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s410101
김인수(kis410101)
California 블로거

Blog Open 09.06.2011

전체     151275
오늘방문     22
오늘댓글     0
오늘 스크랩     0
친구     10 명
  최근 방문 블로거 더보기
  달력
 
나를 바꾼 인생의 한 사건
05/31/2014 21:32
조회  3268   |  추천   0   |  스크랩   2
IP 222.xx.xx.154

 

   나를 바꾼 인생의 한 사건                               

 

 

<1>

73억이나 되는 온 세상 사람들이 산과 들과 강과 바다에서 서로 만나, 서로가 서로의 성립을 위해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삶을 펼쳐나가는 지구촌(地球村).

둘레가 40192km나 되는 지구촌이라는 이 땅덩어리는 시속(時速) 100800km1365일 하루도

쉬지 않고 태양(太陽) 궤도(軌道)를 질주(疾走)한다.

이 거대한 땅덩어리에는 오대양(五大洋) 육대주(六大州)가 있고, 여러 대륙과 대양의 자연환경과

국지적(局地的) 여건(與件)에 맞춰 다양한 민족이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원용(援用)하여 값진 삶

을 향유(享有)한다는 함의(含意)를 갖고 있기 때문에 "지구촌(地球村)"이라 이름 한다.

 

 

 

 

이 지구촌에는 229개 국가가 존재하며, 각 국가마다 세계를 설명하는 세계관(世界觀)과 사회를

리드하는 학문체제(學問體制)를 확보하고 있다. 이들 국가들은 서로 다른 이론과 학문체제를 갖

추고 있음으로 해서 갈등관계를 유지하면서도 UN이라는 국제기구를 통해서 서로가 서로의 성립

을 위해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우호적 관계를 상정하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인연의 결과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오대양 육대주 가운데, 남섬부주(南贍

部洲) 동양(東洋)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 노인과 장애인과 여성과 어린이가 살아가기 가장 힘이

드는 나라에서.

 

내 나이 열 살 때, 동족상잔(同族相殘)6.25변란을 겪었으며, 4.19학생의거와 5.16군사혁명은

물론, 5.18민주항쟁까지 겪어야했다. 서세동점(西勢東漸)과 변법개조(變法改造)가 겹치는 급격

한 사회변동(社會變動)속에서, 바닥에 쓰러지지 않고 버티면서 정의나 정체성과 관계없는 사회적

정황에 허덕이는 과정에서 나를 바꾼 인생의 한 사건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2>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17세기부터 근대화를 착수하여 차분하게 300년 동안이나 지속해 나온 반

면에, 내가 태어난 한국은 20세기에 들어서야 근대화(近代化)인지, 서구화(西歐化)인지 분간할

수 없는 급격한 사회변동을 수반한 변혁 운동을 전개하여 무엇이 무엇인지 분간할 수 없는 소용

돌이에 휘말려들었다. 압축된 서구화(西歐化)의 과정에 도입된 전반서화(全般西化)의 광풍 속에

나의 청년시절과 장년시절은 고유문화(固有文化)와 전통사상(傳統思想)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와중(渦中)에 파묻히고 말았다.

유럽에서, 합리주의(合理主義)와 평등주의(平等主義)를 근본 사상으로 내세워 큰 호응을 얻었던

일루미나티의 모토(Motto)가 자유(自由)와 평등(平等)이었다. 보수는 자유를 높이 평가했으며,

보는 평등을 높이 평가했다.

 

바이스하우프트(Adam Weishupt)와 일루미나티 프리메이슨(Illuminati Freemason)을 알지 못하는

한국 사람들이 자유와 평등을 제멋대로 논평했으며, 우파와 좌파로 편을 가른 후, 자신들의 마음

에 들지 않는 사람을 함부로 검거하고 죄를 주었다. 이러한 혼란기를 살았던 사람들은 1960년대

1970년대를 넘기는 사이에 양심에 먹칠을 해야 했다.

자유를 지향하는 우파라고 외치는 사람들도 아담 바이스하우프트를 모르는 사람이 많았으며,

랑스혁명을 리드한 바이스하우프트(Adam Weishupt)를 기억하지 못하면서 선거철만 되면 자기는

우파이며, 좌파는 안 된다고 외쳤다. 이러한 사람은 진정한 의미의 우파라고 볼 수 없다.

 

내 편이 아니면 모두 적이라는 편견을 가진 사람들, 물질을 모으는데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

람들, 도덕과 윤리는 물 건너로 보낸 지 오래인 사람들, 고유문화와 외래문화를 분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들끓는 사회에서, 이제는 정의가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도 없다.

사람의 가치가 땅에 떨어진지 오래인 마당에서, ‘나를 바꾼 인생의 한 사건을 적어보려고 붓을

들었지만, 나를 바꾼 사건이 너무도 많기 때문에 어떤 사건을 선택해야 좋을지 몰라, 한동안 망설

이고 앉아 있었다. 그러던 중에 불현듯 2001년에 겪었던 일이 떠올랐다.

 

<3>

20011, 환갑잔치를 끝내고난 후, 노인과 장애인과 어린이와 여인들이 살아가기 편한 나라에

, 남은여생을 한가롭게 펼칠 수 있는 인생이모작(人生二毛作)에 착수해 볼 생각으로 미주(

)로 들어갔다.

LA로 오게 된 연유는 웨스턴과 3가가 교차되는 지점에 자리한 ‘LA관음사불교대학으로부터 인도

철학 강의를 맡아달라는 전갈에 기인한다.

