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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뉴먼트 밸리(나바호 코드 토커)
03/11/2017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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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아주 특별한 주제인 나바호 코드 토커에 관한 이야기를 전개하기로  하겠다. 

나바호 인디언들은 아직도 자신들의 글을 가지고 있지 않고 구전으로 그들의 언어를 사용한다.


이에 착안해서 나바호 언어를 사용해서 태평양 전쟁때 그들을 통신병으로 활용한 사실이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미국 사람들은 코드 토커에 대해서 지나가는 말로는 들어봤지만, 

코드 토커의 유래에 해서 자세하게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태평양 전쟁 당시 미당국은 나바호어 사용자를 태평양 전선의 미군 통신병으로 배치하여, 나바호어로 

된 암호를 운용하였다. 생소한 나바호어는 나치독일과 일본제국이 수집한 주요 적국의 언어에 해당하지 

않아 보안 업무에 적합하였다. 이들 나바호인 통신병을 코드 토커라고 불렀으며, 종전이 되기 까지 일본은

나바호어 암호를 해독하지 못했다. 미군은 1차 세계대전에서도 쵹타우 족과 코만치 족의 언어를 사용하여 

코드 토커를 운용하였다.





정부의 기숙사 학교에선 그들의 말을 쓰면 벌을 받았고 그들이 살던 주에선 투표권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략 400명의 인디인들이 2차 대전 기간 동안 국가의 비밀 무기가 되었다. 이른바 나바호 코드 토커였다.





이들이 나바호 전지역에서 통신 업무를 완수하기 위해서 입대한 해병대원들이다.





"역사의 이 조각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2차 대전에 정말 엄청난 영향을 미쳤고 우리 모두가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무엇이니까요."라고 캘리포니아주 미라마 미해군 공군 기지의 존 호손 3세 준위는 말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미국의 모자이크를 구성하는 그런  조각중 한 조각입니다. 

그들만의 역사가 아니죠. 우리의 역사이며 미국의 역사입니다.





나바호 코트 토커들은 필립 존스턴이 시작한 기밀 프로그램의 일부였다. 나바호족의 장로교 선교사의 

아들이었던 그는 문자가 없는 나바호어를 구사할줄 아는 소수의 이방인중 하나였다. 참전 군인이었던 

존스턴은 세계 1대전때 군이 소규모로 미국 인디언들의 언어를 이용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1942년 초, 존스턴은 캠프 엘리엇 (現 미라마의 MCAS)의 군 통신 장교 제임스 E. 존스 소령과 만나서, 

군 암호로 나호족의 말을 써보자고 제안했다. 어린 나이에 노출되지 않으면 배우기가 까다롭고 비-나바호어 

사용자들은 이해 불가 라는 것 이었다.   





1942년 2월 28일, 캠프 엘리엇에서 네 명의 나바호인이 20초 안에 메시지를 암호화하고 전송해서 해독하는 

능력을 야전 테스트로 입증했다. 태평양 함대 소속 수륙양용부대의 클레이튼 B. 보겔 소장은 감명받고 해병대 

사령관에게 프로그램의 승인을 요청했다.   





"시연은 흥미롭고 좋았소."라고 보겔은 1942년 3월 6일에 사령관에게 보낸 편지에 썼다. "존스턴 씨는 

미국내에서 지난 20년간 독일 학생들이 드나들지 않은 부족은 나바호뿐이라고 하오. 그들 독일인들은 

미술 학도, 인류학자 등을 가장해 다양한 부족 방언을 연구하였기에 부족말이라면 모르는 것이 없을 것이나 

나바호족만은 예외오. 


이런 이유 때문에 검토 중인 이런 종류의 일에 완벽한 보안 제공이 가능한 유일한 부족이 나바호이오 ... 

방언을 연구한 28명의 미국인 외에는 나바호 방언을 알아들을수 있는 부족이나 사람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으시오. 따라서 이 방언은 적에겐 비밀 암호와 같다고 할수있으므로, 신속하고, 안전한 통신에 

안성맞춤이오." 





해병대는 그 후 두달에 걸쳐 29명의 나바호인을 소집하였고 1942년 5월 4일, 신병들은 기초 훈련소가 있는 

샌 디에고로 가기 위해 아리조나주 포트 디파이언스를 출발했다. 그들만의 소대를 만든 29명은 탈락자없이 

전원이 무사히 기초 훈련을 끝마쳤다. 





