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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인생사 새옹지마
04/13/2019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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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이 한미은행 밸리 지점장을 그만두고 다른 은행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나는 계속 그 은행을 이용하고 있었다. 브라이언이 UCLA에 입학하던 해의 일이다. 은행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녀의 딸도 UCLA로 진학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 은행에 가게 되면 서로 아이들의 안부를 묻고 지내게 되었다. 하루는 그녀가 내게 혹시 교회에 다니냐고 물으며 자기가 다니는 성당에 나와보라고 권유를 했다. 내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자 더 이상 강권하지는 않았다.


아내와 결혼을 하고 보니 그녀는 유아세례를 받고 어려서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따라 열심히 성당에 다니던 가톨릭 신자였는데 냉담 중이었다. 아내의 세례명은 돌아가신 어머니와 같은 ‘세레나’였다. 작은 오해로 주어진 이름이다. 유아세례를 주는 신부님이 어머니에게 (아기) 세례명이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어머니는 본인의 세례명을 묻는 것으로 오해하고 ‘세레나입니다’라고 해 버렸다는 것이다. 아내는 견진을 받으며 '요안나'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았다. 


아내가 미국에 온 지 3-4년쯤 되었을 무렵 11월쯤의 일이다. 아내가 무미건조한 미국 생활을 힘들어하는 것이 느껴졌다. 한국에서는 직장생활을 하며 친구들과 사교활동도 활발하던 사람인데 낯선 이국 땅에서 아는 이도 없어 내 얼굴만 보고 지내니 힘들었을 것이다. 혹시 성당에 나가서 사람들을  사귀면 어떨까 싶어 성당에 다닌다던 은행 직원에게 성당의 위치를 물어 찾아갔다.


신자가 백여 명 남짓한 작은 성당이었다. 그날 신홍식 루카 신부님과의 만남만 아니었더라면 나의 성당 방문은 일회성으로 그쳤을지도 모른다. 낯선 우리를 알아본 신부님이 내게 다가오더니 미사가 끝나면 꼭 자기를 보고 가라고 당부하는 것이었다. 그 눈길이 어찌나 진솔하고 다정하던지 나는 그 순간 그 신부님이 좋아져 버렸다.


그렇게 해서 성당을 다니게 되었다. 그 해 연말 같은 구역의 카타리나 자매님 집에서 가정 미사가 있었다. 신부님은 다른 이들에게는 성체를 나누어 주고 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내게는 머리에 손을 얹어 축복을 해 주었는데 그 순간 특별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소리가 들린 것은 아니고 그냥 느낌으로 “네가 힘들게 살아온 것을 내가 다 알고 있다. 이제 내게 와서 위로받고 평안을 얻어라.” 는 메시지를 받았다.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그 순간의 기억은 너무도 또렸이 각인되어 결코 잊을 수 없다.


1년여 만에 세례를 받고 ‘요한’이란 세례명을 받았다. 혼인성사를 받아 같은 여자와 3번째 결혼도 했다. 하느님의 방법은 인간의 작은 머리로는 예측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인 것 같다. 부모님이 벤추라로 이사를 가서 가톨릭 신자가 된 일이나 내가 아내를 만나 세례를 받은 일이 모두 그러하다. 내가 가톨릭이 되었기 때문에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연도도 드리고 장례미사로 드릴 수 있었다.


가톨릭에서는 조상에게 드리는 제사나 차례를 우상숭배로 보지 않기 때문에 제사도 드릴 수 있었다. 이제는 그만두었지만 돌아가시고 3년 상이 지날 때까지 기일에 동생들을 불러 제사를 드렸다. 요즘은 기일에 연미사를 올린다.


나는 가족의 건강과 평안, 자녀의 성공이나 사업의 번창 등을  청하는 구복 신앙을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고난과 재앙도 삶의 한 부분이라고 받아들이고 묵묵히 사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내게 주어진 장애나 그동안 살아오며 겪었던 어려움을 누구 탓으로 돌리거나 원망하지 않는다.


