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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수(kis41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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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기 싫은 LA 코리아타운
09/08/2011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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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기 싫은 LA 코리아타운

 

 

 

<1>

요즈음, 이구동성으로 LA의 경기가 좋지 않다고 한다. 자영업자들이 아침마다 한숨을 쉰다고 한다. 소리 없이 문을 닫는 상점들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경기가 좋지 않으면 자영업자들이 가장 타격을 많이 입는다고 한다.

한 때는, 어느 누구에게나 균등하게 기회가 주어진다는 미국을 향하여 새로운 꿈과 부푼 기대를 가슴에 안고 한국 사람들이 LA로 밀려 들어왔다. 지금으로부터 그렇게 멀지 않은 1970년대다.

40여 년 전에 한국을 떠나 LA로 왔던 사람들이 한 사람, 두 사람 알게 모르게 다시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이민을 왔던 사람들이 모국으로 돌아가는 양상을 역이민이라고 말한다.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르고 현상을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LA를 떠나든 안 떠나든 각자의 판단과 선택에 맡길 일이다. 생각에 따라서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로 다시 이민을 하던, 고국으로 환귀본처하든 알아서 결정할 일이다.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LA만큼 살기 좋은 곳도 다시없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LA를 떠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만은 사실인 모양이다.

 

<2>

솔직하게 표현해서 미국 이민법이 개정된 후 1968년부터 미국으로 머리를 두르고 이민을 계획한 한인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니었다. 그때는, 미국으로 들어오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정부에서 출제하는 시험에 합격을 하고서도, 외무부에서 여권을 잘 내주지 않았다. 미국으로 가지고 올 수 있는 달러도 일정한 액수를 정해놓고 그 이상을 가지고 나가지 못하게 막았다. 그렇게 미국으로 들어오기가 어려운 데도 머리 회전이 빠른 사람들은 1970년부터 미국으로 들어왔다. 미국 이민법이 개정되지 않았다면 그렇게 많은 한인들이 미국에 들어올 수 없었으리라.1971년부터 40년 동안, 많은 한인들이 미국으로 건너왔다.

그래서 LA에 코리아타운도 생겼다. 내 친구는 1971년에 미국으로 들어왔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친구와 함께 출국수속을 했지만 나의 신원조회는 치안본부에서 막히고 말았다.

 

서론이 왜 이토록 장황하냐고 따지실지 모르겠지만, 본론인 친구 이야기를 쓰기 위해서 이정도의 서론이 필요하겠기에 1970년대 당시의 정황을 간단하게 약술했다. 

 

<3>

내 친구는 LA가 아닌 미네소타에 뿌리를 내렸다.

초청자인 그녀의 언니가 미니아폴리스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친구는 197112월부터 눈 내리고 얼음이 어는 미네소타에서 열심히 일을 했다. 멀쩡한 대학을 나오고서도, 문화 창조 클럽에 끼어들지 못하여 단순노동에 종사했다.

한 시간에 5달러를 계산해 주는 공장에서 먼지를 마시면서 일을 했다.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해서 마련한 것이 달랑 집 하나다.

몇 평 되지도 않은 집 하나에 40년이라는 세월을 비벼 넣은 셈이다. 미네소타에서 죽자 사자 일만 하다가 요세미티는 고사하고 샌프란시스코 금문교도 구경하지 못한 채 40년을 보냈다.

백인 남편과 함께 살다가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떴다.

남편이 살아 있을 때, 아이를 잉태해보려고 별별 노력을 다 했지만 이렇다 할 소득이 없었다. 아들도 없고, 딸도 없다. 동토와 다름없는 미네소타에서 늙은 몸을 웅크리고 TV를 벗 삼아 살고 있는 셈이다.

 

 

<4>

미니아폴리스의 친구로부터 LA에 있는 나에게 편지가 배달되었다.털어놓고 속내를 나눌만한 친구 한 사람 없는 미네소타에서 하루하루가 지겹다는 것이었다.허리 닿게 흰 눈이 덮인 겨울이 지겨워서 미니아폴리스에서 더는 살고 싶지 않다고 했다.

편지의 내용인즉슨, 미국을 떠나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이 주제였다.한국으로 갈 때 가더라도 LA는 꼭 한번 다녀가라고 전했다.

날씨가 봄날 같은 LA로 들어와서, 푸른 파도가 넘실거리는 산타모니카도 구경하고, 베니스보다 더 아름다운 베니스비치도 구경하고, 아름다운 명상센터가 있는 레이크 템플도 구경하고, 대학시절에 그토록 좋아했던 북창동순두부도 먹어보라고 했다. 친구는 나의 요청대로 샌디애이고를 거처 LA로 건너왔다.샌디애이고의 시동생이 비행기티켓을 마련해 주어서, 샌디에이고에서 기차를 탄 후 3시간 만에 LA로 들어왔다.

 

<5>

친구의 얼굴은 자글자글했다. 40년 전, 김포공항에서 보았던 그 얼굴은 온데간데 없었다.

잔주름이 온 얼굴을 가득 덮고 있었다. 그녀가 나를 먼저 알아보고 손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만나지 못했을 번했다. 그녀는 아주 낡은 외투를 걸친 채 약간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나를 향하여 걸어왔다. 웬만한 남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당돌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들어오면서 그녀는 지나간 40년의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젊은 백인 남자를 사귀어 결혼을 했다는 둥, 남편이 고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아 대학에 보냈다는 둥, 아이를 가져보려고 온갖 노력을 쏟았지만, 끝내 아이를 갖지 못했다는 둥, 남편이 간경화로 10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는 둥, 별별 이야기를 한꺼번에 털어 놓았다.

