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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신용카드
06/12/2018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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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신용카드

 

유병숙

 

 새벽에 울리는 전화벨 소리. 머리카락이 쭈뼛 곤두섰다. 무슨 일일까? 떨리는 손으로 전화기를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시어머니께서 아프시단다. 빨리 노인요양센터로 오라는 복지사의 전갈에 나는 신발을 제대로 꿰지도 못하고 내달렸다.

 어머니는 열이 높아 홍조를 띄고 있었다. 평소 잘 눕지 않으시는 분이 눈을 꾹 감은 채 미동도 않고 누워계셨다. 요양원의 간호사는 해열제가 잘 듣지 않는다며 안타까워했다. 아무래도 병원으로 모시고 가야 할 것 같단다. 위중한 모습에 죄책감이 밀려왔다. 꾹꾹 눈물을 삼켰다. 일각이 여삼추인데 굼벵이처럼 늦장을 부리는 노인전문병원의 응급차가 원망스러웠다.

 어머니의 병명은 폐렴이었다. 밥은 커녕 물 삼키는 것도 힘들어 하셨다. 의사는 노인들의 폐렴은 아주 치명적이라며 입원을 권고했다. 병실을 잡고 링거주사를 어머니 팔에 연결했다. 간신히 눈을 뜨시더니 이내 또 잠이 드셨다. 무의식중에 링거를 뽑을까 우려되어 어머니의 팔을 붙잡고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원무과에서 보호자를 찾았다. 직원은 기다렸다는 듯 진료비 청구서를 내밀었다.

 지갑 속엔 달랑 이천 원이 들어 있었다. 지갑 카드 꽂이를 빼곡히 메우고 있는 은행 신용카드, 백화점 카드, 포인트 적립용 카드 등이 눈에 들어왔다. 이 녀석들은 한 은행의 한 계좌로 묶여 있는 공동체인데 무엇 때문에 색색 가지 다른 색깔로 꽂혀있는 것일까. 갑자기 낯설게 보였다. 그럼에도 모자란 현금을 카드 한 장으로 가볍게 결재할 수 있으니 우선 고마웠다. 게다가 다음 달까지 외상이지 않은가.

 상인들의 사정은 아랑곳없이 껌 한 통을 사도 카드를 내미는 세상이다. 요즘은 오히려 현금을 두둑하게 들고 다니는 사람이 이상하게 보일 지경이다. 세금을 감면해 준다며 적극 사용을 독려하기까지 했다. 음흉한 이 녀석은 매달 많다 적다는 탓 한마디 없이 현금을 한꺼번에 꿀꺽 삼켜버리고 천연덕스럽게 함구하고 있지 않은가. 갑자기 이 무생물이 무정하게 느껴졌다. 나의 모든 씀씀이, 그에 얽힌 사연을 다 알고 있는 그가 아닌가. 그렇다면 묵묵히 견뎌온 세월을 그도 소상히 알고 있을 텐데 위로의 말 한마디가 없었다. 차가운 병원 로비에서 나는 한없이 외로웠다. 과연 어느 카드를 뽑아야 내 마음을 달랠 수 있을까.

 “사인해주세요.”

 직원이 싸늘하게 재촉을 했다. 늘 예외 없는 무채색 말투였다. 갑자기 인연을 맺게 된 이 병원에서 어머니의 병을 치료하는 일 외에 나는 또 무엇을 기대했던 것일까?

신 용카드가 없었던 시절 어머니는 단골 식료품 가게마다 외상장부를 두셨다. 남편의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시아버님의 미각을 충족시킬 고가의 음식재료를 구하기란 턱없이 부족했다. 신혼 때 나는 남편의 월급봉투를 만져본 일이 없었다. 월급날이 되면 그것은 고스란히 어머니의 손에 놓였다. 지금은 은행계좌로 입금되는 월급이기에 내 손으로 직접 받아본 기억이 거의 없다.

어 머니는 그 돈에 맞춰 살림을 꾸릴 수 없었다. 아니 아버님의 고집을 꺾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마음이 얼마나 고달프셨을까. 그때의 나는 어머니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은 재래시장에서도 신용카드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랬더라면 마음고생은 좀 덜하지 않으셨을까?

 따로 써 놓지 않으셨건만 어머니의 계산은 늘 단골집의 외상장부와 맞아떨어졌다. 지금의 은행계좌에서 결재되는 것과 같이 매월 정확했다. 돈만 받아가는 신용카드와는 달리 기분 좋다고 에누리를 해주는 가게 주인도 있었고, 택시 타고 가시라며 교통비를 억지로 주머니에 넣어주는 상인도 있었다. 어머니는 어쩌면 그때 이미 지금의 신용카드보다 인정이 물씬거리는 훨씬 세련된 카드를 지니고 계셨을지도 모른다. 지금처럼 딱딱한 마그네틱 카드가 아니라 써도 써도 닳지 않을 사연을 담은 말랑말랑한 만능 신용카드를. 그 총명한 카드를 나도 한 장쯤 간직하고 싶다. 그 시절 그 따끈따끈했던 카드를 어디 가면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어데예. 어르신이 어디가 어떻게 아프신데예? 아휴 어짜지예.”

 문득 환청이 들렸다. 한때 다니던 재래시장의 생선가게 아주머니 목소리가 귓가에서 맴을 돌았다. 그곳 터줏대감이었던 그분은 늘 환한 웃음을 지으며 가장 물 좋은 생선을 우리 몫으로 남겨두곤 했다. 신혼이었던 그 철없던 때로 다시 돌아가 어머니 옷소매를 살며시 잡고 시장을 한 바퀴 돌아보고 싶다. 한낮에 시장에 내리꽂히던 따가운 햇볕, 상인들의 활달하고 유쾌한 생동감을 담뿍 안아오고 싶다.

 “새댁, 힘들제. 그래 내가 알아 줄끄마.” 그런 위로의 말을 한 보따리 매고 와 어머니의 곁에 풀어놓을 수만 있다면.

 병실로 돌아와 보니 똑똑 수액이 떨어지고 있는 병상에서 어머니는 다행히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고른 숨소리에 안심이 되었다. 어머니의 곱은 손마디를 어루만지며 나는 정으로 수놓아졌던 어머니의 신용카드를 찬찬히 회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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