 주장하고 있는 사이비 사학자(史學者) 김상웅


오카모토 미노루는? 1929년의 광주학생사건(光州學生事件)('학생의 날') 사건에서 공(?)을 세운 사이비교육자인 한 왜놈으로 악명이 높다.


김상웅은? 김대중 추종하는 사이비 사학자로서, 박통이 오카모토 미노루라고 주장, 그 공으로? 노무현 정권때 독립기념관 관장을 맡게됨



필자(김병희)는 홈페이지[http://home.megapass.co.kr/~gimbyngh/]를 가지고 있어서, 지구촌 사람이면 누구든지 마음대로 와서 구경도 하고 글도 쓸 수 있게 하고 있는데, 오늘 새벽에는 "이상유"라는 분이 오셔서 쓴 글에서 다음과 같은 사연을 보았다 ["…"은 수십 자씩 생략했음을 뜻함]:


"저는 서울에서 근무하는 교사 이상유입니다. … 저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 박 대통령에 대한 근거 없는 음해가 많았지만,  …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다른 창씨 명도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도 악질적입니다. … 그러다가 인터넷을 검색하던 중 정말 우연치 않게 박사님과 고민철 씨가 게시판에서 주고 받은 글을 보게 되었는데, 그 곳에는 제가 그렇게도 오랫동안 찾아다니던 오카모토 미노루의 비밀이 상세히 설명되어 있었습니다.  … 


순간 박대통령을 음해에 앞장서던 김삼웅이 떠올라 치를 떨었습니다. 김삼웅은 독립기념관장을 하던 중에도 신촌의 서점에서 가끔 만나기도 하였습니다. … 이제 박대통령이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음해가 사실이 아니라는 확실한 근거를 가지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모두가 박사님의 소중한 증언 덕분입니다. … 홈페이지 어딘가에 오카모토 미노루의 사진을 올려놓았다는 글이 있던데 찾을 수가 없군요.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위의 이상유님 글을 요약하면

박정희 대통령의 창씨 명이 타카키 마사오(독립군을 비밀리에 도와준 사람으로 독립군사이에 유명) 와 오카모토 미노루(김상웅이 주장)라는 설이 있는데 있는데, 오카모토 미노루는 노무현 정권때 독립기념관장으로 임명된 김삼웅이 박정희를 음해하려고 조작한 것이라는 것이다.


참으로 기가 막힌다. 사이비사학자에게 독립기념관장이란 중책을 누가 천거해서 누가 임명(누구긴 누구야... 김대중아냐?)했는지는 모르지만, 꼴두기가 어물전 망신시키는 꼴이군. 필자는 다음과 같은 회답을 보냈다:


이상유님 보세요


혜서 잘 읽었습니다. 교육 동지를 만났군, 반갑습니다.


더욱 박정희 대통령의 참모습을 아시려고 주야 분투하신다니, 전교조 무리들이 많다는 곳이라 진흙 속에서 구슬을 만난 느낌입니다.


박정희군은 저의 죽마고우인지라, 그가 오카모토(岡本) 운운의 일본식 이름을 가진 일이 없음을 잘 알고 있는데, 어느 엉터리 사학도가 그런 발설을 한 모양입니다.

  

오카모토라는 대구사범 교유는 광주학생사건 때 우리 조선인학생들을 때려잡아 수훈 갑인 자로서, 당시의 조선총독이 대구사범 학생감으로 특진시켰기에, 박군(박정희)이나 저를 포함한 우리 대구사범 조선인 학생들은 전원이 그를 개나 돼지처럼 악종으로 보았답니다.


그 사학자(김상웅-김대중 추종자), 그 자는 틀림없이 친북정권의 수하로서 박 대통령을 음해하려는 의도로, 그 악종의 성을 박군의 일본식 성으로 둔갑시킴으로써, 국민들의 박대통령에 대한 추모의 정을 말살 내지는 희석시키려는 음모의 발로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자서전을 쓰면서 그 오카모토 학생감에 관해서 여러 번 언급은 했지만, 모두가 교육자다운 모습은 없고, 시종일관 조선인 학생의 사상동향에서 민족정신을 뽑아, 독립운동의 씨를 말리려는 그의 더러운 수작을 폭로했을 뿐이었고, 귀하께서 말씀하신 그의 사진을 올린 기억은 없습니다.


