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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아줌마를 보았습니다.
11/09/2016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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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아줌마를 보았습니다.

  이상렬

대구일보/에세이 마당(2015.4.10)

 

   일정한 공간 안에 가장 밀도 높은 이곳 지하철 안. 오늘은 띄엄띄엄 빈자리가 보입니다. 내 옆자리엔 기왕이면 홀쭉한 사람이 앉았으면 좋겠습니다. 지하철 옆자리, 누군지도 모르는 낯선 사람과 몸 부대끼며 가장 냉랭하게 앉아서 가야하는 자리입니다. 혹여, 덩치 큰 사람이 두툼한 옷까지 입고 앉으면 그날은 꼼짝없이 몸 접고 숨죽이고 가야 합니다. 

   다음 역입니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옵니다. 큰 덩치의 후덕한 아줌마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얼른 고개를 숙였습니다. 어깨에 힘을 주고 다리를 약간 벌렸습니다. 누군가가 털썩 앉았습니다. 저절로 두 손과 다리가 모아집니다. 그 아줌마입니다. 차라리 솜이불에 쌓인 푸근함이라 여기고 잠이라도 청해야겠다는 생각에 눈을 감았습니다  

   가방 속에서 주섬주섬 무엇인가를 끄집어내는 걸 몸으로 느낍니다. 책입니다. 무릎에 펼쳐두고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길 때마다 팔이 내 옆구리를 건드립니다. 싫지만은 않습니다. 자연스럽게 내 시선은 책으로 갔습니다. ‘호밀밭의 파수꾼’ J. D. 샐린저의 유명한 소설입니다. 지하철에서 책 읽는 모습을 본 것이 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이 달라 보이는 건 웬일일까요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 사라진 풍경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가방 받아주는 장면입니다. 예전엔 가방을 든 사람이 옆에 서 있으면 앉은 사람이 으레 가방을 받아줍니다. 받는 사람이나 맡기는 사람이나 응당 안심을 합니다. 그러다보니 흘러내린 김칫국물에 옷 젖은 추억 하나쯤 다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으로 얼굴 붉히며 싸우는 광경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지금이 야박한지 그때가 순박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또 하나는, 책 읽는 모습입니다. 언제부턴가 스마트폰이라는 별스러운 것이 출현하면서 지하철 안에서 신문이나 책을 읽는 사람을 보기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습니다. 폰으로 신문기사를 읽는다고 하지만 내가 읽고 싶은 것이 아니라, 포털사이트에서 제공하는 대로읽게 됩니다. 당연히 자극적이고 더 충격적인 것들입니다. 그러니 깊이는 사라지고 충동만 남습니다. 온통 가볍고 얕은 것뿐입니다. 

   ‘요즘 교실, 기막힌 책따.’ 얼마 전 모 일간지 1면의 보도입니다. ‘왕따가 있듯이 '책따' 란 말이 생겼습니다. , '책 읽으면 따돌림'의 줄임말입니다. 쉬는 시간에 책 읽는 학생들이 왕따를 당한다는 말입니다. "좀생이처럼 웬 독서"냐며 비아냥거리고 독서를 방해한다고 합니다. 취재팀의 설문조사 결과 중학생 10명 중 2명만이 책 읽는 모습이 좋다는 답을 했다니 이 얼마나 가슴 아픈 현실입니까.

  사람은 읽는 대로 만들어진다고 했습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책을 읽지 않는 시대가 가장 암울했습니다. 저는 작은 믿음 하나 있습니다. 인류에게 가장 위대한 스승은 책이란 것 말입니다. 그리고 오늘 아름다움의 관점도 바뀌었습니다. 책 읽는 사람치고 아름답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한편, 왼쪽 옆 자리에 앉은 홀쭉하게 생긴 남녀는 스마트폰에 열중입니다. 화면 속으로 빠져들 기세입니다. 화려한 여러 도형들이 붙었다 사라집니다. 현란한 손동작으로 기계를 다스리고 있지만 그 모습이 더 기계 같습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사람 냄새를 맡고 숨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이 곳. 들리는 것은 톡, , 삐릭, 이런 전자음()뿐입니다. 쉼 없이 오고가는 무의미한 언어들,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게 언쟁을 벌이고 있는 남녀, 어떤 맥락도 없이 네모 세모 모양의 오색 그림이 손안에서 춤을 춥니다. 여전히 침묵이 흐릅니다. 조용히, 핏기 없는 자세로 앉아 있으면서 가장 소란스러운 세상이 바로 이곳입니다. 

   한쪽은 고요한 열정, 또 한쪽은 시끄러운 침묵입니다. 오늘 이 경계에 서서 내가 걸어가야 할 방향을 가늠해 봅니다.  

 아줌마가 또 책장 한 장을 넘겼습니다. 같이 읽자고 내 옆구리를 꾹 찌르는 것 같습니다.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은 아이들을 위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던 소설의 주인공 홀든의 말처럼, 이분이 이곳 지하철 안을 수호하는 지성의 파수꾼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오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줌마 옆자리에 앉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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