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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수(kis41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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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젠베르크, 아인슈타인, 보어, 카프라, 토마스 쿤
10/03/2014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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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젠베르크, 아인슈타인, 보어, 카프라, 토마스 쿤        

 

21세기 초에 동양사람들이 도에 눈을 뜨게 되어 도에 관심을 갖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서구인들이 형식화한 <역학체계>가 적용성의 한계를 노출하게 됨으로써 자연스럽게 동양사상이 부상하게 되었으며 세계를 보는 동양의 관점에 관심을 갖고 고찰해 나가다보니 도에 관심이 닿게 된 것입니다.

 

 

                    하이젠베르크

 

 

미국 동부에 있는 과학철학자들과 현대물리학자들 그리고 남서부 해안의 쌘디애이고에 있는 과학철학자들 사이에서 패러다임을 전환하자는 제안이 먼저 태동했으며 세계를 보는 패러다임을 바꾼다고 가정한다면 <부분의 패러다임>을 버리고 <전체의 패러다임>으로 전환할 수 밖에 없다는 논의가 전개되기 시작함으로써 사실은 <전체의 패러다임>이 단초로 등장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전체의 패러다임을 가지고 논의를 계속해 나가는 과정에서 동양의 도가 논의의 초점이 된 것입니다. 결코 동양의 사상가들에 의해서 <동양의 도>가부상하게 된 것은 아닙니다.

전체의 패러다임으로 전환하자는 논의가 전개될 수 밖에 없었던 단초는

(1)뉴턴의 고전역학체계로서는 더 이상 물리를 탐구해 나갈 수 없고

(2)인간의 정신이 배제된 이원론과 인간중심주의적 이기주의를 더 이상 끌고 나갈 수 없으며

(3)기계주의적이며 환원주의적인 관점(부분의 합이 전체이며, 부분은 전체로부터 분리 가능하고, 부분은 전체로 환원된다는 패러다임)을 가지서는 세계를 바로 바라볼 수 없다는 데에있었습니다.

직접적인 단초는 1972년 로마클럽에서 발표한 <성장의 한계>를 계기로해서 지금과 같은 관점과 논리체계를 가지고 <발전주의>를 노래하다가는 지구환경이 구제불능에 이르게 되어 인류 전체에 문제가 생기게 되리라는 경각심에서 패러다임을 바꾸자는 논의가 일어난 것입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20세기로 접어들자 <불확정성원리>와 <장의 이론>이 나타나고 그에 연이어서 <소산구조>와 <시스템이론>이 등장하자 서양의학자들이 <부분>에서 눈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고전역학체계>가 <적용성의 한계>를 노출하자 참으로 엄청난 선언을 했습니다. 그것은 금세기의 유명한 멘트가 되었습니다.

"영원한 진리는 없고, 모든법칙은 적용성의 한계를 지니며, 그 어떤 사람의 관점과 논리도 틀릴 수있다."

물론 이와 같은 멘트가 나오도록 문명의 물결을 돌려 놓은 주인공들은 불확정성원리를 밝힌 하이젠베르크, 특수상대성원리를 밝힌 아인슈타인, 장의 이론을 주장한 닐스 보어, 시스템이론을 제시한 프리죠프 카프라, 소산구조 이론을 들어낸 일리야 프리고진, 패러다임의 전환을 주장한 토마스 쿤, 혼돈을 주장한 수많은 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고전역학체계와 부분의 패러다임에 의존된 연구방법으로서는<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알 수 없다고 선언함으로써 <전체의 패러다임>이 논의의 현장에 등장한 것입니다.

부분에서 관점이 떠나 <전체>를 보게 됨으로써 비로소 <전체>를 보아나온 정신문화가 어느쪽에 깃들어 있는가를 더듬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급기야 동양에서발견한 것입니다.

서구인들이 생각하기에 동양의 도가 대단하고 예뻐서 <동양의 도>에 관심을 기우리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19세기 중엽까지만해도 동양의 관점과 논리는 개념이 될 수 없다고해서 얼마나 무시했는지 모릅니다.

불교나 도교나 유교가 고대 동양인들의 삶에 일시적인 도움을 주었다고 하더라도 확고한 개념이 되지 못한 이상에는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몇 해 전에 한국에 온 노벨상수상자인 일리야 프리고진이 어떤 말을 했습니까.

"불교사상과 유교사상을 가지고 있는 한국인들이 왜 고민을 하는지 알 수 없다"는 말을 했습니다.

우리 나라의 화학자들이 일리야 프리고진의 말을 듣고 모두 놀랬습니다.

솔직하게 말해서 그 때에 일리야 프리고진이 한국화학회의 초청을 수락하지 않았더라면 프리고진은 한국에 오지 않았을 것이며 우리들 또한 일리야 프리고진의 대단히 중요한 말을 들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일종의 시운으로 보아야 할는지 아니면 시계바늘의 역회전으로 보아야 할는지----

세계가 이처럼 개벽을 해 나가고 있는 데도 나라 안은 100년 전 대원군의 쇄국정책하에서 신음하던 양상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상황이 전개 되고 있습니다.

꿈속에서 허덕이면서 정상적인 근대화를 착수하지 못했던 그 때와 다름없이 새롭게 일어나는 <문명의 혁신> 앞에서 우리는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헛물을 들이키면서 엉뚱한 정치놀음이나 하고 앉아 있는 실정입니다.

인식의 방법론으로서 <직관주의>를 터득한 사람은 원래 한국사람들입니다.
사물의 변화를 읽을 수 있는 직관지혜야말로 논리적 체계를 상회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언제쯤이면 비가 올 것인가를 예측하고자 할 때 직관지혜를 갖춘 사람은 문고리를 만져 봅니다. 그리고는 금방 며칠 후면 비가 올것이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직관지혜를 갖추지 못한 사람은 기상학회나 관상대로 달려가 데이터를 뽑아 봅니다. 관측기계와 데이터의 확률에 의지해서 비가 올 것인가 아닌가를 판단합니다. 적중율은 30%에 지나지 않습니다.

점성술사의 확률도 역시 30%에 지나지 않습니다. 점성술사에게 비가 언제쯤 올 것인가를 물어도 확률은 역시 30%입니다.

같은 말을 열 차례 반복하는 경우 세번은 적중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직관지혜를 갖춘 사람은 마른 북어껍질을 여러 가닥으로 모아서 문고리에 달아 놓습니다. 마른 북어겁질을 예리한 촉감으로 텃취하는 순간 언제쯤이면 비가 오리라는 것을 알아내는 것입니다.

날카로운 감촉으로 북어껍질의 습기를 느끼는 순간 직관지혜가 일어나는 것이지요. 도를 깨달은 노옹은 문고리에 달린 북어껍질을 매일 매일 만져보면서 홍수를 대비합니다.

이야기가 약간 빗나갔습니다만 도는 논리체계를 뛰어 넘는 <직관지혜>라는 것을 언급하고자 해서 노옹의 문고리를 언급했습니다.
직관지혜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도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도는 결코 축적된 데이터는 아닙니다.
도는 또한 점성술사의 확률도 아닙니다.
도는 많은 경험을 토대로한 직관적 지혜의 발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계 안에서 내가 거처할 시간과 공간을 찾아내는 것이 도(道)입니다.

 

도는 이론이나 논리적 체계를 뛰어 넘는 <직관지>이기 때문에 적용성의 한계를 경험한 서양의 물리학자들이 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물리학자들이 자신들이 거처할 시간과 공간을 찾아내기 위하여 도에 관심을 갖게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김인수(k41i01s0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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