그 이후, 해병대는 캠프 엘리엇의 함대 해병 부대 훈련 센터로 직행, 무선 작전과 메시지 전송에 관한 과정을 듣는다.   




나바호 해병대의 29인은 캠프 엘리엇에 있으면서 암호체계를 구상하는데, 그 암호는 알파벳 및 군사 용어에 

대응하는 정확한 대체 구로 된 것이었다. 알파벳은 글자들이 상징하는 단어가 있었다. 예컨데, 글자 A는 "월러치" 

즉 개미, 글자 E는 "쩨" 즉 큰사슴이었다. 군사 용어도 마찬가지로 전투기는 "더허티히" 즉 벌새, 급강하 폭격기는 "지니" 즉 말똥가리였다. 나바호의 작품은 211개의 대체 용어와  구를 담고 있었다. 대체어가 없는 어떤 군사 

문장도 철자로 옮길 수 있었다.  





1942년 7월, 나바호 코드 토커들은 처음으로 야전에서 실험을 했다. 

해안 경비대가 전파를 잘못 듣고 처음 듣는 말로서 적군일수 있다고 보고했다.   





훈련을 종료한 29명의 코드 토커들은 수개의 남태평양행 사단에 나뉘어 배치되었다. 

학교에 남은 몇명은 그 후 캘리포니아주 캠프 펜들턴으로 보내져 새로 입소하는 나바호 해병대를 훈련시켰다.  





각자의 부대에 신고를 마친, 코드 토커들은 남태평양의 과달카날, 부겐빌, 사이판, 괌, 팔라우, 오키나와 섬들의 

전장을 종횡무진했다. 남태평양의 여러 중요하고 치열한 전투중에서도 이오지마는 코드 토커의 경지에 이른  

기량이 가장 잘 발휘된 무대였다. 나바호 코드 토커 여섯 명이 800여개나 되는 전문을 단 한 자의 실수도 없이 

송신했던 것이다.   





"나바호가 아니었다면, 해병대는 이오지마를 차지 하지 못했을 겁니다."라고 전투 전개후 48시간 동안 

그 여섯명의 나바호 코드 토커가 활약했던 제 5 해병 사단의 신호 장교 하워드 코너 소령은 말했다.   





국외로 나간 나바호족은 지속적으로 암호를 개선해 반복성을 피하고 자주 활용되는 단어가 일본군에게 

들키지 않게 하여야 했다. E, T, A, O, I, N, S, H, R, D, L, U같이 흔히 사용되는 철자는 몇 개의 다른 단어가 생겼다. 

총 400개 이상으로 늘어난 구와 단어를 코드 토커들은 암기했다.  





"제가 가진 무기는 제가 가진 언어였던 셈이죠."라고 나바호 코드였던 故 조 모리스 시니어는 

2004년 재향 군인의 날에  샌 버나디노 파크에서 말했다. "우리는 많은 생명을 구했죠."  





2차 대전이 끝난 이후, 코드 토커들은 미국이 다시 암호를 사용하게 될 경우를 대비해서 암호를 

비밀로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리고 한국전과 베트남전에서 작은 규모로 쓰이게 되었다.   





해병대로서의 그들의 존재는 묻혀있다가 1968년 암호가 기밀 해제되면서 처음으로 밝혀졌으며 

1982년 8월 14일 로널드 레이건 前 대통령이 첫번째 나바호 암호병의 날을 선포하면서 뒤늦게 인정을 받게 되었다. 





"지원해달라는 미국의 부름을 받았을 때, 나바호 국가는 전에는 그런 식으로 쓰인 적이 없던 소중한 것들을 

주었습니다. 2차 대전  동안 태평양의 전장 한복판에서 나바호 국가에서 출정한 한 무리의 용감한 남자들은 

암호화 된 그들의 말로써 연합국 승리를 앞당기는데 일조했던 것입니다."라고 레이건은 선언서에서 말했다.

"전쟁의 역사상 아주 간단하지만, 깨지지 않는 암호로 무장한 코드 토커들은 암호 전문가들이 들어본적조차 

없는 음의 소리로 적을 당혹케 했습니다. 2차 대전 동안 해병대의 무전 코드 토커로 나바호 국가의 젊은이들이 

가르쳐준 헌신과 의무에 대한 변함없는 열성은 전 미국인들의 귀감이라 할 것입니다."   





