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舞/정성희 수필(제2회 천강문학상 수필부문 대상)
03/12/2017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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舞(무)/정성희

 
 
 
화창한 봄날이다. 한 무리의 사물놀이패들이 소고와 장고를 두드리며 겨우내 잠든 대지를 깨우면서 봄의 정취를 재촉한다. 여기저기서 꽃불이 터지자, 봄물에 나들이 나온 구경꾼들이 주변으로 모여든다.


둥둥둥 북이 울리자, 꽹과리를 치며 흥에 취한 상쇠는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며 온몸으로 신명을 몰아온다. 바람의 장단에 몸을 떠는 대나무 마냥 주춤거리던 늙수그레한 노인네들의 소맷자락도 들썩이기 시작한다. 작대기 장단에 영춘가를 부르며 흠뻑 흥에 취한 나이 든 춤꾼들은 땟국에 전 그들의 인생만큼이나 후줄근하고 걸걸한 춤으로 무아지경에 이른다.

 

엎드려 숨죽이고 있던 내 본능도 겨울 문풍지처럼 들썩대며 몸을 보챈다. 그 칭얼대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몸이 시키는 대로 노장들의 원시적인 춤동작을 따라간다. 살아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환희의 춤 자락이 절로 솟구친다. 몸에선 이내 흥건히 땀이 고이고, 정신은 더할 나위 없이 맑아진다.
 


학창시절에도 나는 춤을 좋아했다. 춤을 추고 있으면 찌그러진 청춘이 현란한 빛깔로 되살아나 온 세상을 다 거머쥘 수 있을 만큼 자신만만해졌다. 숨기고 싶은 비밀도 허다했고 내세우고 싶은 욕망도 많았기에, 허풍에 뜬 춤으로 현실을 포장하며 내면의 허술함을 애써 감추었다. 닿지 못할 것에 대한,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갈망은 마음자리를 한층 산란하게 만들었다. 그럴 때면, 잔뜩 힘이 들어간 내면은 어지럽게 요동치는 여울물이 되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마구 몸을 흔들어 댔다. 채울 수 없는 배고픔으로 너덜해진 현실을 성난 투우처럼 몸으로나마 떨쳐내려는 안간힘이었으리라. 그렇게 해서 나는 신체를 매개로 잠재된 주홍빛 인생을 꿈꾸는 연극 같은 춤에 시나브로 젖어가고 있었다.
 


젖무덤이 봉긋해지고 아랫도리에도 물이 오르자, 춤의 관능이 슬며시 다가와 감각의 비늘을 부추겼다. 출렁대는 젊은 육체는 솟구치는 욕망의 허기를 선정적이고 뇌쇄적인 몸짓으로 달랬다. 어깨에서 팔목, 손끝으로 이어지는 체선의 꿈틀거림은 묘한 뉘앙스를 풍기며 도발적인 애욕의 풍광을 연출해낸다. 욕정에 굶주린 춤의 여신은 바다 속 화려한 산호처럼 아름답게 치장하여 교태로운 춤사위로 물고기를 낚는다.

 

안김과 떨어짐이 엇갈린 소연극의 막이 내리자, 인생의 허무함이 밀려오면서 주변의 모든 것들이 허망하게 느껴졌다. 춤을 통해 몸의 언어를 다룰 수 있게 되었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춤은 내 아닌 타인의 삶이었고, 진실이 아닌 나를 감춘 껍데기에 불과했다. 옷가지와 몸매무새를 단정히 하고는 춤을 떠났다.

 

온몸에 대못을 꽂으며 고행의 길을 걷는 수도승마냥, 춤 속에 가려졌던 참나를 찾으러 밤낮을 잊고 세상을 쫓아다녔다. 십 리밖에 가지 못할 현실을 두고 백 리를 가자고 몸을 다그쳤다. 점점 황폐해진 육신은 불만으로 가득 찬 불룩한 아랫배와 언제나 화난 듯한 표정으로 털털대며 쉰 소리를 냈다.

 

그제서야 앞서 간 많은 선각자들이 육체와 영혼의 조화를 이루려고 얼마나 철저하게 자신을 다스려 왔는지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자로 잰 듯 규칙적이었던 생활로 유명한 칸트며 하루의 변으로 건강을 살폈다고 하는 간디를 통해 함부로 몸을 다루거나 지나치게 탐닉해서도 아니 됨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몸의 소리에 귀 기울일 즈음, 나는 다시 춤을 추었다. 껍질을 깨고 탄생하는 새처럼 춤의 영혼이 오랫동안의 침묵을 접고 제 존재를 알려왔다. 이전과는 다른 춤이었다. 화를 삭이고 갈망도 가라앉히니 춤추는 자세도 새로워졌다. 마른 풀내음 같은 은은한 춤의 향기가 심연으로부터 조금씩 전해져 오면서, 내 몸은 무욕으로 점차 가벼워졌다.

 

옛말에 ‘응마주색난석(鷹馬酒色?石)’이란 금언이 있다. 청년기에는 매사냥과 말 타기를 즐기고, 중년기에는 여자와 술을 가까이 하다가, 장년기가 넘어서면 자연을 곁에 두고 지켜보면서 천지의 고요함을 깨닫게 된다는 뜻이다.

