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함으로 입증된 라합의 믿음-믿음과 행함은 본질적으로 하나입니다
09/05/2019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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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합의 믿음이 특이한 것은 하나님을 구원의 하나님으로 믿었다는 점입니다. 라합의 고백에 따르면 그때 여리고 백성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정신을 잃었습니다. 여호와께서 함께하심으로 시혼과 옥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멸 당한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그들은 멸망을 예상하고 두려움에 떨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라합은 여호와를 죽음의 신, 멸절의 신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생명의 신, 구원의 신으로 생각했습니다. 여호와를 믿었기 때문에 죽음의 그림자가 시시각각 다가오는 때에 오히려 여호와의 구원의 빛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만일 라합이 여호와를 이스라엘에 국한된 신으로만 보았다면 여호수아가 기록하고 있는 대로 구원의 길을 모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호수아 212절에서 13절 말씀에, “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도록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고 내게 증표를 내라 그리고 나의 부모와 나의 남녀 형제와 그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살려 주어 우리 목숨을 죽음에서 건져내라.




행함으로 입증된 라합의 믿음

 

야고보서 2 : 25

 

2: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들어가는 말


라합의 역사적 기록은, 여호수아 21절에서 21, 617, 22절에서 23, 25절 말씀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C 중간 시대에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이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들에게까지 관심을 끈 것은 인간이 구원받는 데 있어서 행위를 철저히 배제시키고 믿음을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 서신은 이런 사도 바울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듯한 인상을 우리에게 줍니다. 즉 믿음은 행함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 사도 야고보의 주장입니다. 그 단적인 예로서 아브라함의 경우를 든 사도 야고보는 본문 말씀에서는 가나안 여인 라합의 경우를 듭니다. 과연 라합의 믿음은 어떠했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라합의 처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본문 말씀이 밝혀 주듯이 라합은 창녀였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서가 밝혀 주듯이 가나안 여인이었습니다. 여호수아 21절 말씀에,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꾼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창녀를 아주 경멸하였습니다. 그들은 창녀를 전혀 가치 없는 존재로 여겼으며 돌로 쳐 죽여도 좋을 만큼 하나님께서도 창녀를 저주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방인들은 아브라함의 순수 혈통을 타고나지 않은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에서 제외되었다고 생각하고 몹시 경멸하였습니다. 유대인들과 주변 국가들 사이의 갈등은 이와 같이 잘못된 유대인들의 선민의식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에서 사도 야고보가 행함으로 믿음을 인정받은 대표적인 사람으로 들고 있는 라합은 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갖춘 여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사고에 의하면 라합은 신의 저주를 뒤집어쓰고 태어난 여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믿음의 본보기가 되었다는 것은 구원 받는 것이 혈통이나 가문, 사회적 지위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구원은 진실한 믿음을 가질 때 그의 처지와 상관없이 얻어지는 것입니다. 사회적인 지위에 의해 근본적으로 구원에서 제외되는 자는 없습니다.

 

라합의 믿음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라합의 믿음은 여호수아 28절에서 11절 말씀에 매우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여호수아 28절에서 11절 말씀에, “또 그들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수아의 증언에 따르면 라합은 이방 여인이면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여호와는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며, 따라서 가나안 백성을 자기 백성에게 주실 수도 있는 분으로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과 역사와 섭리를 믿었던 것입니다.

 

라합의 믿음이 특이한 것은 하나님을 구원의 하나님으로 믿었다는 점입니다. 라합의 고백에 따르면 그때 여리고 백성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정신을 잃었습니다. 여호와께서 함께하심으로 시혼과 옥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멸 당한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그들은 멸망을 예상하고 두려움에 떨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라합은 여호와를 죽음의 신, 멸절의 신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생명의 신, 구원의 신으로 생각했습니다. 여호와를 믿었기 때문에 죽음의 그림자가 시시각각 다가오는 때에 오히려 여호와의 구원의 빛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만일 라합이 여호와를 이스라엘에 국한된 신으로만 보았다면 여호수아가 기록하고 있는 대로 구원의 길을 모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호수아 212절에서 13절 말씀에, “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도록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고 내게 증표를 내라 그리고 나의 부모와 나의 남녀 형제와 그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살려 주어 우리 목숨을 죽음에서 건져내라.


