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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가정대학 나온 여자야 "
01/10/2015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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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가정대학 나온 여자야 "
                                                                                                                       
                                                                         수필가/이정아

대학 졸업반인 조카를 작년 12월 한국에서 만났더니, 입사 시험을 치른 무용담을 이야기하기 바쁘다. 한국의 유수 대기업은 모두 면접을 보러 다녔단다. 

신촌의 여대를 다니는 조카에게 면접관들은 하나같이 "나 이대 나온 여자야"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더란다. 하도 여러 번 같은 질문을 받자, 공연히 화가 나서 왜 회사마다 그런 유치한 질문들을 하시느냐고 따졌단다. 긍정적인 뜻이 들어있지 않아 학교에서도, 학생회에서도 삼가는 말이라 했다나? 그걸 계기로 면접관과 여러 대화가 오가고 조카는 그 회사에 합격이 되어 연수 중이다. 

오래 전 '타짜'라는 영화에서 도박판을 벌이다 감옥에 가게 된 정마담의 대사로 유명했다. 그래서 이대 나온 여자건 아니건 장난삼아 많이 쓰던 유행어였다. 요즘도 동창끼리 만나 실수 했을 때 "왜 이래, 나 이대 나온 여자야" 하면 웃음으로 서로 용서가 되기도 한다. 

이대에서는 그 유행어를 방송에서 쓰지 말아 달라고 청했다고 한다. 그런다고 사람들이 쓰지 않을리 없지만 그 유행어가 좋지 않은 일에 변명으로 쓰일 때가 많고, 내 세울 것 없는 이가 학교에 묻어가는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길 수 있어서 졸업생들은 쓰기에 조심스럽다. 

나는 그걸 변용해서 "나 가정대학 나온 여자야" 버전으로 자주 쓰곤 한다. 형편없는 살림솜씨에 놀라는 남편에게 "네가 살림을 알아?" 이런 뜻으로 읊조린다. 나의 요리 실력에 의문을 표하는 아들에게도 "나 가정대학 나온 여자야"를 써서 군말 말고 먹기를 강요한다. 사실 가정관리 전공에 식품영양학 부전공을 한 가정주부가 몇이나 있겠는가 말이다. 평생 '수퍼 을'의 위치로 살아온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갑질'이다. 

며칠 전 교회의 식사 총괄 장로님이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오셨다. 집사님 구역이 새해 첫 식사당번인데 괜찮으시겠어요? 걱정 마세요 어차피 돌아올 당번인데요 뭘. 아니 첫 주여서 떡국을 온 교인에게 대접해야 해서요. 1, 2, 3부 모든 교인에게. 글쎄 괜찮다니까요. 하도 못미더워 하시기에 "저 가정대학 나온 여자예요"했더니 농담이 아닌데 모두 웃었다. 

정작 가정대학 운운하던 나는 한 박스의 파를 썰 때 거들었을 뿐이고, 고기를 잘게 썰었으며 고명으로 김 가루를 뿌렸을 뿐이다. 모든 구역 식구가 합심해서 600인 분의 떡국을 성공적으로 끓였다. 모두에게 칭찬 받은 맛을 책임진 집사님은 식당 경험이 많으신 분이었다. 그러게 책상머리 공부는 별 소용이 없다. 

가정학이라는 학문은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는다. 졸업생들의 연판장 서명에도 불구하고 모교에서는 폐지되었으며, 그 대신 공대발전에 중점을 두기로 했다나? 여대에 공대라니 낯설긴 해도 조카는 공대 전자공학과 출신으로 취직도 척척이니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비록 식구를 대상으로 한 '갑질'일망정 더 이상 "나 가정대학 나온 여자야"는 먹히지 않게 되었다. 나의 어설픈 '갑질'과 새해엔 작별을 고하는 바이다.
 
 


미주중앙일보[이 아침에] 1월 10일 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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