여불비례 2008.11.13 울산 일산진에서 김병희 

http://home.megapass.co.kr/~gimbyngh/


            들통난 민족문제연구소의 혈서 기사 조작


최근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하였는데,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일제 시대 때 일본군 소위였다는 이유로 그 사전에 등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박정희 만주국군 소위였지, 절대로 일본군 소위가 아니었다. 그 누구든 일본군은 만주국군복을 입을 수 없었다. 만주국군 소위 시절의 박정희의 아래 사진이 보여주듯 박정희가 입은 군복은 만주국군복이었다. 그는 단 하루도 일본군복을 입은 일이 없었다.


목포상고 졸업앨범에 실린 아래 김대중의 사진들(붉은 색 원)이 보여주듯 일본군복을 즐겨입었던 인물은 김대중이었다. 그는 목포상고 학생회장 시절 학도병 황군 지원 권유 연설을 아주 잘했다고 한다. 당시 학생 연극은 학도병 미화 프로파간다였는데, 김대중은 일본군복을 입고 연극을 하여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광복군 관계자들이 이구 동성으로 하는 증언 박정희는 만주에서 조선인 병사 50 명을 탈영시켜 애국가를 가르친 뒤 광복군에 입대시켰다는 것이다. 누가 그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둔 것이 아니므로 이런 증언 사료들을 사진으로 확증할 방법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의 독립운동을 사진으로 입증할 자료들이 희박하다면 
김대중 친일 행적을 입증할 사진 자료들은 여기서도 분명히 보인다. 조선인 학도 지원병 권유 연설을 하며 쌓은 연설 실력으로, 그리고 학도병 황군 복무를 미화하는 연극으로 쌓은 대중 선동 노하우로 국회의원 선거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며, 광주사태 선동을 하였던 김대중이 히로히토 일왕에게 머리 숙이는 모습을 우리는 아래 사진에서 발견한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지난 11월 5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만주국 군관으로 지원하는 서류와 함께 혈서를 섰다는 내용이 담긴 1939년 3월31일자 ‘민주신문’ 기사의 사본을 공개했는데 도대체 이것이 말이 안된다. 


첫째 연대가 맞지 않는다. 박정희의 만주국 군관학교 진학은 그로부터 1년 후의 일이다. 만약 박정희가 혈서를 썼고, 민족문제연구소 주장대로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면 만주로 가기 전에 남로당에 의해 암살되었을 것이다. 어떻게 박정희가 귀국하자마자 남로당이 VIP 특별대우를 하며 박정희를 추종하였겠는가? 박정희가 아직 만주에 있었을 때도 광복군이 달려와 그를 광복군 중대장으로 영입하지 않았던가? 더구나 만주에서의 박정희의 행적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 등소평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중국 최고 영웅으로 추대하였을 리 있겠는가?


위 동영상에서 보듯 지난 12일의 MBC 100분 토론 때 민족문제연구소의 박한용이 혈서 기사라며 복사된 문서를 내미는 순간 그들이 지난 5년간 해왔던 두가지 거짓말이 일시에 명약관화하게 드러났다. 중국 공산당 팔로군을 독립군이라 불러 국민을 혼동시키는 민족문제연구소가 1939년 박정희가 만주에서 독립군을 토벌했었다는 주장이 그 첫번째 거짓말이요, 박정희 혈서 기사가 만주일보에 실렸다는 주장이 그 두번째 거짓말이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외화를 써가면 조선족 류연산을 시켜 책을 위조하게 하였으나, 아래 문건에서 보듯 그 내용이 모두 거짓말이었음이 드러난 바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박정희가 1939년 독립군을 토벌했다는 유언비어를 온 천지에 퍼뜨려 국사를 공부하는 학생들을 혼동시켜 왔다. 그런데, 위 동영상의 100토론에서 박한용이 지 입으로 박정희는 1938년 문경에서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음을 입증한다. 이렇듯 지난 12일의 100토론은 박정희가 1939년 독립군을 토벌했다는 종전의 민족문제연구소의 주장은 새빨간 거짓말들이었음이 시청각적으로 입증해 주는 순간이었다.