행함으로 입증된 라합의 믿음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더욱 라합의 믿음을 확증시켜 주는 사실은 그가 두 사람의 정탐꾼을 영접하고 무사히 귀환하게 했다는 점입니다. 두 정탐꾼이 라합의 집에 숨어들었다는 사실을 여리고 왕까지 이미 알고 있는 상황에서 라합은 끝까지 두 정탐꾼을 숨겨 주고 지혜를 내어 무사히 귀환하게 했습니다. 여호수아 23절에서 6절 말씀에, “여리고 왕이 라합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네게로 와서 네 집에 들어간 그 사람들을 끌어내라 그들은 이 온 땅을 정탐하러 왔느니라 그 여인이 그 두 사람을 이미 숨긴지라 이르되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내가 알지 못하나 급히 따라가라 그리하면 그들을 따라잡으리라 하였으나 그가 이미 그들을 이끌고 지붕에 올라가서 그 지붕에 벌여 놓은 삼대에 숨겼더라”. 여호수아 215절에서 16절 말씀에, 라합이 그들을 창문에서 줄로 달아 내리니 그의 집이 성벽 위에 있으므로 그가 성벽 위에 거주하였음이라 라합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렵건대 뒤쫓는 사람들이 너희와 마주칠까 하노니 너희는 산으로 가서 거기서 사흘 동안 숨어 있다가 뒤쫓는 자들이 돌아간 후에 너희의 길을 갈지니라”.

 

만일 라합이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역사하심을 믿지 않았다면 여인으로서 그처럼 용기 있는 행동을 취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진실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도와주심을 믿었기에 이런 생명을 내건 대 모험을 주저 없이 결행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믿음을 행함으로 입증 받아야 될 시기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외아들의 생명을 내놓는 것으로 참 믿음을 입증 받았고, 창세기 221절 말씀에,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창세기 2216절 말씀에,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욥은 전 재산과 가족과 건강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려도 여호와를 원망하지 않음으로써 참 믿음을 입증 받았습니다. 욥기 122절 말씀에,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참 믿음은 어떤 양상으로든지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라합은 여리고의 군사들에게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줄 알면서도, 거짓말로 지신의 국가에 대하여 반역죄를 짓는 일을 하였습니다. 라합은 자신의 목숨까지도 포기하면서, 정탐꾼을 끝까지 보호 해 주었습니다. 왜 라합이 자신의 목숨까지도 위태로운 것을 감수하면서 위험한 일을 했습니까?

 

성경은 라합의 믿음에 대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도 아니요,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그 분의 약속에 대하여 전혀 알지도 못하는 라합이 어떻게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을 수 있었습니까? 라합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서의 여호와와 관련된 이런 일들에 대하여, 듣지 못하였거나, 아니면 들었더라도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믿지 않았더라면, 정탐꾼들에게 자신의 목숨을 거는 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라합은 분명히 들었고, 믿었기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정탐꾼들에게 걸고, 행동으로 옮겼다는 것입니다.


라합은 여호와의 존재를 분명히 믿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라합을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히브리서 기자가 라합을 믿음의 조상의 반열에 올려놓은 그 이유는, 라합이 하나님의 존재를 믿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라합은 홍해를 건너게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소식을 듣고, 상천하지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고 믿었습니다. 라합은 여호와의 능력을 믿고, 두려워하였습니다. 라합은 하나님의 존재만을 믿은 것이 아니라, 살아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능력의 하나님이시어서, 가나안 땅을 능히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권능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음으로서, 믿음의 여인으로 불리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라합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넘어서서, 그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친히 이 세상의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천지의 주재자시라는 것을 믿었으며, 이 믿음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알았습니다. 라합은 여호와의 구원을 믿었습니다. 라합은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만을 믿은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시고, 전능하신 그 분이, 자신을 의지하는 자를 구원해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만일 라합이 하나님의 구원을 믿지 않았다면, 라합이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믿었다 하더라도, 자신의 목숨을 내 놓으면서까지 하나님 편에 서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라합은 하나님의 구원을 믿음으로서, 담대히 하나님 편에 있는 행동을 하였으며, 그로 인해 구원의 은혜를 받은 동시에, 믿음의 조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라합은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과, 구원을 믿음으로서, 그 사실들을 믿는 사람답게 믿음에 합당한 행동을 하였습니다. 라합의 행동은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위험에 처하기까지, 하나님의 백성의 편에 선 것입니다.