2001년 7월 26일, 29명의 코드 토커중에서 살아 있는 다섯 명중 네 명이 조지 W. 부시 前 대통령으로부터 

아메리카 합중국 의회가 국내외의 민간인에 수여하는 최고위의 상인 의회 금장을 받았다. 나머지 25명의 

코드 토커 가족들은 집에서 받았다. 전쟁 후반에 코드 토커가 된 나바호족은 의회 은성 훈장을 받았다. 

훈장에는 그들의 공적을 나타내고자 무선 통신을 하는 두 명의 나바호 코드 토커가 들어가 있었다. 





"당신 앞에 오늘날 나바호족 코드 토커들을 대표해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은 영광이 아닐수 없습니다."라고 

국회 의사당의 둥근 건물에서 있었던 의회 금장 수여식에서 故 존 브라운 주니어는 말했다. "이런 대단한 

행사는 지금 지켜 보고 있을 수많은 미국의 남녀들의 궁극적 희생만이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절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최초의 코드 토커 29명 가운데, 체스터 네즈, 로이즈 올리버, 앨런 데일 준, 조 파머, 그리고 저. 이렇게 

다섯명이 지금까지 살아 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많은 것들을 봤습니다. 우리는 전쟁과 평화를 

겪었습니다. 우리는 이 위대한 나라가 품고 있는 자유의 가치와 민주주의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코트 

토커로서, 해병대로서 우리의 경험은 이런 것들이 얼마나 깨지기 쉬운지 또한 그것들을 지키려면 얼마나 

불철주야 눈을 부릅뜨고 깨어있어야 하는지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러한 가치 수호가 저희의 역할이었습니다."   





나바호 코드 토커들은 아리조나와 뉴 멕시코주의 선거에 참여할 권리도 없던 때에 그들의 조국에 훌륭히 기여했다. 

그들은 명예, 용기, 헌신, 또한 누구나 자유롭게 살 권리가 있는 아메리칸 드림을 위해 일어섰던 것이다. 





나바호 언어는 영어로는 도저히 똑같은 소리값을 찾을 수 없는 자음들과, 기본적인 4개의 모음을 가진 언어로 

각각의 모음은 비음, 소리의 장단, 성조로 구분된다. 어순은 주어, 목적어, 동사 순이며 동사변화가 굉장히 심한 

언어이다



(나바호 언어를 직접 들어볼수 있는 동영상임)


이 언어는 생소한데다가 발음하기도 까다로워서 과거 미국의 백인들 중에서 이들의 언어를 이해하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미국의 백인들도 이 상황이니 미국 외 다른 나라 사람들 중에는 이 언어를 아는 사람이 아예 없었다.

그래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나바호어 자체를 암호로 활용하기로 하고, 나바호족에게 선교 활동을 하던 

몽고메리 목사를 통해 나바호족 젊은이들에게 입대할 것을 설득했다.

이렇게 입대한 나바호족들은 나바호어에 기초한 암호체계를 만들었고, 이들은 2차대전 중 미군의 암호병·

통신병으로 맹활약하였다. 이들 덕분에 미군이 적국에 기밀을 누출시키지 않을 수 있었다. 또, 나바호족 

병사가 있을 경우 전투 중 고립된 미군 부대끼리 서로가 적군이 아님을 확인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상대방이 미군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때 나바호족 병사로 통신할 것을 요구해서 통신에 성공하면 미군이라고 

판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된 영화로는 "윈드토커가 있다.



http://www.imfdb.org/images/3/31/WindtalkersCover.jpg

윈드토커는 2002년 개봉한 전쟁영화로써  영웅본색으로 유명한 John Woo가 감독을 맡았으며, 
니콜라스 케이지가 주연으로 나왔다. 

태평양 전쟁 당시, 치열한 전쟁 중 하나인 사이판 전투를 배경으로 미합중국 해병대에서 활약한 아메리카 
원주민들 중 하나인 나바호족 암호병들과 그들을 호위하였던 백인 해병대원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나바호 코드 토커 통신병을 지킬 수 없다면 죽여야 한다!

1944년 2차 세계대전. 미국은 일본을 사정거리로 넘볼 수 있는 최후의 고지, 사이판을 점령하기 
위해 모든 총력을 기울인다. 일본군의 치밀한 암호 교란작전으로 고전하던 미군은 복잡한 언어체계를 
지닌 나바호 언어를 이용, 새로운 암호작전을 수립하게 된다. 마침내 미군은 절대 깨지지 않는 암호 
‘윈드토커'를 만드는데 성공하고, 이를 수행하기 위한 나바호족 암호병과 그들을 보호할 특수부대원
들을 사이판 전투에 투입시킨다. 