두번째 거짓말은 박정희 혈서 기사가 만주일보에 실렸다는 주장이었다. 자, 조선신보는 북한신문이요, 조선일보는 남한신문이다. 근래에 홍익대 여대생 이도경의 입방아로 이른바 루저 대란이 일어났다. 70년 후에 어느 단체가 조선신보에 루저 대란이 실렸다는 주장을 5년간 전 매체를 통해 대대적으로 했다고 하자. 그리고, 5년 후에 말을 바꾸어 조선일보 기사가 여기 있다며 자료 공개를 했다고 하자. 그러면 식자들은 도대체 이 괴단체는 북한신문과 남한신문도 구별치 못하는 무식쟁이들의 단체인지 의아해 할 것이다. 바로 이 사건이 지난 12일의 100분 토론 때 있었다.


자, 지난 5년간 민족문제연구소는 박정희 혈서 기사가 만주일보에 실렸다고 주장해 왔었다. 그런데, 아래의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자료가 밝히듯이 만주일보 1908년에 폐간된 신문이었다. 


만약에 민족문제연구소가 신문 자료에 의해 박정희 혈서설을 주장했었던 것이라면 무엇하러 1939년에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만주일보에 실렸었다고 전 매체를 통하여 지난 5년간 주장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글을 읽을 줄 몰라 만주신문을 만주일보로 읽었던 것인가? 만약 이처럼 실로 민족문제연구소가 문맹자들의 집단일진대 그들이 있어야 할 곳은 저능아 재교육장이다. 역사 토론은, 더욱이 민족 문제에 대한 역사 토론은 책을 위조하는 사기꾼들은 그 버릇을 고친 후에, 그리고 신문이름조차 지난 5년간 틀리게 읽었던 문맹자들은 저능아 재교육장에서 공부 좀 더 한 후에 참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위 토론 중 중국공산당 팔로군을 항일부대라고 부르는 민족문제연구소 박한용은 중국공산당 팔로군과 조선독립군을 동일시한다. 그런데, 중국공산당은 항조선족이라는 의미로 항일을 사용하였다. 같은 독립운동을 하여도 중국의 김구는 후원을 받아야 했고, 미국의 이승만은 상해임정을 후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중국에서는 조선인들이 토지를 소유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나라잃은 민족이 갈 곳이 없었을 때 만주족이 조선족이 토지를 소유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중국인들은 온갖 방해를 하였다. 


박한용 항일부대라 부르는 무장단체는 한때 항일연군이라 불렸던 무장단체였는데, 이들이 바로 만주국 건국 이전 수십년간 철권통치로 지배하였던 무장한족이었다. 관동군과 무장한족은 평화공존의 관계였다. 관동군은 주둔비용으로 만주철도 부설을 지원하는 일 외에도 프리미엄으로 무장한족에 현대화된 군사무기를 공급했고, 무장한족은 그 군사무기를 가지고 만주족을 철권통치로 지배했었다. 그런데, 관동군과 무장한족은 평화공존의 관계가 1931년에 깨졌는데, 그 이유는 무장한족이 일본인들의 만주철도 부설권을 침범하였을 뿐만 아니라, 만주족이 상권까지 침해하였으므로 관동군도 만주의 독립운동가들도 더 이상 인내할 수 없었으니 이를 만주사변이라 부른다. 이미 건국 준비를 완료한 만주의 독립운동가들은 신속하게 그 이듬해에 만주국을 건국하였으며, 그때부터 관동군도 무장한족과의 동맹을 끊고 만주의 원주인과 동맹관계를 맺었다. 


무장한족이 만주를 재침략할 명분이 바로 만주에서 조선족을 몰아내자는 구호였으며, 그 목표를 항일이란 말로 표현하였다. 사실 만주의 모든 조선족이 일본 국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김일성에게 일본 국적이 있었는가? 중국 공산당은 김일성 역시 일본인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공산주의 혁명에 협조하는 조선인은 혁명에 성공한 후 토지와 재산을 분배해 주겠다는 것이 그들의 약속이었다. 


