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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과 우리가 살았던 시대
05/07/2017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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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의 폐허에서 우리는 이렇게 살아왔다. 

어린 아이에게 먹일 식량이 없어 외국에 입양시키면 그나마 밥이라도 먹겠지하며 입양시킨 부모님들도 많았다. 미워서 외국으로 보냈을까? 귀찮아서 해외로 보냈을까?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속에서 밥이나마 먹으라고 보낸 부모의 마음을 호도하는 무리들아. 


학교에도 못보낸 아이들이 그나마 자기의 입이라도 줄이려고 공장에 와서 일한다. 

가지런히 모아논 신발을 보아라. 시다로 시작하여 실밥뜯고 있는 전태일을 보아라.

노동시장이 열악하고 폐허에 판자촌에서 규제나 규칙도 없이 살아나오려 애쓴 세대들이다.

그리고 5천년을 이어온 가난을 벗어나려고 이끈 박정희 대통령의 결단으로 마침내 우리는 일어섰다.

전태일만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이들의 피와 땀으로 일으킨 대한이다. 수천명, 수만명의 전태일의 열망이었다. 

이 피와 땀이 대한을 좌익에게 넘겨주지 않으려한다. 

이 많은 전태일의 절망과 희망이 대한을 이 자리에 끌고 왔다. 

우리의 피와 땀, 국가에 대한 헌신이 대한을 좌익에게 넘겨 주지 않으려 한다.




16살이라는 나이에 학교를 다닐 수 없는 가정형편 때문에 직장을 구하러 나온 젊은이에게 당시 사회는 일자리를 주었고, 그로부터 3년 만에 월급을 열 배나 받게 해 주었다. … 《평전》에 따르면 전태일은 16살이 되던 1964년 봄 평화시장에서 ‘시다’로 일을 시작해 만 3년 만인 19살이 되던 1967년 봄 ‘재단사’가 되었고, 같은 기간 그의 월급은 1500원에서 15000원으로 정확히 10배 올랐다. 
  
 《전태일 평전》은 전태일이 이로부터 다시 3년 후 1970년이 되면서 재단사 월급 23000원을 받았음도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전태일의 월급은 1964년부터 1970년까지 6년 동안 무려 15배 이상 상승한 셈이다. (이를 두고 과연 누가 착취라는 말을 꺼낼 수 있는가? )

                                 -월간조선 2016.12 ‘전태일 평전의 3가지 함정류석춘

 

경제학자 박기성 교수가 전태일 분신 46주기를 맞아 자유경제원 세미나에서 발표한 글 〈근로기준법이 전태일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에 제시된 다음 인용문이 (착취가 아니었음을 다시 한 번 뒷받침한다.)

〈전태일의 월급 23천원에 12달을 곱해 연봉으로 환산하면 276천원이 된다. 1970년 한국의 일인당 국내총생산은 87천원이었으므로 연봉 276천원은 당시 일인당 국내총생산의 3.2배였다.〉 


*수치상으로는 류석춘교수와 박기성교수의 분석이 맞다. 그러나 시다 일급 50원은 차한잔 값이었고 

 하루의 하숙비는 150원이라는 비교수치가 있어야 하겠다.

 보수건 진보건 있는 사실을 인정하라. 봉건시대의 같은 민족 44%를 노예로 쓴 민족, 일제의 식민지 시절에 배운 

 노예부리기가 오늘날에도 갖은 명목으로 이어지고 있다만, 좌익과 우익은 제 입맛에 맞는 분석만 하고 있다.

 착취를 호도하려는 시도가 또 격렬한 저항을 가져 오리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전태일이 살아온 과정을 눈물없이 읽는 자가 있는 이상, 이 세상은 부끄러움을 배우지 못한 잡인들의 놀이터이다.

   


*전태일은 법은 있으나 법이 적용되지 않는 사회, 

법을 시행하지 않는 국가 공무원들, 

공정과 정의가 없는 사회에 대한 항거였다. 

지금의 폭력 노조는 감히 그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지금의 노조야 말로 법외에 서서 법이 없는 폭력조직, 

노조 자신의 규정조차 시행하지 않는 무리, 

저들 노조원이외에는 공정과 정의가 없는 무리. 

