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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장대(輪藏臺)
06/13/2018 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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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장대(輪藏臺)

- 아릿한 손빛을 어루만지다.

 

양성은

2017년 경북문화체험 전국 수필대전 금상 수상작

 


 

  바람을 느꼈다. 아직 열기를 머금은 여름대지와 때 이른 가을하늘 사이로 바람이 지나갔다. 바람이 닿지 않는 곳이 있을까. 하여 티베트인들은 바람을 타고 목소리가 전해진다고 믿었다. 바람 뒤를 가만히 따라가 보았다. 바람은 용문사 회전문을 통과해 마당을 가로지르고 단숨에 돌계단을 오르더니 대장전(大藏殿, 보물 제145) 안으로 성큼 들어가 버렸다.

  일요일, 해 저물 무렵의 법당은 적요했다. 가빠진 숨을 가다듬고 아무도 없는 법당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온 몸의 무게가 한 발에 실렸고 낡은 마룻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법당전체가 흔들리는 듯 했다. 살금살금 뒤꿈치를 들고 걸어 보았지만 비워내지 못하여 무겁기만 한 몸짓은 숨겨지지가 않았다. 가지런히 무릎을 꿇고 앉아 바람이 남기고 간 흔적을 살폈다.

  목조아미타여래삼존불좌상과 목조아미타여래설법상(보물 제989)의 은은한 금빛 기운은 마음을 평안하게 만들었다. 목각탱 가운데 정좌한 아미타불의 불법(佛法)에 귀를 기울였다. 8대 보살과 양대제자가 만물의 성불을 염원하며 아미타불을 보좌하고 있었고, 사천왕은 삿된 기운을 걸러내려는 듯 큰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아미타불이 머물고 있다는 서방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는 어디에 있는가. 무지한 눈과 귀로는 어떤 깨달음도 얻을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수행도 하지 않고 극락에 사로잡힌 어리석은 자여 미망에서 벗어나라. 머리 위 찬란한 금빛만 동경하지 말고, 몸을 낮추어 공덕을 쌓아라.’

  숨죽이고 지켜보던 존재들이 소리모아 외쳤다. 그제 서야 우물천정을 날고 있던 날짐승들과 동서남북을 수호하던 사방신, 용과 봉황, 원숭이까지 대장전을 가득채운 존재들이 눈에 들어왔다. 긴 세월동안 비범함을 뽐내지 않고 기꺼이 대장전의 일부로 녹아든 그들은 이미 극락에 도달했을지도 모른다. 이 안의 존재 가운데 사바세계를 떠돌고 있는 것은 오직 나 하나이던가. 하여 법당을 찾은 수많은 불자(佛子)들이 업을 떨치기 위해 엎드렸을 그 바닥에 홀로 허리를 세우고 앉은 것인가. 바람은 어디에 숨었는지 흔적이 없었다.

  불현듯 어떤 깨달음이 찾아 올 때가 있다. 항상 존재했지만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것을 직시하는 순간, 열반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부처가 되면 찰나(刹那)에 영원(永遠)을 읽어낼 수 있고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어디에나 있으며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 순간의 통찰은 불자만을 찾지 않는다. 때로는 오래된 것들 안에 숨겨진 이야기를 엿듣고 싶은 호기심과 학교를 졸업하고도 끝내지 못한 공부(工夫)를 핑계 삼아 성지(聖地)를 활보하는 무도한 관광객에게 허락되기도 한다. 윤장대 안, 경전 속에서 바람이 속삭였다. 윤장대를 돌리기만 하면 눈을 가린 업장을 걷어주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세상에 쉬운 수도란 없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삼존불과 목각탱이 안치된 불단 좌우에 윤장대가 있었다. 윤장대(보물 제684)는 경전을 보관하는 서가를 말하는데 천장과 바닥에 연결된 회전축을 중심으로 돌릴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팔각지붕 아래를 촘촘하게 장식하고 있는 공포가 화려했다. 바라보는 오른쪽 윤장대의 빗살문, 격자문은 양()의 힘을 왼쪽의 윤장대의 연어문, 국화문, 모란문은 음()의 부드러움을 품고 있었다. 옛 사람들은 원이 있으면 어느 때고 이 윤장대를 돌렸겠으나 지금은 음력 33일과 음력 99일에만 가능한 일이었다. 탑돌이 하듯 윤장대 주변을 몇 바퀴 돌았다. 최초의 아름다움을 느끼기엔 충분했지만 시간을 이기지못한 채 퇴색된 기색이 역력했다. 대조적으로 윤장대 손잡이만은 나뭇결 그대로 반짝였다. 수많은 이들의 손을 타서 만들어진 손빛이었다.

  손잡이에 어린 손빛을 어루만졌다. 언제 저 손빛이 흐르던 물건을 본 적이 있었는데. 성모상 앞에 놓여 있던 어머니의 나무묵주가 그러했던가. 스무 살 무렵, 나는 이유 없는 고열에 시달렸고 가위에 눌리거나 다리에 쥐가 나서 잠을 설쳤다. 그때마다 어머니의 품을 파고들었다. 어머니는 잠이 들 때까지 나를 어루만졌고 내가 잠이 들고 나서도 오랫동안 성모상 앞에서 묵주기도를 하셨다. 의학과 종교로 해결되지 않는 자식의 문제 앞에서 어머니는 몸을 엎드려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나를 쓰다듬어 주셨다. 불명열(不明熱)을 벗어나는 동안 어머니는 시들어 갔고 나는 점점 생생해졌다. 묵주는 손때가 묻어 더욱 반들거렸다.

  어머니에게 심오한 학문이나 종교적 깨달음이 있었으랴. 어머니의 손길과 기도가 의사의 처방과 신부님의 말씀보다 못하다고 단정할 수 있겠는가. 그 시절 민초들은 온 몸으로 윤장대를 돌렸을 것이다. 그들의 수도가 스님의 성취와 비교할 수 있는 문제이던가. 밥 벌어 먹기 어렵던 중생들이 일을 하다 헐레벌떡 뛰어와 윤장대를 돌렸다하여 그 마음을 폄하한 나의 무지함이 부끄러워졌다. 부처님의 말씀은, 극락은 학문의 깊이나 종교적 성취와 상관없이 바람을 타고 온 세상에 전해지는 것이었다.

티베트인들은 부처님의 말씀이 바람을 타고 온 세상에 전해진다고 믿는다. 계곡사이 강풍으로 흔들리는 다리 위에 오색 타르초를 묶어 둔다고 한다. 그 바람이 이리로 와서 나를 윤장대 손빛 앞으로 이끌었었던가. 내가 쓰다듬고 있는 것은 어머니의 지극한 기원인가, 부처님의 말씀인가. 혹은 극락의 빛인가. 나에게는 그것들이 모두 똑같이 느껴졌다. 날이 저물 때까지 한참동안 윤장대 손빛을 어루만졌다.

  다시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이끄는 데로 나는 천천히 세상을 향해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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