1912년부터 1931년까지 만주를 통치한 한족 군벌은 조선족이 무국적자라는 구실로 조선족 토지를 합법적으로 몰수하는 법을 제정하였는데, 1932년 만주국이 건국되어 조선인 토지 소유를 합법화하자 이것을 만주국 침략의 명분으로 삼았던 것이다. 박한용이 항일부대란 칭한 무장단체는 나중에 팔로군이라 불리지만, 위 동영상에서 박한용이 언급한 시기의 이 무장단체는 조선인만 골라 약탈하던 마적단, 즉 동북인민혁명군이란 명칭의 마적단이었다. 


동북인민혁명군의 정강정책이 오늘날 중국이 시도하고 하는 동북공정, 즉 한반도는 중국역사의 일부라는 논리의 출발점이었다. 그들의 정강정책 어디에도 조선독립운동이라는 말은 없다. 우선 제 1항에 동북에서 만주국의 통치를 전복한다는 것이요, 9항은 中 , 韓 , 蒙의 피압박민족은 밀접히 연합하여 공동의 적인 만주정부를 타도한다는 것일 뿐, 정강정책 그 어디에도 중국과 조선의 독립을 위해 연대하던가 한다는 내용이 단 한마디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동영상에서 달리라 라마의 소년 시절 중국 공산당 군대가 티베트를 침략하는 장면이 나온다. 자, 박한용의 어처구니없는 논리는 중국 인민군이 티베트를 침략하였으며, 훗날 한국전쟁 때 한반도를 침략한 것이 조선독립운동이라는 것이다. 무엇이 그들이 몽고와 만주와 티베트를 침략하는 수법이던가? 먼저 항일연군을 조직하였다. 즉, 연군이란 미명 하에 침략 대상국에 좌익세력을 키워놓았다.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이 있는 나라는 중국 땅이라는 논리로 주변국들을 차례차례 침략하였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티베트인들이 독립의 희망을 가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보고 있지 아니한가? 조선인들을 동족으로 여기며 만주에서 정착할 수 있던 만주족을 배신하고, 그들이 가까스로 되찾은 주권을 중국 공산당이 강탈하도록 팔로군 용병이 된 어리석은 행동이 조선독립운동이었는가?


1939년에 존재하지도 않았었던 만주일보에 박정희 혈서 기사가 실렸다고 지난 오년간 요란하게 나팔 불었던 민족문제연구소는 뭔가 사기를 쳤거나, "신문"을 "일보"로 읽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배우는데만 무려 5년 이상 걸린 저능아 집단들이다. 외화 낭비하며 책까지 위조하는 국제 사기단이나 이런 저능아 집단이 공개한 신문 기사는 당체 신빙성이 없다. 그들은 박정희가 일본 천황에게 혈서를 보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어떻게 그 편지가 일본 천황이 있는 동경과 정반대 방향인 만주국 신경으로 배달되었다는 말인가? 그간 수신자가 일본 천황이었다고 주장하더니 만주국 치안부 군정사 징모과였다고 말을 바꾼 것인데, 당시 만주국에 그런 부서가 없었다. 그리고 박정희를 친일인명사전에 등재한 이유로서 박한용이 말하는 궁색한 논리는 혈서와 함께 보낸 편지에 "조조국"이란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1939년 3월이었다는 것이다.


그때 박정희의 조국은 일본이었음을 증언하는 일본인이 있으니 바로 대구사범학교 시절 교련선생이었던 아리카와 대좌였다. 박정희가 모든 과목에서 최우수 성적을 얻으면서도 늘 전체 성적이 바닥을 헤메고 있는 이유가 궁금했던 아리카와 당시 중좌는 박정희가 윤리 등 황국신민 과목에는 백지 답안을 제출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맺어졌으며 오래 지속된 사제지간의 일화는 아주 유명하다. 일본군복을 입고 황국신민을 주제로 연설을 하고 연극을 하던 김대중과 달리 박정희는 백지 답안을 내었다. 가난한 박정희가 계속 백지 답안 제출을 하는 것은 장래가 막히는 일이었다. 그만큼 박정희에게는 오직 하나의 조국, 조선이 있었으며, 아리카와 대좌가 그 신념을 위한 후원자가 되었던 것이다. 본래 만주국 군관학교는 반도의 조선인들이 진학할 수 없는 학교였다. 그 학교가 외국인학교도 아니었는데 혈서 쓴다고 입학이 될 수 있는가? 천만의 말이다. 박정희는 당시 관동군 대좌로 진급해 있었던 아리카와의 추천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리카와 대좌는 남양군도로 떠나면서 미리 이런 유언 편지를 박정희에게 보냈다. "이 전쟁은 무의미하며 일본을 패배할 것이다. 나는 죽으러 가나 자네는 자네 조국을 위해 살게." 박정희를 만주군관학교에 추천한 관동군 대좌가 박정희의 조국은 조선이라고 말했다.