‘인생사 새옹지마’가 나의 좌우명이다.  지나치게 좋아할 일도 아니고, 너무 낙담할 필요도 없다. 모든 것은 정해진 길로 흘러간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며 나름 보람과 즐거움을 만들어 사는 것이다.


미국에는 교회가 많다. 신도 수가 수천에 달하고 여러 명의 부목사와 전도사를 거느린 대형교회부터 일반 주택을 빌려 10여 명의 신도가 모이는 개척교회들도 있다. 학위를 남발하는 신학대학과 한의대학이 많아 목사와 한의사들이 넘쳐난다. 개중에는 유학생 비자를 마구잡이로 내주어 이민국 단속에 문들 닫는 대학들도 있다.


교회의 장로와 신자들은 마음에 들지 않는 목사나 전도사를 해고하고 인터뷰를 통해 새로운 목사를 채용하기도 한다. 뜻이 안 맞으면 신도들이 교회를 나와 목사를 고용하여 새로운 교회를 만들기도 한다. 미식가들이 맛집을 찾아 전전하듯이, 신도들은 내 입에 맞는 말씀과 교회를 쇼핑하며 다닌다.


성당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에 있는 한인 공동체 중에 교구에서 필요에 따라 만들어 한인 신부를 보내준 경우는 거의 없는 것으로 안다. 대부분은 한인 신자들이 모여 한국의 지방교구에서 신부님을 모셔와 만든 성당들이다. 대구나 마산교구 같은 지방 교구들은 미주 곳곳에 신부를 파견해 놓고 있다. 신자들은 지리적 구역과 상관없이 자기가 가고 싶은 성당을 다닌다. 그러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마음이 맞지 않으면 다른 성당으로 옮겨가면 그만이다.


공동체는 같은 지역의 사람들이 모여 이루는 것이 맞다. 그래야 서로 이웃하고 살며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다. 마음이 맞지 않으면 서로 이해하고 양보하며 사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공동체를 바꾸는 것은 바람직한 해결책이 아니다. 다음 생에서 보게 될 하늘나라라고 해서 모두 내 맘에 드는 사람만 있겠는가. 내가 이 생에서 미워하며 피했던 사람이 내 이웃이 될 수도 있다. 그때는 어디로 갈 것인가? 하늘나라는 하나뿐인데.


더러 신자들에게 실망을 안겨주는 신부님들도 있다. 이런 경우 신자들의 잘못이 더 크다. 집을 새로 이사하거나 새로 비지니스를 개업했을 때 신부님이 집들이나 개업식에 와서 축복을 해 주면 봉투를 건넨다. 신부님이 장례미사나 혼인 미사를 집전하면 봉투를 건넨다. 내가 세례를 받고 혼인성사를 받던 날도 대모가 신부님 드릴 봉투를 준비했느냐고 물어 얼떨결에 돈을 빌려 봉투를 드렸다. 부모님의 장례미사를 집전했던 신부님들에게도 봉투를 드렸다. 그때는 고마운 마음으로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과연 잘한 일인가 싶기도 하다.


자주 신부님을 모시고 양로원에 계신 어머니에게 봉성체를 가지고 가는 교우가 있었다. 그때마다 신부님의 식사 대접과 사례금을 드린다고 했다. 아마도 처음부터 신부님들이 신자들에게서 사례금을 받자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감사의 뜻으로 시작한 일이 관행으로 변질되었을 것이다. 


모임이 있을 때도 신부님이 참석하는 경우 음식의 가짓수와 질이 달라진다. 사람들은 은근히 신부님 가까이에 앉아 눈도장 찍기를 선호한다. 마치 신부님의 면전이 예수님의 면전이라고 착각하는 것 같다.


공동체 신자의 경조사에 신부님이 참석하여 축복도 해주고 위로도 해 주는 것은 마땅히 신부님이 할 일이다. 더 나아가 신부님이 축의금이나 조의금, 또는 선물을 줄 수도 있는 일이다. 이를 대신해서 미사를 집전해 주는 것이라 한다면 나의 잘못된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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