1971년에 유학을 떠나려고 만반의 준비를 했었다가 신원조회가 떨어지지 않음으로 해서 미국행

을 포기했었던 전력이 있었던 터라, 60이 된 이때에 이르러, 새삼스럽게 미국으로 들어가는 일이

썩 내키지 않아 며칠을 두고 망설였다. 그러던 차에, 한 친구로부터 인생이모작(人生二毛作)’

착수하는 의미에서 미주로 들어가, 한번 새로운 현실에 직면해 보라는 의취의 간곡한 귀띔을 듣

고 마음을 정했다.

 

인도철학 강의를 듣겠다고 신청한 사람은 40명이었다. 그 중에 LA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김

운하(金雲夏)씨와 LA한인회장을 지낸 이재근(李載根)씨 등이 기억에 새롭다. 내 강의를 계기로

해서 김운하선생과 각별한 사이가 되었고, 그로부터 매일 아침 6시면 웨스턴거리와 3가가 만나는

지점에서 김선생과 만나 허리웃 뒷산에 오르곤 했다. 김운하선생과의 만남은 미국 사회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 지름길이 된 셈이었다.

산 정상에 올라, 김선생과 함께 간단한 맨손체조를 하기도 하고, 철봉에 매달리기도 했다.

 

산을 오르고 내리면서, 그동안 각자가 겪어 나온 이야기며, 삶의 세계를 이끌고 나가는 갖가지 이

론체계는 물론 미국을 리드하는 프리메이슨과 관계가 깊은 사건들에 대한 한담을 주고받기도 했

. 땀을 흘리고 하산한 뒤에는 맥도날드 가게에 들려 햄버거와 커피로 아침식사를 때웠다.

 

김교수님, 제가 이틀 뒤에 샌프란시스코에 가야할 일이 생겼는데, 저와 함께 동행 하지 않으시겠

습니까.”

7월로 접어든 어느 날 아침, 땀을 흘리면서 산에 오르는 도중, 이틀 뒤에 샌프란시스코에 갈 일이

생겼는데 자기와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동행을 요청했다. 나는 김선생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

.

 

<4>

샌프란시스코로 출발하던 날 아침, 김운하선생과 함께 U홀을 하나 빌린 후, 8가와 버몬트 교차점

에 자리한 사무실에서 온갖 미술품들을 내려다가 서로 으스러지지 않도록 담요와 신문지로 잘 포

장하여 U홀에 실었다. 그런 다음, 아침 식사를 함께한 후 샌프란시스코를 향해 길을 떠났다.

LA를 벗어나자, 곧게 뻗은 아스팔트길을 달리며 맞이하는 들바람이 참으로 신선했다. 직선으로

뻗은 아스팔트길은 저 멀리 보이는 파란 하늘로 연이어져 있었다. 푸른 포도원과 채소밭 사이로

곧게 뻗은 아스팔트길과 파란 하늘의 교차점에 나타난 신기루(蜃氣樓)가 강물처럼 반짝거리기도

했다. 운전에 서툰 사람이라도 핸들만 잘 붙잡고 있으면 아무런 문제없이 달리도록 곧게 뻗어 있

는 캘리포니아의 들길이었다.

중간 중간에 맥도날드 가게에 들려 잠깐씩 휴식을 취하면서 샌프란시스코를 향해 쉬지 않고 달렸

. 아침 8시에 출발했는데, 샌프란시스코 입구인 금문교에 이르렀을 때는 뉘엿뉘엿 해가 기울고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우리를 맞이해 준 이는 샌프란시스코 한인회 회장을 맡고 있던 지목사님이었

. 지목사님은 거년에 조선일보 업무국장을 지냈던 분으로 샌프란시스코 한상회(韓商會) 지부의

일을 맡기도 했다.

지목사님의 처소에서 한 밤을 밝힌 다음날, 김운하선생은 차이나타운 인근에 있는 고려식당 공간

을 빌려, 미술작품을 벽면에 걸기 시작했다. 유화를 비롯해서 동양화 수채화 등등 많은 작품을 넓

은 벽면에 가득 걸었다.

점심때가 되자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는 교민들이 줄을 이어 고려식당을 찾았다. 교민들은 각자

눈에 드는 작품을 골라 값을 흥정했다. 200백 달러, 500달러 하는 작품을 한 점씩 고르는 이들도

있었지만, 거의 많은 사람들은 전시장을 한 바퀴 휙 둘러보고는 식당 밖으로 나가곤 했다.

삼일 동안 전시를 했는데, 겨우 10점이 계약되었다. 작품 판매는 극히 미미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한 김운하선생은 쌘호세로 자리를 옮겨서 또 전시를 시

작했다.

 

샌프란시스코와 샌호새에서의 5일 동안, 그곳의 교민들에게 미술 작품을 매매하는 일을 하면서,

코리안 디아스포라들의 삶이 매우 팍팍하고 곤궁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이론과 논리가 다르고, 문화와 언어가 다르고, 풍속과 일상이 다른 미주의 현실에서, 코리안 디아

스포라들이 하루라도 일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고달픈 생활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

, 앞으로 다가올 나의 인생이모작을 어떻게 설계해야 좋을는지 모르겠다는 회의에 빠져들었다.

김운하선생과 함께 샌프란시스코와 샌호새에서 보낸 5일간의 동행(同行)을 통해서 코리안 디아

스포라의 삶이 바람 앞의 등불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

김운하선생과 함께 했던 샌프란시스코 여행은 나를 바꾼 인생의 한 사건이 되었다.

샌프란시스코와 샌호새에서 보낸 5일간의 여행을 통해서, 코리안 디아스포라로서 인생이모작을 미주()에서 착수하겠다는 생각을 보류했다. 

 

 

 

김인수 k41i01s01@naver.com

 

이 블로그의 인기글

나를 바꾼 인생의 한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