훗날 대한민국 대통령이 될 박정희는 황국신민이 되기를 거부하였기에 시골 문경학교 교사가 되었으며, 거기서도 황국신민이 되기를 거부하였기에 1940년 면직이 되고 아리카와 대좌의 도움으로 만주군관학교에 진학하였다. 그런데, 문경의 그의 옛 제자들이 한결같이 1939년 박정희의 조국은 조선이었음을 증언한다.



<<주영배(周永培)의 말: 


"1939년, 내가 보통학교 5학년일 때 조선어 과목을 가르치며 박 선생님께서는 "이 글을 잘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영태(李永泰)의 말: 

조선어 시간에는 우리 나라의 태극기와 역사를 가르쳐 주셨다. 음악시간에는<황성옛터><심청의 노래> 등을 가르쳐 주시고 기타도 쳐주셨다. 지금 생각하면 조국이 없는 서러움 때문인지일본인 교사들과는 자주 싸우는 광경을 보았다. 하루는 수석교사였던 일본인 야나자와(柳澤)와 말다툼 끝에 그가<조선놈>이라고 하자 의자를 집어던진 일도 있었다.


그 당시 일본인 순사 중에 오가와(小川)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와 자주 논쟁을 벌였다. 박 선생님이 만주군관학교에서 군도를 차고 문경에 왔을 때 오가와(小川)가 무어라 했다가 혼이 난 적도 있다.

전도인(錢道寅)의 말: 

하루는 박 선생님이 교무실에서 혼자 사무를 보고 있으면서 나를 불렀다. 그 때 일본인 청부업자 한 명이 담배를 문 채 교무실 안으로 들어와 박 선생님에게 "오이! 교장 계신가?"하고 물었다.


선생님은 일본인을 한 번 힐끗 쳐다보고 아무 대꾸가 없었다. 그 사람이 재차 똑같이 묻자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일본인들이 부르짖는 내선일체(內鮮一體)가 진실이라면 당신이 내게 그러한 언동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일등 국민으로자처하고 싶거든 우선 교양 있는 국민이 돼야지, 담배를 물고 교무실에 들어온 것만 해도 무례하기 그지없는데 언동까지 몰상식한인간이라면 나는 너같은 사람을 상대할 수가 없다. 어서 나가봐!" 하고 말한 적이 있다.

황실광의 말: 

박 선생님이 우리 학교에 오셨을 때 나는 6학년 반장을 했다.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조선어를 가르쳤다. 역사, 시조도 가르치고 학생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하여 위인전을 많이 읽도록 하셨다.


박 선생님이 일제치하에서 우리글을 가르치기 위해 애쓰신 것은 분명하다. 학생 한 사람을 복도에 세워놓고 일본인 교장이나 교사가 오지 않나 망을 보게 했다.

그 때 한 남학생이 천황의 사진에다 장난을 하고 교무실에 불려가 혼이 난 일이 있다. 천황의 눈을 연필로 까맣게 지우는따위의 행동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데 우리들에게 그런 생각을 갖도록 한 것은 박 선생님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박 선생님이 만주로 떠난 지 3∼4년이 지난 어느 여름방학 때 긴 칼 차고 문경에 오셔서 십자거리(문경보통학교 아래에 있는 네거리)에 계신다는 얘기를 듣고 달려갔지요. (중략) 하숙집으로 자리를 옮긴 뒤 박 선생님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문턱에 그 긴 칼을 꽂고는 무릎을 꿇고 앉아 ‘군수, 서장, 교장을 불러오라’고 하시더군요. 그때 세 사람 모두 박 선생님 앞에 와서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아마 교사 시절 박 선생님을 괴롭혔던 걸 사과하는 것 같았습니다.”(여제자 이순희씨 증언?정운현의 ‘실록 군인 박정희’ 78쪽)