당시 여리고 사람으로서 침략국이며 적군인 이스라엘 백성을 돕는다는 것은 반역의 행위였고, 따라서 여리고의 지도자들은, 그러한 반역의 행위를 용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라합은 위험을 무릅쓰고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숨겨 주고, 도피시키는 행동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행동으로 옮겼기 때문에 믿음의 반열에 선 것입니다.

 

라합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영광스러운 모습을, 우리가 지금 생생하게 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는 영원합니다. 그 은혜와, 자비는, 우리 가운데 신분의 차이가 없고, 빈부의 차이가 없고, 민족의 차이가 없고, 인종의 차이가 없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어떤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따르기만 하면, 모두 구원시키신다는 사실을, 라합의 구원을 통하여 분명히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는 일에는, 우리의 신분과 민족과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라합을 통하여 분명히 우리에게 제시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신실하고 행함으로 실천하는 성도들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원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거하면서 살아가기를 바라며 살아갑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의 교두보를 마련하는 일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라합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라합은 이방 민족 출신의 기생이라는 결점투성이었으나, 가나안 땅에서 처음으로 구원받은 영광을 얻은 여인이었습니다.

 

라합이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영접하여 생명을 걸고 숨겨 줌으로써, 여리고 성의 멸망 중에 구원을 받은 것은, 믿음을 행함으로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라합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며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듣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라고 고백할 정도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대한 신앙이 있었습니다. 라합은 여리고 성이 이스라엘을 도우시는 하나님에 의해 반드시 심판 받아 멸망 할 것임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망설임 없이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의 생명을 구하고, 그들에게 구원을 청하였던 것입니다.

 

그 당시 여리고 성에 사는 사람들 모두가 라합과 마찬가지로, 여호와 하나님이 행하신 기사를 듣고, 마음이 녹고 정신을 잃을 정도로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라합 만이 믿음의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구원받는 믿음은, 구체적인 모습으로 행동에 옮겨야합니다.

 

사도 야고보는 라합이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는 라합의 믿음이, 실천되어졌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라합은 여인이었지만, 누구보다도 결단력이 있었습니다. 라합은 목숨을 걸고 자신과, 가족을 구원하기 위해 모험을 감행했습니다. 이와 같은 신앙의 결단의 결과는, 자신과, 그 가정에 구원의 복이 임했습니다.

 

우리도 때로는 하나님과 물질, 하나님과 명예, 하나님과 학문, 하나님과 그 어떤 것, 즉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라도,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선택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대신에 다른 것을 선택하게 되면, 내가 선택한 그것과 함께 결국에는 멸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어떤 피조물로도 대치 될 수 없는 분으로서, 우리가 절대적으로 경배하고, 섬기고, 복종해야 할 분이십니다. 라합은 절대 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을 선택함으로써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영원히 기록되는, 믿음의 여인으로 쓰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이와 같이 큰 결단이 요구됩니다. 때로는 신앙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믿음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고, 순교의 제물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결단은 확실한 천국의 소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인간의 어떤 행위에 따르는 보상과 처벌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베푸신 통치 원리입니다. 따라서 참된 믿음에도 반드시 보상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여호수아 625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으므로 그가 오늘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주하였으니 이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정탐하려고 보낸 사자들을 숨겼음이었더라”. 라합은 믿음의 보상으로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하는 복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라합이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에 실제적인 도움을 준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물론 전 가족까지 포함해서 구원을 받았고, 이스라엘 중에 함께 거하는 복도 누린 것입니다. 믿음은 분명 행함으로 나타나게 마련이지만, 그리고 그 믿음으로 인해 구원도 받고 상급도 받지만 구원이나 상급이 결코 행함의 대가는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여기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구원이나 상급은 결코 우리의 행위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믿음과 관계를 가집니다. 즉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은 진실한 믿음에 따른 하나님 은혜의 결과인 것입니다.

