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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가 혼자에게
05/07/2020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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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산문을 시처럼, 산문집을 사진첩처럼 만드는 사람이다. 이병률 시인의 산문집 ‘혼자가 혼자에게’는 바로 그런 책이다. 그는 글만큼이나 시 같은 사진도 잘 찍는다. 사진은 함께 실린 글과는 또 다른 이야기들을 전해 준다. 아침에 볼 때와 저녁에 볼 때, 어제 볼 때와 오늘 볼 때, 다른 감성으로 다가온다. 


몇 해 전 그의 여행 산문집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를 아끼며 읽었었다. 그의 글은 맛있는 비스킷 같기도 하고 귀한 차 같기도 하다. 그래서 한꺼번에 다 읽어 버리기에 너무 아깝다. 숨겨놓고 조금씩 혼자만 보고 싶다. 이번에도 열흘이 넘게 매일 조금씩 책장을 넘겼다.


신해철, 유희열, 김광석과 함께 방송 일을 하던 무렵, 그의 책상에는 이런 시가 붙어 있었다고 한다.  

“하루에 세 번 크게 숨을 쉴 것…

좋은 결심을 떠올려 볼 것…

해질 때까지

매일 한 번은 최후를 생각해 볼 것.” (이상희 시인의 ‘가벼운 금언’에서)


그가 한국어를 가르쳐 주었던 일본 여성 ‘히로코’는 그에게 아버지가 만든 나무 접시를 선물한다. 자신이 죽고 나면 장례식에 오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생전에 만들어 놓은 그릇이다. 좋은 생각이다 싶다. 결혼식에 가면 답례품을 주지 않던가. 장례식에 올 정도의 사람이라면 한때 나와는 연을 맺고 살았던 사람들 이리라. 그들에게 마지막 선물 하나 남기는 일은 멋지다고 생각된다. 나는 어떤 선물을 하는 것이 좋을지 고민해 보아야겠다. (나도 누군가에게 단단히 말할 수 있기를)


그는 죽을 때 ‘단 하나’의 단어를 떠올리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사람 하나 가슴에 새겨 넣고 떠나기를 바란다. “그게 당신이었으면 한다” 고 말한다. 과연 나는 누구를 가슴에 넣고 가게 될까. (언젠가 그때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남기는 것으로)


스스로를 라디오 키드라고 부른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혼자 있을 때는 라디오를 들었다. 방송국에 엽서를 보내고 그것이 당첨되어 상품을 받으러 방송국에 가기도 하고. 방송국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보며 커서 이런 곳에서 일을 해 보았으면 하는 꿈을 가져보기도 하고. 정말 그는 커서 한동안 방송작가 생활을 했다. (맨 뒤 창가 자리에서 라디오)


나도 어려서 라디어를 곁에 끼고 살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밤에 잠들 때까지 라디오를 들었다. 시간대에 맞추어 사이클을 돌려가며 방송을 찾아들었다. 별것도 아닌 사연을 적어 보냈는데 DJ 가 내 이름을 불러주었다. 그러나 노래는 내가 신청한 곡이 아니었다. 나는 그때 방송국에서는 한 사람의 신청곡을 틀어주며 여러 사람의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무렵 유행하던 대중가요는 거의 전부 연속극 주제가였다. ‘광복 30년’ 같은 대하드라마를 제외하고는 30일 주기로 새로운 연속극이 시작되었다. 30일을 반복해서 듣다 보면, 노래는 저절로 익히게 된다. 같은 시간대에 각기 다른 방송국에서 나오는 연속극은 하나는 밤에, 다른 하나는 다음날 아침 재방송으로 들었다. 귀가 어두운 할머니가 놓친 이야기를 편집해서 재방송하는 것은 나의 몫이었다.


이병률 시인은 유럽을 여행하다 마음에 담아 두었던 운하에 친구와 그 아내를 데리고 간다. 음식을 사들고 자리를 잡았는데, 곁에서 한 청년이 한없이 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냥 좋아 보여 친구에게 보라고 하니 그 친구는 “쟤는 왜 저렇게 혼자 저러고 있는 거야?” 한다. (왜 혼자냐고요, 괜찮아서요)


세상사를 늘 우리의 입장으로만 보는 편견을 보여주는 일화다. 나는 살면서 얼마나 많이 이런 투의 말을 무심코 던지며 살았던가.


그에게는 공부 잘하고 야심 찬 친구가 두 명 있었다. 어느 실내 수영장에서 그들은 미래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너네 둘은 나중에 꼭 결혼해. 나는 시를 쓸게.” 이 “코미디 같은 선언”을 시작으로 그들은 멀어졌다. 두 친구는 대학 재학 중에 약혼을 하고 결혼과 함께 외국으로 나갔다. 시인이 된 후 그들에게 “길고도 따듯한 편지”를 보냈지만 답장은 없었다고 한다. 훗날 그 친구들이 산다는 화려한 도시를 찾았을 때, 그는 애써 친구들을 찾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것들은 어쩔 수 없는 대로)


그렇다. ‘유유상종’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추구하는 것이 다른 이들이 계속 친구로 남기는 힘든 일이다.


그는 ‘눈’이라는 말과 ‘빛’이라는 말 두 개가 모인 ‘눈빛,’ ‘기차’와 ‘길’이 만난 ‘기찻길,’ ‘눈’과 ‘꽃’이 뭉쳐 만들어 낸 ‘눈꽃’이라는 말의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우리는 결핍 때문에 결국 슬프다)


같은 말이라도 누가 언제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그 말은 아름답게 들리기도 하고, 사납게 들리기도 하며, 즐거움을 주기도 하고, 슬픔을 남기기도 한다.


친구가 이혼을 하게 되어 어머니에게 말씀을 드리니, 어머니가 이렇게 말했다. “아, 이혼이라는 게 있었구나. 난 왜 그 생각을 지금까지 한 번도 하지 못한 거지?” 어머니도 뒤따라 아버지와 이혼을 하고, 두 명의 돌싱이 한 집에 살았다고 한다. (벚꽃이 핍니다, 벚꽃이 집니다)


“세상 모든 생명은 죽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 목숨을 부지할 것이다. 그러다가 죽을 때는 어떤 식으로든 소리를 남길 것이다. 그것이 찍소리든, 장기 밖으로 뿜어내는 뿡 하는 소리일지라도…” (바람이 통하는 생태에 나를 놓아두라)


그의 글에 대단한 것은 들어있지 않다. 누군가 한 번은 들어 보았거나, 생각해 보았거나, 스쳐 지났을 법한 것을 붙잡아 이야기한다. 아마도 시인이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르겠다.


가까운 곳에 두고 하늘은 어둡고 바람이 부는 날,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 아니면 바깥 날씨와는 상관없이 그냥 기분이 꿀꿀한 날, 다시 펼쳐보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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