이순희씨에 따르면 일어 상용(常用)으로 학교에서 조선말을 사용할 수 없게 되자 박정희는 수업시간에 몰래 조선어를 가르쳐주기도 했다. 한번은 둥근 원을 그려 그 속에 가로로 물결무늬를 그려 넣고는 “보기만 해! 이게 조선 국기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곤 그림을 찢어버렸는데 한 학생이 다른 반에 가서 자랑한 것이 일본인 교사 귀에 들어가 ‘불온교사’로 찍혔다는 것이다. (제자 이순희 증언?정운현의 ''실록 군인 박정희'' 60쪽)

박정희에게 배운 이영태는 이낙선(5?6군사쿠데타 직후 박정희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 비서관)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은사에 대한 기억을 이렇게 적었다. ‘조선어 시간에는 우리 나라의 태극기를 가르쳐주셨고 복도에 입초를 세우시고 우리 나라 역사를 가르쳐주셨으며 일본인 교사들과는 지금 생각하면 조국 없는 서러움 때문인지 자주 싸우시는 것을 목격했다’(조갑제의 ‘박정희’ 79쪽).>>

자, 우리는 여태껏 거짓말만 해온 저능아 집단이 공개한 신문기사에 신빙성이 있는 것인지 의문이 있다. 보라. 분명한 사실은 만주어와 중국어가 공용어였던 만주국의 그 어느 신문에도 그 혈서 기사가 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어느 일본 신문에도 그 혈서 기사가 실리지 않았다. 만주신문은 만철 직원들을 위한 기관지였다. 그러면 만철 직원들의 국적은 어디였는가? 민족문제연구소 논리대로라면 만철 직원들은 일본의 침략자들이었다. 따라서, 민족문제연구소는 만철 직원들을 만주국 국민의 범주에 넣지 않는다. 그러면, 그들이 일본 국민이었는가? 아니다. 1938년 관동주 자유항을 만주국에 반환함과 동시에 일본은 그때까지 일본 국적을 포기하지 않은 모든 만철 직원들의 일본 국적을 취소시켜 버렸다. 

사실, 만약 100분 토론 중 주익종씨가 박한용에게 만주신문 창간호가 존재하며, 창간날자가 있느냐고 물어보았더라면 예리한 질문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주신문은 창간된 적이 없다. 1938년 관동주 자유항이 만주국으로 반환되고 만철 직원들 일본 국적이 취소되자 그들의 국적은 만주국임을 분명히하기 위해 그 해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러면, 만주신문 발행인과 기자들은 누구였던가? 그들은 6년 후인 1945년 8월 러시아군이 만주로 쳐들어왔을 때 시베리아로 끌려갈 자들이었다. 조선 주둔 일본군은 일본인부터 송환시킨 후 철군하였다. 패전국 군대의 마지막 임무는 자국인 보호였다. 그런데 관동군은 전혀 만주 거주 일본인을 보호하거나 일본으로 수송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일본군은 남양군도에서 철수할 때 조선인 학도병들은 정규군이 아니었는데도 무사히 귀국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으며, 사망자 유해를 가족에게 인도할 수 없었을 때는 일본 국립묘지에 안장하였다. 무엇이 그 논리였던가. 비록 조선인 학도병이라 하더라도 일본군 군번을 받았을 때는 끝까지 책임진다는 논리였다. 그런데 만주국 거주 일본인들은 자국 백성이 아니라며 전혀 거들떠 보지 않았다. 훗날 수십 만영의 일본인들이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죽어가고 있을 때도 그들은 일본 국민이 아니라는 이유로 외면하였다. 단 한 명의 일본인이 북한으로 납치되어가도 일본 열도가 떠들썩하며 정부가 송환을 위해 온갖 노력을 하고 있는 것과 너무도 대조적이 아닌가? 70 만명의 일본인이었으면 오늘날 한국의 광주시나 대구시 전체 숫자와 맞먹는 큰 인구였음도 일본 정부는 철저하게 외면하였다.

