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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프러포즈
03/04/2019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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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어디서나 손쉽게 영상통화를 할 수 있고, 실시간 메시지도 주고받을 수 있지만, 아직 스마트 폰이 대중화되기 전의 일이다. 그래도 핸드폰의 혜택을 많이 보았다. 아침에 출근하며 그녀에게 전화를 하면 한국은 밤 11시경이었다. 점심을 먹고 하는 전화는 모닝콜이었고, 내가 잠들 무렵은 그녀의 점심시간이었다. 


내가 그녀에게 처음 준 선물은 ‘노라 존스’의 첫 앨범인 “Come Away With Me”였다. 지금도 그녀의 노래를 들으면 연애시절의 감정이 솟아나곤 한다.


전화와 이-메일을 6개월쯤 주고받은 후, 우린 결혼을 이야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1월에 한국에 갔다. 크리스마스 무렵에 나가 연말을 함께 보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었지만, 내게는 가족들에 대한 책임이 남아있었다. 크리스마스와 설날 가족 모임을 기대하고 계시는 부모님이 있었다. 할 수 없이 명절을 보내고 갔다.


한국에는 2주 정도 머물기로 했는데, 마땅한 숙소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무궁화 4-5개의 호텔에도 장애인 편의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그녀가 줄자를 들고 다니며 입구와 화장실의 크기와 치수를 확인하며 어렵사리 숙소를 구했다. 취사시설을 갖춘 원룸이었다.


20여 년 만에 맞는 한국의 겨울이었지만 춥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가 차를 가지고 있어, 큰 어려움 없이 지낼 수 있었다. 우리는 미술관과 영화관에 가고, 커피숍에 가고, 그녀의 친구들을 만나고, 6달 동안 사귀며 연인들이 했을만한 일들을 2주 동안 모두 해 치웠다.


그녀가 은경이와 미국에 다녀가던 때, 마지막 날 잠깐 우리 집에 들러갔었다. 근처의 가게에서 옥순이가 도자기 장식품을 샀는데, 깨지지 않게 포장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마침 집에 소포용 포장 비닐이 있어 들른 것이다. 자연스럽게 “이건 아들들 방, 저건 딸 방, 여기는 내 방”하며 집 구경을 시켜 주었다. 왜 아들이 큰 방을 쓰느냐고 하기에 셋이 써야 하니 내가 작은 방을 쓴다는 설명까지 해 주었다.


그 후, 그녀와 사귀며 통화를 할 때는 아직 학교에 다니고 있는 막내아들과 딸 이야기를 자주 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녀는 내게 아들과 딸, 두 명의 자녀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그걸 알면서도 굳이 고치려 하지 않았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회사 동료 중에 일찍이 아들 둘을 데리고 자녀가 4명 있는 나이 차이가 많은 남편과 재혼을 한 이탈리아 아줌마가 있었다. 처음 소개받았을 때, 남편은 자녀가 둘이라고 속였다고 한다. 결혼을 앞두고서야 털어놓았다고 한다. 아이가 넷이라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사귀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한국에 나가 살고 있던 막내동생에게 농담처럼 네 친구들 중에 혼자된 사람들도 있을 텐데 하나 소개해달라고 하자, 오빠의 장애는 문제가 안되는데, 아이가 넷이나 있다는 건 큰 핸디캡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주변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그녀에게 고백하기가 망설여졌다. 결국 차일피일 미루다가 한국에 나가서 겨우 털어놓았다. 고맙게도 그녀는 그 일을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나의 착각이었다. 여자들은 그런 일을 쉽게 잊지 않는다. 그녀는 지금도 가끔씩 속아서 한 결혼이라며 물러달라고 떼를 쓰곤 한다.


가족을 만나기 하루 전날, 그녀가 머리 염색약을 사 왔다. 장인보다 머리가 더 허연 사위가 어디 있느냐며 머리를 염색해 주었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머리 앞쪽에 집중적으로 흰머리가 많아 얼핏 백발로 보인다.


한정식집에서 그녀의 가족을 만났다. 남동생 가족과 그녀의 아버지, 그리고 계모가 나왔다. (어머니는 그녀가 어릴 때 돌아가셨다.) 난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첫인상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사업을 하고 있다는 남동생을 보는 순간, 그로 인해 힘든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 느낌이 훗날 그가 남긴 아이들을 입양해서 기르게 되리라는 전조였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한국에 도착해서 맞춘 반지가 완성되자, 호텔 레스토랑에 예약을 하고 마주 앉아 그녀에게 청혼을 했다. 대충 결혼식 날짜까지 잡고 나는 미국으로 돌아왔다.


두 달 후에는, 그녀가 우리 가족을 만나기 위해 미국을 다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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