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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수(kis41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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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유신이 끝났다
03/11/2017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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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로소 유신이 끝났다                            




탄핵안이 인용되었다. 만감이 교차됨을 숨길 수가 없다. "비로소 유신이 끝났다"고 입을 여는 사람들도 나오고 있다. 박근혜 씨가 대통령 시절은 물론 정치인이었던 때를 포함해, 거의 평생을 절대 가치로 삼았던 '아버지의 방식'이 더 이상 펼쳐질 마당이 없어졌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유신은 이제 명실상부하게 막을 내렸다.

박근혜 씨의 아버지 사랑과 아버지 따라 하기는 남다른 데가 있었다.

우선 그녀는 자라면서 보고 배운 대로 아버지처럼 군사문화를 숭상했다.

군사문화란 무엇인가. 승리만 인정받는 문화요, 일사불란이 요구되는 능률 추구 문화다.

군사 문화 사전에 페어플레이란 없다. 병영 밖으로 나오면 안 되는 문화였다.

게다가 그녀는 민주주의에 대한 교육이나 훈련이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따라서 민주주의에서 강조되는 대화나 소통이나 타협은 우선순위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었다. 그녀가 당대표 시절부터 '고집'이니 '불통'이니 하는 소리를 끊임없이 들은 것도 다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슬 퍼런 공안정국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고, 능률 선호는 성장 일변도의 재벌 사랑으로 이어졌다.

자연스럽게 기득권 비리와 패거리 문화가 판을 이뤘다.

스스로 구정물에도 발을 담갔으며, 국정원과 검찰 사랑에도 남다른 모습을 보였다.

철이 지나도 한참지난 새마을 운동에 대한 애정이나 터무니없는 국정교과서 밀어붙이기는 아버지를 향한 사부곡(思父曲)이었다.

이 모든 것들의 바탕에 아버지의 '유신 정신'이 깔려있었다고 보는 게 옳을 듯싶다.

바로 아버지에 이어 국민 우습게 본 그것이, 결과적으로 이 나라 역사상 초유의 대통령 파면이라는 엄청난 불행을 몰고 왔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필자는 〈대통령 복도 지지리 없는 나라〉(산해 펴냄)라고 썼다. 

유신, 그것은 종신 집권을 노린 한 철권 통치자의 탐욕에 업혀서 점령군처럼 이 땅에 찾아왔다.

1972년 10월 17일 저녁, KBS 라디오가 군가를 섞어가며 긴급 뉴스를 숨 가쁘게 전하고 있었다.

당장 그날로 국회가 해산되고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가 없어졌으며, 대통령도 간접선거로 뽑는다 했다. 국회의원도 정수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임명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뉴스였다.  

한마디로 '민주주의 헌법 기능의 말살'이었다.

알 수 없는 것은 북한의 위협에 맞선다며 '반공'과 '국가안보'의 기치를 내거는 대목이었다.

필자는 그때 입사 4년 차 기자였다. 바로 석 달 전인 그해 7월 4일 남북공동성명 발표로 남북 화해 분위기가 조성돼가고 있었는데, 왜 갑자기 남북관계가 험악해지고 왜 반공이 구호로 등장한 것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훗날 밝혀진 일이지만, 유신을 하면서 내건 구실이 '반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사전에 "유신을 단행한다"는 정보를 세 번이나 김일성에게 통보했다.

이후락(전 중앙정보부 부장)이 박성철(북한 부수상)과 김영주(북한 노동당 조직부장)에게 각각 통보해주고, 남북조절위원회 정홍진(중앙정보부 협의조정국장)이 북한 측 김덕현에게 구체적 내용을 알려준 것으로 되어있다.  

그렇게 박정희가 종신집권체제를 준비하자, 그해 12월 김일성도 주석제를 도입해 역시 종신집권체제를 완벽하게 갖췄다. '적대적 의존체제'의 완성이었다. 말하자면, 남북이 사이좋게 짜고 고스톱을 친 것이었다.
 

유신헌법에 따라, 남측에선 그해 12월 23일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이름의 대통령 선거인단이 체육관에 모여 대통령을 새로 뽑았다.

단일후보인 박정희는 '임명된' 선거인단 2359명 가운데 2357명의 지지(2표는 무효였다)를 얻어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유신체제의 박정희는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었다.

유신이란 그렇게 장기집권 욕심에 눈이 어두워 국민을 우습게 안 무시무시한 제도였다.  