 

라합과 그의 가족은, 여리고 성이 멸망하던 날, 완전히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을 받은 것뿐만 아니라, 라합은 이스라엘 사람 살몬의 아내가 되었고, 그가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다윗의 혈통의 가문을 이어 갈, “보아스였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15절에서 6절 말씀에,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라합이 메시아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순수한 혈통이 아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가문에 합류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이방 민족이면서 기생인 라합이 믿음의 가문에 합류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분명히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라합의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삶을 용인하신 것이 아니라, 라합이 지닌 믿음의 선택을 기뻐 받으신 것입니다. 라합은 믿음을 행함으로 그 내면의 믿음을 고백한 참으로 살아있는 신앙인이요, 현명하고, 용기 있는 신앙인이었습니다. 라합은 자신의 믿음을 행함으로 실천함으로 인하여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구원 할 수 있었고, 온 인류의 구원자 메시야의 직계 조상이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히브리서 1131절 말씀에,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라합의 믿음의 행함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기록되는, 한 위대한 믿음의 사건이었습니다. 라합과 그 가족은, 여리고가 멸망 할 때에 구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후에 다윗의 족보에 오르는 영광을 얻게 되었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귀하게 쓰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라합이 이스라엘의 승리를 확신하여, 믿음으로 정탐꾼을 숨기고, 보호했던 것처럼, 성도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신 가운데 어떤 상황 가운에서도 믿음으로, 진리를 따르는 신앙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이 말씀대로 라합과 같은 믿음을 소유하시고 행함으로 실천하셔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무리

 

야고보서 2장 마지막 26절 말씀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영혼이 없는 몸은 죽은 몸입니다. 썩어서 필경은 내버려지게 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도 그와 같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원문에는 이 말씀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사실의 이유를 말합니다. 그 이유는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영 혹은 영혼이 없는 몸은 죽은 것입니다. 사람은 영육이 합해 있어야 산 존재가 되는 것이며 영이 떠나면 죽은 몸이 됩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영혼이 없는 몸과 같이 죽은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이 말씀은 17절 말씀과 20(전통 사본) 말씀에 이어 세 번째로 사용한 표현입니다.

 

사도 야고보가 21절과 24절과 25절 말씀에서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라고 표현한 것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명확히 강조한 바울 사도의 교훈과 충돌하거나 모순됩니까? 우리는 그럴 수 없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므로 상호간에 모순이나 충돌이 있을 수 없다고 믿습니다.

 

우선 사도 바울의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복음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밝히 증거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 복음 진리를 어둡게 하였던 천주교회의 배교적 상황 속에서 루터와 칼빈 등 종교개혁자들이 다시 한 번 더 깨닫고 확신했던 진리이기 때문에, 개신교회의 신앙을 바르게 받은 자라면 누구도 그 진리를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과 사도 야고보의 표면적 차이점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율법을 행함으로 얻는 의()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 의()를 구별하면서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강조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과 행함이 있는 산 믿음을 구별하면서 사람이 믿음으로만 아니고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사도 야고보의 표현 자체는 사도 바울의 복음 진리와 충돌하는 듯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으나, 그의 의도는 분명히 이해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강조했을 때 결코 죽은 믿음을 의미한 것이 아니고 산 믿음을 의미하였습니다. 로마서 615절 말씀에,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56절 말씀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 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살아있는 믿음이라면 반드시 행함이 나타날 것이고, 그 행함이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단정합니다.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신앙, 단순하고 감정적인 신앙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라고 하는 열매를 맺을 때에 비로소 그 믿음은 살아 있는 믿음이다, 행함과 믿음이 함께 하고 믿음이 행함과 함께할 때에, 나아가 행함으로 인하여 믿음이 더욱 온전하게 되느니라. 믿음과 행함이 함께 하는 온전한 믿음을 갈파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도 야고보의 목소리입니다.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이유는,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이라는 것도 17절 말씀과 20절 말씀(전통사본)에 이어 세 번째로 사용한 표현입니다.