어찌 이런 무리들이 전태일의 이름을 입에 올린단 말인가! 




온갖 혜택을 자기들 손으로 입맛대로 입법하여 즐기는 국회위원들, 

입만 열면 노동자가 대우 받는 세상을 만들겠노라는 정상배들. 

비정규의 하청업자 작업자를 마치 하인처럼 대하는 정규 노조원들,

정부 청사마다 대민창구의 하급 공무원만 바쁘고 뒤에는 할 일없이 빈등거리는 고급 공무원들,

아직도 이 편지가 너희들 가슴속으로 전달되지 않았단 말인가?

대한은 박정희 대통령 이후로 상놈의 근성만이 남았단 말인가?


몇십년전의 이 편지가 오늘에도 전달되지 않았구나.


  전태일(全泰壹, 1948년 8월 26일 ~ 1970년 11월 13일)은 대한민국의 봉제 노동자이자 노동운동가, 인권 운동가이다. 1960년대 평화시장 봉재공장의 재봉사, 재단사로 일하며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였다.

아버지가 사기를 당하여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서울로 올라와 청계천 피복 공장에 취직하였다. 1965년에는 청계천내 삼일회사 재봉사로 일하다가 강제 해고된 여공을 돕다가 함께 해고되었다. 이후 한미사의 재단보조로 있다가 재단사가 사장과의 갈등으로 해고되자, 그가 재단사가 되었다. 1968년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되어 1969년 7월부터 노동청을 방문, 노동자들의 열악한 환경 개선과 위생 환경 개선을 요구하였으나 번번히 거절당했다.

1969년 6월 청계천 공장단지 노동자들의 노동운동 조직 바보회를 결성하고, 다니던 교회와 엠마누엘 수도원 등에서 잡역부로 일하던 중 다시 왕성사의 재단사로 청계천으로 돌아와 노동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동대문구청과 서울특별시의 근로감독관과 노동청을 찾아가 열악하고 위험한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했으나 묵살당했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냈으나 전달되지 못했다. 1970년 10월에는 본격적으로 근로조건 시위를 주도하였다. 11월 근로기준법 화형식과 함께 평화시장 입구에서 온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라이터로 분신 자살하였다. 그의 죽음을 계기로 11월 27일 청계피복노동조합이 결성되었고, 노동 운동이 재확산되었다.

사건 당시 그는 친구 김개남(가명)에게 자기 몸에 성냥 불을 그어 달라고 했고[1], 익명의 친구는 그의 몸에 불을 붙였다. 온 몸에 불이 붙은채 평화시장을 뛰었지만 그는 방치되었다. 병원에 도착한 뒤에도 주사 비용이 필요하여 근로감독관의 보증이 필요하다 했지만, 근로감독관은 보증을 거부했고, 다시 옮겨진 성모병원에서는 가망이 없다는 이유로 그를 3~4시간 방치하였다.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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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시는 대통령 각하

옥체 안녕하시옵니까? 저는 제품(의류) 계통에 종사하는 재단사입니다.

각하께선 저들의 생명의 원천이십니다. 

혁명 후 오늘날까지 저들은 각하께서 이루신 모든 실제를 높이 존경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길이길이 존경할 겁니다. 

삼선개헌에 관하여 저들이 알지 못하는 참으로 깊은 희생을 각하께선 마침내 행하심을 머리 숙여 은미합니다. 끝까지 인내와 현명하신 용기는 또 한 번 밝아오는 대한민국의 무거운 십자가를 국민들은 존경과 신뢰로 각하께 드릴 것입니다.

저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쌍문동 208번지 2통 5반에 거주하는 22살 된 청년입니다. 

직업은 의류계통의 재단사로서 5년의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의 직장은 시내 동대문구 평화시장으로써 의류전문 계통으로썬 동양 최대를 자랑하는 것으로 종업원은 2만 여명이 됩니다. 큰 맘모스 건물 4동에 분류되어 작업을 합니다. 

그러나 기업주가 여러분인 것이 문제입니다만 한 공장에 평균 30여명은 됩니다. 

