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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나가 죽어라”
04/16/2018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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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유일한 동생인 이모는 빼어난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이모의 처녀 적 흑백 사진을 보고 영화배우라고 착각을 한 적이 있을 정도다. 이모가 시집을 갔다가 며칠 만에 돌아오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모의 결혼식 장면은 생각나지 않는다. 할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온 이모의 머리채를 잡고 “이년, 나가 죽어라” 하며 때리던 일이 생각난다. 이모가 왜 결혼을 하고 며칠 만에 집으로 돌아왔는지는 모르겠다. 


그 후 할아버지는 이모를 자신의 동생의 집으로 보냈다. 우리는 어머니의 고모인 그녀를 ‘고모할머니’라고 불렀다. 그녀는 한국전 당시 국군이던 남편을 잃고 일식집을 운영하며 살고 있었다. 일반식당이 아닌 접대여성을 두고 술을 파는 요정에 가까운 집이었다.


이모는 할아버지에게서 돈을 타서 ‘ELI’라는 영어학원에 다닌다고 했는데, 공부는 별로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나중에 내가 영어를 배우고 나서 보니 이모의 영어 실력은 형편없었다. 시집가서 제대로 살지 못하고 돌아왔으니 고모네 집에서 자중하고 있으라는 할아버지의 뜻과는 달리 이모는 자유로운 삶을 살았던 것 같다. 

   

인민군 출신인 삼촌은 한국땅에서 밝은 미래를 기대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미국 유학을 결심하고 한국을 떠났다. 삼촌은 단국대학을 다녔는데, 늘 종로 경찰서 사찰계 형사의 감시를 받았다고 한다. 미국으로 떠나는 삼촌을 마중하기 위해 김포공항에 나가 손을 흔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버지는 가족행사에 나를 꼭 데리고 다녔다. 

  

2살 반에 소아마비에 걸린 후 엄청나게 많은 양의 한약을 먹었고 침을 맞았으며 뜸을 떴다. 침을 하도 많이 맞아 발가락 사이에 하얗게 흉터가 생겼다. 허리와 다리에 뜸을 뜬 자리에도 볼록하게 피부가 변형된 흉터가 남았다. 이 흉터들은 마흔이 되었을 무렵 어느 날 샤워를 하고 몸을 말리다 보니 사라져 있었다. 그때 다시금 세월의 무서움을 깨달았다. 


7살쯤 되었을 무렵의 일이라고 생각된다. 팔과 다리의 힘을 기르고 보조개를 사용하면 걸을 수 있다는 말에 을지로의 메디칼 센터에 다니며 물리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곳에는 스웨덴에서 파견된 간호사와 의사들이 있었다. 손에 잡기 쉽게 깎은 나무 조각을 양손 밑에 놓고 팔에 힘을 주어 상체를 들어 올리거나 철봉에 매달려 팔의 힘을 기르고, 세발자전거의 페달에 발을 묶고 누군가 뒤에서 밀어주어 다리를 올리고 내리며 다리 근육을 키우는 운동을 했다. 집에서 하는 운동은 주로 어머니나 아버지가 도와주었다.

   

나는 같은 무렵의 일이라고 기억하는데, 메디칼 센터에서의 일인지 아니면 내가 아파 다른 병원에 갔던 때의 일인지 확실치 않다. 할아버지와 함께 병원에 갔었다. 약을 타러 가야 했는데, 할아버지는 나를 계속 안고 있기가 힘들었던 모양이다. 벤치에 앉혀놓고 금방 다녀올 테니 잠시만 기다리라고 했다. 할아버지가 모퉁이를 돌아버리니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내 생각에는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싶었는데도 할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울기 시작해다. 잠시 후 하얀 유니폼을 입은 간호사 누나가 다가와 왜 우느냐고 물었다. 할아버지가 약을 타러 갔는데 안 온다고 하자, 그녀는 나를 안고 약국으로 갔다. 그곳에서 할아버지를 다시 만났다. 같은 일이 한 번 더 있었다고 기억하는데 이 역시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 싶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때 내게는 가족에게 버림을 받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 난 어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늘 애를 쓰며 살았다.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어른들에게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예를 들자면, 추석에 아버지가 북에 계신 부모님을 위하여 차례를 지내겠다고 하면 제수장만에 쓰라고 모아 놓았던 용돈을 꺼내 놓았다.

   

가슴까지 올라오는 철제 보조기가 완성되던 날이었다. 모두가 기대하는 가운데 보조기를 입고 우뚝 서기는 했지만 내 힘으로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내 다리에는 그 무거운 보조기를 밀고 나갈 힘이 없었고, 팔에는 목발을 짚고 몸을 들어 올릴만한 힘이 없었다. 양쪽에 철제 손잡이 난간이 세워져 있는 10미터 남짓한 거리를 간호사가 뒤에서 자기 발로 내 다리를 밀어 겨우 걸었다. 그것이 내가 서서 걸었던 유일한 기억이다.

 

의료진은 수술을 권유했지만 아버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를 데리고 병원을 나왔다. 보조기도 버려둔 채로. 아버지가 너무 성급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두고두고 한다. 그때 나는 그 무거운 보조기를 감당하기에 너무 어리고 약했던 것이다. 계속 힘을 기르고 연습을 했더라면 아마도 보조기를 입고 걸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걷는다기 보다는 팔의 힘으로 끌고 다니는 것이었으리라. 그렇게 했다고 해서 나의 삶이 크게 달라졌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도리어 더 많이 좌절하고 절망했을 수도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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