본 서신의 저자 사도 야고보가 2장 21절 말씀과 24절 말씀과 25절 말씀에서 세 번이나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표현한 것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사람이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교훈한 것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을 구별하면서사람이 율법을 행함으로가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강조한 것이었습니다그러나 사도 야고보는 선한 행위가 없는 죽은 믿음과 선한 행위가 있는 산 믿음을 대조시키면서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은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만으로가 아니고 행함이 있는 산 믿음으로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야고보서 2장 14절부터 26절 말씀의 주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이 내용은 17절 말씀과 20절 말씀과 26절 말씀에 세 번이나 반복되어 있습니다행함이 강조된 말씀이 주는 실제적 교훈은 우리의 믿음은 죽은 믿음이 되지 말고 산 믿음이 되어 행함으로 증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 중 “1차 계수된 자로서 광야 40년 여정을 통과하고 가나안 땅에 무사히 들어간 사람은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 밖에 없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나머지 이스라엘 백성의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믿는다고는 했지만 행함이 없었습니다. 동시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불완전한 믿음으로, 그들의 믿음 자체가 불완전했음을 보여 줍니다.

 

대표적으로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 또한 광야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고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가나안 땅을 바라만 보고 입성하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불완전한 믿음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예는 12명의 가나안 정탐꾼들의 보고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10명의 정탐꾼들은 가나안 사람들의 체격과 광대함에 기가 질렸습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메뚜기로 비하하는 보고를 했고, 그 보고를 들은 백성은 같이 흥분해서 모세를 원망하며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기사와 이적과 은혜를 베풀어 주셔도 믿지 못하고 순간순간 원망과 불평으로 하나님께 대적했던 사람들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불순종과 원망의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다 결국 가나안 땅에 입성하지 못하고 다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출발한 신앙이 행함이 없으면 결국 사망뿐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행함으로 순종하였습니다. 믿음과 행함이 일치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능력이 여호수아에게 옮겨져서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가나안 입성과 정복의 주인공은 모세가 아니라 여호수아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말하는 것, 보는 것을 다 아십니다. 출애굽기 411절 말씀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잠언 2012절 말씀에, “듣는 귀와 보는 눈은 다 여호와께서 지으신 것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무심코 심중에 있는 것을 말할 때, 불신의 눈으로 보는 모든 것들을 다 듣고 보시며 선악간에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나무는 열매로 그 진가를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은 그 행위로 판단되는 것입니다. 진정 믿음이 있다면 행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행함을 통해 나에게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가 판단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길을 사로잡는 확실한 믿음을 소유합시다

 