근로기준법에 해당이 되는 기업체임을 잘 압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근로기준법의 혜택을 조금도 못 받으며 더구나 2만 여명을 넘는 종업원의 90% 이상이 평균 연령 18세의 여성입니다. 

기준법이 없다고 하더라도 인간으로써 어떻게 여자에게 하루 15시간의 작업을 강요합니까? 미싱사의 노동이라면 모든 노동 중에서 제일 힘든(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노동으로 여성들은 견뎌내지 못합니다.

또한 2만 여 명 중 40%를 차지하는 시다공들은 평균연령 15세의 어린이들로써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성장기에 있는 이들은 회복할 수 없는 결정적이고 치명적인 타격인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전부가 다 영세민의 자녀들로써 굶주림과 어려운 현실을 이기려고 하루에 90원 내지 100원의 급료를 받으며 하루 16시간의 작업을 합니다. 

사회는 이 착하고 깨끗한 동심에게 너무나 모질고 메마른 면만을 보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각하께 간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 착하디 착하고 깨끗한 동심들을 좀 더 상하기 전에 보호하십시오. 

근로기준법에선 동심들의 보호를 성문화하였지만 왜 지키지를 못합니까? 

발전도상국에 있는 국가들의 공통된 형태이겠지만 이 동심들이 자라면 사회는 과연 어떻게 되겠습니까? 근로기준법이란 우리나라의 법인 것을 잘 압니다. 우리들의 현실에 적당하게 만든 것이 곧 우리 법입니다.

잘 맞지 않을 때에는 맞게 입히려고 노력을 하여야 옳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 기업주들은 어떠합니까? 

마치 무슨 사치한 사치품인양, 종업원들에겐 가까이 하여서는 안 된다는 식입니다.

저는 피 끓는 청년으로써 이런 현실에 종사하는 재단사로써 도저히 참혹한 현실을 정신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저의 좁은 생각 끝에 이런 사실을 고치기 위하여 보호기관인 노동청과 시청 내에 있는 근로감독관을 찾아가 구두로써 감독을 요구했습니다.  

노동청에서 실태조사도 왔었습니다만 아무런 대책이 없습니다. 

1개월에 첫 주와 삼 주 2일을 쉽니다. 이런 휴식으로썬 아무리 강철같은 육체라도 곧 쇠퇴해 버립니다. 

일반 공무원의 평균 근무시간 일주 45시간에 비해 15세의 어린 시다공들은 일주 98시간의 고된 작업에 시달립니다. 

또한 평균 20세의 숙련 여공들은 6년 전후의 경력자로써 대부분이 햇빛을 보지 못한 안질과 신경통, 신경성 위장병 환자입니다. 호흡기관 장애로 또는 폐결핵으로 많은 숙련 여공들은 생활의 보람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응당 기준법에 의하여 기업주는 건강진단을 시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법을 기만합니다.

한 공장의 30여 명 직공 중에서 겨우 2명이나 3명 정도를 평화시장 주식회사가 지정하는 병원에서 형식상의 진단을 마칩니다. X레이 촬영 시에는 필림도 없는 촬영을 하며 아무런 사후 지시나 대책이 없습니다. 

1인당 3백 원의 진단료를 기업주가 부담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전부가 건강하기 때문입니까? 나라의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실태입니까?

하루 속히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약한 여공들을 보호하십시오. 최소한 당사들의 건강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정도로 만족할 순진한 동심들입니다. 

각하께선 국부이십니다. 곧 저희들의 아버님이십니다. 소자된 도리로써 아픈 곳을 알려 드립니다. 

소자의 아픈 곳을 고쳐 주십시오. 아픈 곳을 알리지도 않고 아버님을 원망한다면 도리에 틀린 일입니다.

저희들의 요구는 1일 14시간의 작업시간을 단축하십시오. 

1일 10시간 - 12시간으로, 1개월 휴일 2일을 일요일마다 휴일로 쉬기를 희망합니다.

건강진단을 정확하게 하여 주십시오.

시다공의 수당 현 70원 내지 100원을 50% 이상 인상하십시오.

절대로 무리한 요구가 아님을 맹세합니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기업주 측에서도 충분히 지킬 수 있는 사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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