사이판 전투에서 같은 팀으로 만난 앤더스 중사와 암호병 야흐지. 전쟁의 상처를 안고 있는 앤더스는 
그들의 특수암호인 ‘윈드토커’와 그 암호를 수행하는 암호병 야흐지를 동시에 보호해야할 임무를 
부여받는다. 치열한 격전 속에 그들은 둘도 없는 형제사이로 우정을 쌓아가지만 적에게 암호병이 
적발될 시, 그를 죽여서라도 암호를 사수해야하는 임무에 앤더스는 갈등하게 된다. 과연, 그는 
야흐지를 향해 총구를 겨눌 수 있을 것인가?



영화의 배경인 사이판 전투씬을 위해 제작진은 16,000 평방미터에 달하는 하와이의 거대한 땅을 
영화셋트로 탈바꿈시켰다. 또한 단 한장면을 위해 700여명의 엑스트라와 280여번의 대형폭발을 
시도하는 등 작품의 완성도에 심혈을 기울였다. <페이스오프><미션임파서블2>로 흥행메이커로 
자리매김한 테렌스 청이 제작지휘를 맡았으며 같은 작품을 함께한 제프리 킴벌 촬영감독은 14대의 
카메라, 헬기까지 동원한 다차원 촬영기법을 통해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화려한 스케일의 전투씬을 
탄생시켰다. 또한 <타이타닉>등으로 명성을 떨친 제임스 호너의 웅장한 선율은 스펙터클 화면에 
걸맞는 또다른 감동을 제공한다.

여기까지 내용은 여기 저기 자료를 뒤져서 알아낸 나바호 코드 토커에 관한 것을 정리 한 것이다.

그리고 사진은 두 장소에서 찍은 자료로써 구성하였다. 하나는 모뉴먼트 밸리 비지터 센터에 전시

되어 있는 사진이고 다른 것은  Kayenta라는 도시에 있는 버거킹(Burger King)에 전시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의 비밀 병기 역할을 했던 암호 통신병 ‘나바호 코드 토커(Navajo Code Talker)’의 

마지막 생존자 체스터 네즈(사진)가 2014년 6월 4일(현지시간) 뉴멕시코주 자택에서 향년 93세의 나이로 숨졌다.  

원주민 언어로 암호 … 한국전에도

CNN은 “적군이 절대 해독할 수 없는 암호를 만들어 미국이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원조 코드 토커 29명 중 한 명인 네즈가 숨졌다”고 전했다. 그는 1950~51년 한국전쟁에도 참전했다.


네즈는 2011년 출간한 책 『코드 토커』에서 “폭탄이 떨어질 때도 참호에서 웅크리고 있을 수 없었다. 

물자와 탄약을 요청하고 전략을 주고받은 뒤에야 일본군의 폭격을 피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또 “쉽게 기억할 수 있는 암호를 매일 새롭게 만들었고 실수 하나가 미군 병사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항상 신경을 곤두세웠다”고 밝혔다.


코드 토커들은 사이판·괌 등 태평양 연안에 투입됐고 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엔 300여 명이 활약했다. 

비밀 병기로 불린 그들의 존재와 역할은 미 해병대 병사들조차 모를 정도였다. 68년 미 정부가 기밀 해제 

결정을 내린 뒤에야 세상에 알려졌다. 

사이판 전쟁에 투입된 나바호족 코드 토커와 그들을 지키는 해병대원 간의 우정을 그린 니콜라스 케이지 

주연의 2002년 영화 ‘윈드 토커스’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출처: 중앙일보] 2차 대전 미 비밀병기 '나바호 코드 토커'…마지막 생존자 체스터 네즈 별세



이번 포스팅을 하면서 많은 것을 알게되었다. 전에 '윈드 토커" 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어서 

모뉴먼트 밸리와 무슨 연관성이 있을까 생각했었는데 이번에 그 연관성을 깨닫게 되었다. 


"윈드 토커"라고 하지말고 차라리 "나바호 코드 토커" 라는 이름으로 영화 제목을 만들었으면

흥행에서도 더 줗은 결과가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꼭 보기를 강추하는 영화다.





글 & 사진: Kenny Chi(세울림) 투어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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