믿음은 여러 가지가 아니라 오직 하나입니다.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입니다. 에베소서 43절에서 6절 말씀에,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성경대로 믿기만 하면 이러한 확실한 믿음을 예수님 앞에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 가운데 이처럼 뜨거운 믿음, 확실한 믿음만 갖고 있으면 예수님의 눈길을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의 눈으로, 긍휼의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면 모든 문제가 해결함 받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521절에서 28절 말씀에 나타난 가나안 여인의 믿음이 바로 이런 믿음이었습니다. 귀신 들린 자기의 딸을 고쳐 달라는 간청을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매정하게 거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물러서지 않고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하며 끝까지 주님을 믿는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앞에 매달리는 행함, 끝까지 그 발아래 엎드리는 행함을 보여 주었습니다. 가나안 여인의 확실한 믿음에 반한 것은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분의 눈길이 그녀로부터 떠나지 못하여서,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실천하기만 하면 예수님의 눈길을 사로잡게 됩니다. 예수님의 눈길이 우리의 삶의 현장에 임하기만 하면, 그것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라도 즉시 해결 받게 됩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이런 믿음을 보여 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앞에 홀로 선 주님을 버려두고 뿔뿔이 다 흩어졌습니다. 그 중에서도 도마는 8일이나 지각생이었습니다. 도마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하면 믿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양손 양발에 못 자국 난 주님을 보고 고꾸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도마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2027절 말씀에,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눈길을 사로잡는 비결입니다. 도마처럼 자신의 지식과 잔꾀로 믿는 사람들은 절대로 행함의 능력이 나오지 못합니다. 잠언 131절에서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자기 꾀에 배부르리라고 말씀 한 것처럼 것이 다 잔꾀이고 자기 지식입니다. 이런 차원의 신앙에서 졸업하여, 믿음과 행함이 일치하는 차원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믿음과 행함이 일치하지 못할 때 분파가 생기고 교회가 갈라지게 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를 볼 때 처음에는 믿지 못하므로 파당이 생겼지만, 사도 바울이 가서 눈물로 가르치고 목회한 결과로 동서남북 사방에 소문이 퍼질 정도로 훌륭한 교회로 변신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7절에서 8절 말씀에, “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본문 26절 말씀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죽음은 분리입니다. 영혼 없는 몸은 죽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행함 없는 믿음도 역시 죽은 믿음입니다. 스스로 믿음이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죽은 믿음이 무서운 것은, 본인은 믿음을 가졌다고 생각하고 영생을 간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멸망으로 가고 있는데도 모르는 것입니다.

 

또 행함이 없는 믿음은 나만 멸망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멸망시킵니다. 교회의 가장 큰 적은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다른 신을 믿는 사람들도 아니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믿는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삶을 통해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도 별것 아니네라고 판단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고귀하심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가로막는 것, 다른 사람을 멸망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성경은 자신의 믿음을 스스로 시험하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후서 135절 말씀에,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행함의 방향성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긴 기간을 두고 보면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의 행동의 동기를 잘 알지 못합니다. 이것은 오직 자기 자신만이 아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니까,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해서 행동하지 마십시오. “나에게 구원받는 믿음이 있는가?”, “그런 삶이 드러나는가?”, “점점 더 그리스도를 닮아가고자 하는가?”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주님께서는 누가복음 643절부터 45,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열매, 각 사람의 행함은 그가 마음에 담고 있는 믿음의 결과입니다. 로마서 1010절 말씀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입은 항상 마음을 따르게 됩니다. 구원은 단순히 말로 고백할 때가 아닌, 마음이 이를 믿고 그 결과로 입이 이런 믿음을 고백할 때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런 보물, 이런 나무, 이런 믿음이 마음에 존재하기 때문에,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따라서 선한 행함의 열매는 매우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 성도들 가운데 단지 말로만 믿는 신앙의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이런 신앙은 마음으로 믿지 않고,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하고 믿는 척 하는 성도의 신앙에 해당됩니다. “믿음이 있다고 말하나실제로 그렇지 않은 성도는 거듭난 사람이 아니고, 따라서 그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것은, 썩고 병든 믿음만을 가지고 있었던 아담의 죄성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나”, 각각의 좋은 열매가 없고 이런 상황이 계속 지속된다면, 그가 말하고 있는 신앙이 진정한 신앙인지를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누가복음 644절에서 말씀하신대로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합니다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듯이, 행함을 보면 그 믿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성도의 행함을 판단하시고 성도의 마음을 읽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신앙을 점검하십시오. 실천하는 신앙인가를 점검하십시오. 오늘의 시대는 말씀을 머리로만 듣고 실천하지 않고 살아가는 삶이 기본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책임을 전혀 느끼지 않습니다. 말씀을 실천하려고 노력한 사람은 압니다. 그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뼈저리게 느낍니다. 자신에게 말씀을 적용하고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한 사람들은 겸손하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나는 거짓 믿음인가? 진짜 믿음을 가졌는가? 스스로 판별하고 판단해야 합니다. 이것은 구원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내가 진심으로 믿는다면 반드시 행함으로 열매가 나타나야 합니다. 믿음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말로 대답해 줄 수 없습니다. 반드시 믿음을 행함으로 보여 주어야 합니다.