그 무렵 박정희를 비롯한 수뇌부 참모들은 유신을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해괴한 호칭으로 불렀다.

당시 임명되던 내무 법무 등 장관들은 "유신 이념을 구현하는데 신명을 바치겠다"는 소감을 TV를 통해 내보내곤 했다. 그때만 해도 대부분의 국민들은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른 채 "나라 일을 열심히 하는데 신명을 바치겠다"는 각오쯤으로 알아들었다. 그러나 유신 이념의 구현이란 무슨 말인가. 박정희가 종신 집권하도록 하는 게 유신 이념이었다.

박근혜 씨도 정치를 시작하기 전인 1981년에는 "유신이 없었더라면 (이 나라는) 아마도 공산당의 밥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던 그녀가 2012년 대선후보 때는 유신에 대해 "헌법 가치가 훼손되고 정치 발전을 저해 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며 사과했다.

그러나 그녀는 대통령에 당선된 후, 유신헌법을 만든 세 사람 중 한 명인 김기춘을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기용했다. 그게 그녀의 '아버지의 유신'에 대한 생각이었다. 아버지처럼 정의와 국민을 우습게 본 것이었다. 

이 나라에서 정의와 국민을 우습게 본 최초의 대통령은 이승만이었다
.

해방이 되면서 나라가 혼란에 빠졌을 때 이승만은 친일파들과 손을 잡고 그들을 권력유지의 핵심세력으로 활용했다. 일본치하에서 독립군을 잡으러 다니던 고등계 형사나 죄 없는 백성들을 수탈하던 악덕 부호들이 응징을 받기는커녕, 이승만이 나눠준 완장을 차고 오히려 애국자인 척 떵떵거리며 갑질 횡포를 일삼았다.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되고 반민족행위 처벌법이 마련됐으나 이승만과 친일파 기득권 세력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쳤다.

이승만은 "반민특위가 삼권분립에 위배된다"며 서울 중부경찰서장을 시켜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기도 한다. 역사와 민족 앞에 죄를 지은 친일파들이 준엄한 처벌을 받지 않은 채, 청천백일 하에 횡포까지 부리는 희한한 사태가 연출되었다.  

그럴 일이 아니었다. 이승만은 죄 많은 친일 세력들을 엄하게 단죄해, 역사와 정의를 바로 세우는 선례를 만들었어야 했다. 아무리 질 나쁜 죄를 지었어도, 시류를 잘 타고 줄만 잘 잡으면 얼마든지 영화를 누릴 수 있다는 '한국적 교훈'을 이승만은 만들어냈다.

그들은 이승만의 자유당에 들어가 단물을 빨다가, 박정희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자, 날쌔게 민주공화당에 들어가 뿌리를 내렸다. 그 기득권 집단이 대를 이어 오늘날까지도 호의호식하고 있는 것을 모르는 사람 거의 없다. 그게 바로 이승만의 '죄'라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다.

프랑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치의 점령 기간이 우리보다 훨씬 적은 4년에 불과한데도, 그들은 가혹하게 부역자들을 정리해, 역사와 정의를 굳건하게 바로 세웠다. 시민들에 의한 보복 약식 재판으로 1만여 명이 처형됐고, 최고 재판소의 정식 재판을 통해서도 767명이 사형 집행되었다. 9만5000여 명이 실형 선고를 받았으며, 여성도 2만여 명이 삭발을 당했다.

특히 언론인들과 작가들에 대한 처벌은 혹독했다. 글과 책과 기사로 프랑스 정신을 타락시켰다는 이유였다. 우리와는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그렇게 가혹했기에 역사와 정의가 바로 세워졌다고 그들은 자랑스러워한다. 오늘날 이 나라 실상과 반드시 비교해 보아야 한다는 엄중한 목소리도 나온다.

때문에 이 땅의 불공정과 부도덕의 시작을 만든 이승만에게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대통령의 파면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놓고 각오를 새롭게 해야 할 때다.

이제는 나라가 정의롭고 정직하고 건강해졌으면 좋겠다.

저 높은 꼭대기에서부터 맑은 윗물이 흘러내렸으면 좋겠다.

유신의 구정물 같은 것 분명히 걷어내고 밑바닥 민초들의 세상에까지 맑은 물이 넘쳐났으면 좋겠다.

그렇게 정의가 뿌리를 굳게 내리고, 국민 우습게 알지 않는 새 나라가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오홍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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