다양한 이야기 가운데 백인 남편이 보험을 여럿 들어놓고 세상을 버린 덕택에 간신이 집을 하나 마련했다는 게 중핵이었다. 그렇지만, 집만 하나 덩그렇게 가지고 있을 뿐, 아들도 없고 딸도 없는데, 어떻게 하냐는 것이었다.

그토록 추운 고장에서 남편도 없이 10년 동안이나 어떻게 보냈느냐고 했더니, 그에 대한 대답은 하지 않고, LA 여러 곳을 구경하고 나서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겠다는 말만 반복했다.

한국에는 누가 살고 있느냐고 물었다.

언니의 딸이 살고 있다고 했다.

내 배 아파 낳은 딸도 늙은 엄마를 모시기 싫어하는 판국인데, 조카딸을 어떻게 믿고 찾아가느냐고 했더니, 쩝쩝 입맛만 다셔댔다.

 

<6>

친구와 함께 올림픽과 8가 사이에 있는 벌몬 어원(漁苑)에서 그녀가 즐겨하던 도미스시를 먹고, 가까운 한남체인에 들려서 LA갈비와 몇 가지 생선을 샀다.

친구는 갈비와 생선 요리를 너무 좋아했다. 혼자서 살다보니, 음식을 만들기도 싫고 입맛도 없어서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다음날, 산타모니카에도 가고, 그 인근에 있는 슈라이 탬플에도 갔다. 게티미술관을 보고, 로데오거리도 가보았다.

윌셔 에큐타블 뒤에 자리한 식당에 가서 그녀가 좋아하는 전통 한식도 먹었다. 8가에 있는 할매집이랑, 시온마켓에 있는 자장면 집에도 갔다.

친구는 대단히 유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LA에는 커다란 음식점도 많고 먹을만하 음식들도 지천으로 늘어 있는데, 미니애폴리스에는 한인들이 갈만한 음식점 하나도 없어. 내는 왜 LA에 자리를 잡지 않고 미네소타로 갔었는지 알 수가 없네---"

 

<7>

밤이면,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친구를 설득했다.한국에 가 보아야 한국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던 그런 한국이 아니다.

, 권력, , 정치세력이 판을 치는 난장으로 변해버렸다.

도덕적 진실성이나 순수한 감성적 열정을 노래하던 옛날의 한국에서 벗어난 지 이미 오래다.

한국의 고유문화와 전통사상을 추구하던 옛 한국이 아니라 서구사상과 고유문화를 함께 넣고 비빔밥을 만들어 버려서 무엇이 우리 것이고 무엇이 남의 것인지 판단할 수 없게 된지 이미 오래이다. 더구나 늙은이는 사람값으로 치어주지도 않는다. 한국에 갈 생각은 접고 따뜻한 LA에서 많은 동포들과 어울려 재미있게 살아보자.

구지 미네소타같이 추운 지방에서 살 이유가 없지 않느냐,

미네소타의 집을 정리해서 LA로 이사를 오라고 했다.

미네소타에서 LA까지 자동차로 오려면 3일이나 걸리는데, 이삿짐을 어떻게 옮기느냐고 한숨을 쉬었다.

U홀을 하나 빌리면 그까짓 이삿짐 하나 못 옮기겠느냐고 핀잔을 주었다.

 

 

<8>

친구는 근 열흘 동안 LA 인근의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LAX공항으로 갔다.주름살이 자글자글한 얼굴을 하고, 혼자서 티켓팅을 하는 친구의 모습을 보려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나왔다.40년 전, 젊디젊은 몸, 푸르고 싱싱한 몸을 이끌고 기회가 주어진다는 꿈을 좇아, 거침없이 미국이라는 나라에 왔다가, 고희가 넘은 나이에 남편마저 잃고, 의지가지 하나 없는 늙은 몸이 되어 앞으로 나갈 방향과 목표도 잃고, 대학 4년 동안 그토록 매달리던 지적인 투명성도 상실한 채, 저렇게 방향감각 없이 흐르는 인생으로 전락하여 어디론가 떠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눈물이 절로 나왔다.학창시절, 저 친구는 지적인 투명성을 기하고자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빛나는 감성의 가치를 드높이고자 연극과 영화를 즐겨 보았다. 문학과 철학에 미쳐서, 밤을 밝히며 하이데거를 논하고 칸트를 이야기했다. 앞으로 자기가 걸어야 할 길과 방향은 물론, 자기 관점의 논리화에 일가를 이루고자 했다.

그렇던 그녀가, 빛나던 꿈을 찾던 그녀가, 현실이라는 두꺼운 벽에 부딪혀 저토록 변해버렸구나 하고 생각하니, 참으로 안타까웠다.

 

<9>썬컨트리 항공편을 이용하여 미니애폴리스로 돌아가는 친구를 전송하고 돌아오면서, 나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LA를 떠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LA의 경기가 아무리 좋지 않아도 LA를 떠나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기로 결심했다.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다시 일어서라는 격언처럼, 설사, LA에서 넘어진다 하더라도 LA를 집고 다시 일어서기로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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