 

믿음이 좋다는 것은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지만 믿음을 행동으로, 사랑으로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믿음이 있는가?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을 증명해 보일 수 있어야합니다. 주변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던지는 질문이 당신들이 믿는다고 하는데 그 믿음이 도대체 무엇이냐?”입니다. 믿음의 실체를 보고 싶어 합니다. 오늘날 우리 신앙의 과제는 더 많이 아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 많이 알아서 문제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지식이 많은 똑똑한 신자가 아닙니다. 말씀을 삶 속에 열매로 실천하며 구현하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과 행함은 화폐의 양면과 같아서 절대 분리할 수 없습니다. 화폐 한쪽 면만으로는 화폐로 인정할 수 없는 것처럼,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그 열매인 행함이 없으면 성도로 인정받을 수 없고, 또 화폐의 양면이 분리되면 이 화폐는 가치가 100% 상실되는 것같이, 믿음과 행함이 분리되면 성도의 가치가 100% 상실됩니다.

 

사랑하는 애청자 그리고 성도 여러분, 교회를 다닌 지 5, 10, 아니 평생을 다녔어도 삶에 별로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닙니까? 만일 그렇다면 왜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결코 성경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예배를 안 드려서도 아닙니다.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성경공부를 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기도를 안 해서도 아니고, 큐티를 안 해서도 아닙니다. 그런 것을 다 해도 변화가 없을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들은 대로, 배운 대로, 깨달은 대로, 행하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혹시 삶에 아무 변화가 없으면서도 구원을 받았다고 확신하신다면, 이 시간 다시 한 번 심각하게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했다면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변화됩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변화됩니다. 행함이 있는 산 믿음을 가지고 승리합니다.

 

일단 작은 일부터 말씀을 믿음으로 실천해보시기 바랍니다. 피곤한데 주일예배에 나오면 더 피곤해질까봐 못 나오시는 분이나, 연휴를 즐기기 위해 주일예배에 빠지시는 분이 있으면 주일날 나와서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해 보십시오. 피곤하지 않습니다. 삶의 참 만족을 느끼게 됩니다. 주일날 일을 하지 않으면 돈을 못 벌 것 같아 두려워하는 분이 있으면, 모험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말씀대로 순종해보십시오. 됩니다. 학생들은, 시험 때나 페이퍼가 많을 때 주일을 지키면 시간을 빼앗기는 것 같아서 주일을 빼먹고 그런다면,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힘을 얻고 지혜를 얻습니다.

 

성경에서 하라는 대로 다 하다가는 손해를 보며 살 것 같아 못하는 분이 있으면, 한 번 해보십시오. 손해 안 봅니다. 채워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갑자기 영적 거장이 되기를 기대하시는 게 아닙니다. 매일 조금씩만 변화되어 가면 됩니다. 그 변화가 다른 사람 눈에 보이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이 보시면 됩니다. 하나님이 아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오셔서 현실의 교회를 바라보신다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혹시 우리들 자신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처럼 잎사귀만 무성한 것은 아닙니까? 소리만 요란하지 아무런 열매가 없는 믿음생활이 바로 우리들은 아닙니까? 다시 한 번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나 자신이 가진 믿음은 산 믿음입니까, 죽은 믿음입니까? 정말 믿는 대로 행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론적으로 좋은 말이라고 동의하는 정도입니까? 아니면 나는 죽는 믿음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십니까? 아니면 입으로만 외치는 믿음을 소유하고 살아가십니까? 작은 것부터 실천에 옮기면서, 매일매일 믿음으로 작은 모험을 해가면서, 그 믿음의 모험들이 쌓이고 또 쌓여서, 놀라운 믿음, 행함 있는 믿음, 살아 있는 믿음의 거장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 설교는 목사님들의 설교와 참고자료를 인용하여 작성한 설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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