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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11 가구가 살던 집
06/13/2018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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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갓집 골목 안에는 2층 집을 개조하여서 11가구가 사는 집이 있었다.  변소의 입구가 골목으로 나 있어 아침이면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기다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집은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누군가 악을 쓰며 부부싸움을 해 냄비가 마당으로 뒹구는 날이 있는가 하면, 매를 맞는 아이의 자지러지는 비명과 울음소리가 들리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이 있는가 하면, 옹기종기 재미있게 사는 모습도 있었다. 더운 여름날 밤, 누군가 수박 한 덩어리를 사들고 오면 누군가는 얼음을 한 덩어리 사와 대못을 대고 망치로 얼음을 잘게 부수어 큰 양재기에 사카린 가루와 함께 넣고 수박화채를 만들어 더위를 식혔다. 비라도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면 누군가는 김치를 숭숭 썰어 넣고 김치전을 부치고 누군가는 호박을 숭숭 썰어 넣은 수제비를 만들어 이웃과 나누어 먹기도 했다.

 

어렵게 사는 이들이 많았던 시절이다. 음력설이 지나고 나면 김장김치가 떨어져 먹을 것이 없다며 신김치를 얻으러 다니는 사람, 장을 얻으러 다니는 사람들이 있던 시절이다. 할머니는 이런 이웃들에게 가끔 김치나 장을 퍼 주곤 했다.

 

영어에는 “out of sight, out of mind”라는 표현이 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마음에서도 떠난다는 의미다. 내가 외가에서 지내는 동안 아버지는 동생에게 많은 관심을 보였던 것 같다. 늘 동생을 데리고 목욕이나 이발을 다니고 극장에도 다녔다.

 

1966 8회 잉글랜도 월드컵에서 북한 축구팀은 예선에서 이탈리아를 1:0으로 꺾고 8강에 진출했다. 8강전 상대는 브라질을 꺾고 올라온 포르투갈이었다. 전반을 3:0으로 이기고 있던 북한은 후반에 내리 5골을 내어 주며 5-3 역전패를 당했다. 이 월드컵 하이라이트를 모아 만든 영화를 극장에서 했는데, 동생이 아버지와 함께 가서 보고 왔다. 나는 동생의 입을 통해 북한전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아버지가 관심을 둔다는 것은 그만큼 기대도 컸다는 의미다. 남자는 강하게 커야 한다며 아버지는 동생에게 많은 것을 요구했다. 어린 동생은 늘 아버지의 눈에는 부족해 보였던 모양이다. 동생은 아버지에게 야단도 많이 맞았고, 가끔은 매를 맞기도 했다.

 

나는 전기가 들어온 후, 구파발의 집으로 갔다. 그때 처음으로 휠체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어머니와 함께 보장구를 주문 제작하는 공방에 갔는데, 주인은 목발을 짚는 장애인이었다. 내 팔힘을 시험해 본 후 그는 내가 목발을 쓰면 걸을 수도 있을 것 같다며 목발과 휠체어를 모두 맞추라고 했다. 어쩌면 물건을 하나라도 더 팔자는 그의 상술이었을 수도 있다. 어머니는 하나만 하자며 내게 의견을 물었다. 그 무렵 나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 남 앞에서 내 의사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걷도 싶다는 욕심을 가지고 있었다. 양팔로 목발을 짚는 시늉을 해 보였는데 어머니는 내가 휠체어를 미는 시늉을 하는 것으로 알고 휠체어를 주문했다.

 

그때 주문한 휠체어는 쇠로 뼈대를 만들고 자전거 바퀴를 단 크고 무거운 것이었다. 가끔 기름칠도 해 주고 닦고 조여 주며 관리를 잘 했어야 하는데 관리를 소홀이 해서 2-3년쯤 사용한 후에는 심하게 녹이 슬고 해서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11평의 외가와 달리 새로 지은 우리 집은 넓은 거실에 큼직한 방들이 있어 내가 앉아서 다니기에는 너무 넓었다. 휠체어는 나의 활동 영역을 수십 배 넓혀 주었다. 방에서 거실, 입식 부엌, 그리고 이방 저방을 방문할 수 있었다.  나름 양옥으로 지은 집이었지만, 장애물이 많은 집이었다. 방문은 미닫이 문이 아니라 서양식으로 여닫는 문이었는데 바닥에는 문지방이 있었다. 욕실은 한 계단 내려가야 하기 때문에 휠체어는 들어갈 수가 없었고, 현관에도 층계가 있었다.

 

90년대 중반 재외동포문학상에 당선되어 한국을 방문했을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강남에 있는 ‘아미가’ 호텔에 묵게 되었다. 장애인 판사로 알려진 '정범진' 씨도 묵었다는 방에 묵게 되었는데, 욕실 입구에 문턱이 있었다. 객실에서 한 계단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가게 되어 있는 구조였다. 기능상 전혀 필요가 없는 턱이었다. 양쪽으로 널빤지를 놓아 겨우 사용할 수 있었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이런 식으로 기능상 필요가 없는 문턱을 입구에 만들어 놓은 빌딩과 상가를 접한 적이 있다. 디자인 상 모양을 내기 위해 만들어 놓은 이 턱이 장애인은 물론 노인이나 유모차에게는 장애물이라는 인식이 부족한 탓이다.

 

장애인 아들을 염두에 두고 지은 집이라고 했지만, 휠체어 장애인이 사용하기에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구조였다. 나는 그 집에서 화장실을 한 번도 사용해 보지 못했다. 아버지는 마당에 화단을 가꾸고 시멘트로 길을 만들어 내가 다닐 수 있게 해 주겠다고 약속을 했었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나중에 벽제에 더 큰 집을 지어 이사를 갔지만 그 집 역시 문마다 문지방이 있었고 현관과 화장실에는 어김없이 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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