 

책가방을 들고 다니던 시절, 나는 코브라처럼 고개를 치켜들고 시끄럽게 춤을 췄다. 몸과 마음에 힘이 잔뜩 들어간 채로, 세상을 향해 굽히려 하지 않았다. 경쾌한 스타카토에 맞춘 어린 춤꾼의 날렵한 몸놀림새는 미끄러지듯 솟구치는 대왕뱀 만큼이나 신출귀몰해서 세상을 감쪽같이 속일 수 있었다.


 
상큼한 미소가 앙증맞던 젊은 초여름 밤엔 불빛을 쫓는 나방이 되어 매끈하게 춤을 추며 화려한 색상을 띤 날갯짓으로 분진을 마구 쏟아냈다. 겉치레가 야단스러울수록 춤은 천박하기만 했다. 그것이 허망한 찰나요 부질없는 가식이었음을 그때는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가을이 무르익어서야 내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더 이상 주위를 의식할 필요도 없어지니, 소박하고 단순한 움직임이 좋아졌다. 화려함을 걷어낸 단아한 몸짓에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넓은 품새를 담아낼 수 있게 되었다. 무(舞)는 무(無)이어야 춤의 진정한 자유를 맛보며 자연인으로서의 참나를 발견할 수 있다는 옛 춤꾼들의 몸 언어에 비로소 눈뜨게 되었다.
 


가식의 춤을 벗어던지고 상쾌한 바람을 들이마시며 양팔을 위로 쭉 뻗고 고개를 뒤로 젖혀 자연의 흐름을 바싹 따라간다. 모를 심는 농부들의 팔놀림이나 길 위를 걷는 사람들의 발놀림과 같은, 주변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상적인 동작이 춤의 언어가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춤은 곧 자연이고 자연은 거짓 없는 본성이며, 그 본성대로 사는 것이 가장 자유로운 삶이라는 것도 덤으로 깨우치게 되었다.
 


일본의 전위무용가 카와무라 나미코가 생각난다. 일흔을 넘긴 나이에도 그는 딱딱한 시멘트 공간의 인공적인 조명을 벗어나 산이나 들 위를 걷는 행위로서 자신의 춤 세계를 보여준다고 한다. 거기에는 그 어떤 인위적인 안무도, 요란한 의상도, 분장도 없다. 그저 자연과 하나 되어 거니는 게 전부이다. 이런 단순한 움직임에도 그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그의 몸이 마치 영령이 깃든 신목처럼 경건하게 느껴진다고 한다. 아마도 육신과 영혼의 균형을 이룬 삶의 진실성이 춤 속에 스며들어 관객들을 이토록 흔들어놓지 않았나 싶다.
 


요즘은 춤의 홍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온통 춤판이다. 인터넷 동영상 게시판에도 클럽 마니아의 춤이 난무한다. 꽃은 그릴 수 있으되 향기는 담을 수 없듯이, 이러한 춤에는 자연을 닮은 고요한 무념의 여백이 느껴지지 않는다.

 

진정한 춤은 영혼이 깃든 가슴으로 춰야 그 깊이를 더해 가거늘, 반들반들하게 기계로 뽑아낸 것 같은 기교에 넘친 춤은 겉만 번듯한 볼거리에 불과하다. 펄펄 끓는 뜨거운 물로는 차 맛을 제대로 우려내지 못하듯, 춤이 향기롭게 익는 데도 세월이 어느 정도 식혀져야 하리라. 이로 보아 현란한 빛깔로 출렁대는 춤만이 아름다운 모습은 아닐 성싶다. 화려한 장식이나 군더더기를 걷어낸, 아무 맛도 없는, 그저 그런 덤덤한 춤에서 외려 삶의 향내가 물씬 풍겨 나온다.

 

어느새 춤판이 무르익어, 꽹과리소리가 사방으로 부서지고 있다. 그 위에 춤을 추는 듯 아니 추는 듯, 움직이는 듯 움직이지 않는 듯 기교도 없고 격정도 없는 늙은 춤꾼들의 춤사위가 쉼 없이 이어진다. 다듬어지지 않아 투박하고 촌스럽기는 하지만, 가식이 없어 더 정감이 배어난다. 사뿐히 들어 올린 소맷자락으로 고요의 멋이 엿보인다. 삶의 무게가 더해질수록 춤은 저리도 깊어지는가 보다. 오래 묵은 농주처럼 결이 삭은 뒤에 우러난 인생의 씁쓸한 맛이 춤을 저토록 깊고 오묘하게 만드는가 보다.

 

뒷줄에서 구경하고 있던 아낙네들도 주위를 의식하지 않고 엉덩이를 실룩대며 덩실거리고 있다. 나도 덩달아 히죽대며 춤마당으로 들어가 그들과 합세한다. 얼씨구절씨구 생짜로 뱉어내는 춤꾼들의 추임새는, 육(肉)과 혼(魂)을 한데로 묶어 서로간의 어색한 관계를 누그러뜨리고 마음의 물길을 열어, 얽히고 뒤틀린 심신의 매듭을 풀어준다. 또한 그것은 자신을 비워내어 작아짐으로 해서 즉흥적인 독무(獨舞)가 아닌 전체로서의 나를 마주 보게 한다.

 

춘삼월 파릇한 봄 햇살 위에 깊고 구수한 할미꽃 춤이 내 마음에도 살포시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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