  1. 관동주 자유항을 만주국에 반환한 이후로 일본은 재만 교포의 이중국적을 허용하지 않았던 것처럼 화란도 재미 교포의 이중 국적을 허용하지 않는다. 누구든 미국 국적을 취득하면 화란 국적이 그 날로 소멸된다. 그리고 자기를 버린 화란에 분노한 화란인들은 화란을 더 이상 조국으로 여기지 않는다. 이처럼 만주신문 발행인의 조국도 일본일 수 없었다. 그 신문은 일본어로 발행되었으되 그들은 만주국에 납세의 의무를 지던 만주국 국민이었다. 미주 한인 커뮤니티의 장래는 미국의 발전에 달려있다. 미국 경제가 감기만 걸려도 한인 교포사회의 경제가 휘청거린다. 이처럼 만주신문 발행인의 훗날의 생사도 만주국 군대가 강한 군대가 될 수 있느냐에 달려있었다. 


위 영상물에서 우리는 중공군이 티베트를 침략하던 모습을 보여주었다. 외국군대의 지원이 없이 홀로 싸우던 티베트인들이 모습이 얼마나 처량한가! 그것이 만약 중공군의 개입 때 미군이 철수하였더라면 우리의 모습이 될뻔하였다. 중국 공산당 군대가 저렇게 쳐들어왔을 때 만주인들은 처음 의병을 일으켜 저항하다가 만주국군을 창군하였고, 바로 그 창군 직후 군관학교를 세웠던 것이며, 군관학교 설립직후 박정희가 지원하였던 것이다. 위의 백분 토론에서 미련한 박한용의 논리는 박정희가 1939년에 지원했으니 친일파라는 것인데, 그러면 아직 학교가 설립되기도 전에 지원하라는 말인가? 저 위의 영상물에서 보듯이 중공군이 쳐들어올 때 막지못한 주변국 민족들은 소멸된다. 만주족도 중공군과 러시아군의 침략으로 소멸되기 전에 할 수 있는데까지 그들의 조국을 지키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것은 이제는 만주국 국민이 된 일본족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중공군과 러시아군의 침공에 여러 해 버티지 못해 나중에 모두 죽더라도 아직 만주국을 지킬 노력을 할 수 있었을 때 지켜야 했던 것이다.

본래 관동주 자유항 수비대였던 관동군도 1838년 관동주 자유항이 만주국으로 반납될 무렵 그 지휘권이 관동주에서 일본 육본으로 넘어갔다. 그후의 관동군은 관동주의 일계 만주국 국민들에게는 사실상 외국군이었다. 몇년 후 그들이 모두 시베리라 수용소로 끌려가도 일본이 방치하였던 이유는 일본 정부의 입장에서는 만계든 일계든 만주국 국적을 가진 국민들의 문제는 만주국 문제이지 일본 정부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만철계 신문, 즉 일어판 신문이었던 만주신문 발행인 입장에서 자국군은 관동군이 아니라 만주국군이었던 것이다.

박정희의 입학지원서 수신자가 일본 천황이었기는커녕 당시 존재하지도 않았던 만주국 치안부 군정사 징모과였는데, 만약 그런 유령부서가 있었다 해도 언론에 공개할 것이라면 왜 만주국 신문도 일본 신문도 아닌 만철 기관지에만 공개하였을리 있겠는가? 혈서 사진이 있어야 박정희의 필체인지 객관적으로 확인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두 개 이상의 신문사에서 그 기사를 실었을 때 그 객관성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단어 하나로 의미가 크게 달라지는데 편집자나 인쇄공의 실수로 글이 달라지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설사, 박정희가 편지를 썼으며, 그 편지에 조국이란 단어가 있더라도 그 "조국"은 조선을 의미하였음이 일본군 대좌 아리카와의 서신과 문경 제자들의 증언과 일계 만주국 국민으로서의 만주신문 편집자의 시각에서 아주 분명하다. http://bookstore21.net/korean/815/faked-article.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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