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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포트 하나, 냄비 하나
01/02/2019 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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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포트 하나
                                                                                     허세욱

스탠포드 캠퍼스에선 후버 타워의 종이 시간마다 쟁기질했다. 처음 울릴 때부터 조신스러웠지만 그 여운도 길고 아련했다. 마치 보리밭 긴 긴 이랑 끝으로 사라지는 뻐꾸기 나른한 울음 같았다. 그 종소리가 여섯 번 울리면 배가 고팠다. 그리고 주섬주섬 책상을 정리하곤 연구실 문을 나섰다. 찰그락 잠기는 소리가 기다란 복도를 흔들었다.

연구실 뒷마당에서 내 자전거를 끌고 나왔다. 고물 자전거는 삐그적거렸다. 캠퍼스 동남쪽엔 작은 구능이 있었고 그 구능엔 교수들의 주택이 마을을 이루었다. 종교학 교수의 집 차고 옆에 달린 행랑방을 빌려서 한여름을 나기로 했다. 허름한 목조 건물인 데다 동쪽과 남쪽이 빽빽한 정원수라서 짙은 잎 냄새에 꼬리한 곰팡내까지 배여 있었다.

자전거를 몰면서 널찍한 캠퍼스를 가로 지를 때 내 코에는 그 곰팡내가 들렸다. 뒷문을 열고 차고를 지나 묵직한 도어를 열면 거기 아늑하게 고여 있는 적막이 좋았다. 나는 그때마다 꼭 들르는 곳이 있었다. 교수 마을 어귀에 있는 슈퍼마켓이었다. 거기서 짠 반찬 한 가지에다 생선 한 토막 아니면 채소 한 개쯤 사는 일이었다. 생선이라면 허옇게 씻어 놓은 삼치나 병어 따위의 것, 비리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그것 한 토막 잘라서 하얀 랩에 싸고, 채소라면 가지나 애호박 하나 달랑 손에 들었다. 그리고 흔들흔들 자전거를 밟았다.

나의 가재도구란 간단했다. 옛날 쓰던 트렁크 달랑 한 개였다. 그 속에 옷가지 두어 벌에 문필 도구, 아내가 싸 준 생김 몇 톳에 커피 볼트 달랑 한 개였다. 당초 자취할 생각은 없었다. 커피 포트는 잠이 오지 않는 밤 커피를 끓이기 위한 세간이었다. 연구실에 밤이 오면 저녁 먹으러 패로앨토 시내까지 오고 가기에 불편했고, 거기 먼 길을 가보아야 울긋불긋 냉물 접시에 정내미가 떨어졌다. 별수 없이 저녁 한 끼는 자취를 하기로 했다. 부엌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었다. 커피 포트를 밥솥 겸 냄비로 썼다. 숙소에 들자 커피 포트에 쌀 한 공기를 씻었다. 손등에 물이 잠길 만큼 물을 부었다. 그리고 전기를 꽂았다. 4, 5분이 지나자 철썩이는 파도 소리가 들렸다.

나는 커피 포트에 달렸던 거름종이 비슷한 양철 종지에 큼직큼직 애호박을 잘랐다. 뚜껑 사이로 부연 밥물이 피식 피식 새어나왔다. 양철 종지를 그 위에 올렸다. 또 3, 4분이 지나자 냄새가 좋았다. 고소한 밥 냄새에 파릇한 호박 냄새가 범벅되었다. 또 한 가지 일이 있었다. 벽장에서 김을 서너 장 꺼내곤 그걸 손바닥 절반 크기로 조심조심 찢었다. 아직도 뜸을 들이러 10분은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반시간 부산을 떨다가 드디어 상을 차렸다. 책상 위에 커피 포트를 좌정하곤 양철 종지를 들어 올리자 은빛 쌀밥이 송골송골 키를 세우고 있었다. 호박은 샛노랗게 익은 채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거기다 조금 맛소금을 뿌렸다. 원고지 위로 살포시 김을 내놓고 식초에 절인 물오이 서너 쪽을 호박나물 옆에 곁들였다. 그리고 텔레비전을 틀었다.

서울을 떠날 때, 수저와 젓가락을 챙기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스푼과 포크로 대신했다. 까만 김에 하얀 밥을 작은 만두처럼 말아서 퐁당 입 안에 투입할 때 묘한 성취감이 일었다. 거기다 사각사각 호박 나물 한 입에 시큼한 피클 한쪽을 살짝 밀어 넣으면 신, 산, 함, 고, 감 등 다섯 가지 맛이 절묘하게 어울렸다. 나는 노릿노릿한 커피 포트의 누룽지를 샅샅이 긁었다. 물도 불도 안성맞춤이었던 모양이다. 누룽지가 없는 날은 일단 실패작이었다. 나는 거기에 물 두 컵쯤 넉넉히 부었다. 다시 전기를 꽂았다. 거기서 피리 소리가 울릴 때까지 나에겐 따로 잔 일이 있었다. 양철 종지를 깨끗이 씻고 오이절임은 마개를 꼭 틀었다. 선 채로 숭늉을 마시고 누룽지 한 알도 남기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물을 붓고 설거지의 대미를 장식했다. 스위치를 뽑고 커피 포트를 거꾸로 들고 사래질을 치다가 세면대 위에 얌전히 엎어두었다. 성당에서 신부가 미사를 마치고 성찬을 나누고 그 제기를 씻고 닦아 제단을 치우듯 말이다.

이렇게 나의 한 시간은 즐거웠다. 미국에서 살아가는 한국제 5장6부에겐 더없는 친절 봉사였고, 해 지고 땅거미 내리는 어스름 저녁이면 둥지로 돌아가고플 때, 그 절절한 귀소의 본능을 달래는 방법이기도 했다.
벌써 십여 년 전의 일이었다. 달랑 커피 포트 한 개가 주방 전부였던 세월이 울컥 그립다. 지금도 언젠가 훌쩍 집을 떠나서 천산산맥 어느 등성이에 책력 없이 숨고 싶다. 그때 내 행장에 커피 포트 한 개 넣고 싶다.

『한국의 명수필』 피천득 외 지음. 손광성 엮음
2013 을유문화사


‘커피 포트 하나’ 를 읽고 /이정아 감상 수필

허세욱(許世旭, 1934년 7월 26일 ~ 2010년 7월 1일)은 대한민국의 중문학자이며, 시인이자, 수필가, 대학교수이다. 전라북도 임실군 출신이다. 1959년 한국외국어대학 중국어과를 졸업하였고, 1963년 타이완으로 건너가 대만 국립사범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1968년 중국문학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9년 시집 <청막>으로 등단하였다. 한국 외국어대학과 고려대 교수를 역임하였다.

허세욱의 <커피포트 하나>는 그의 방문교수 시절낡은 트렁크 하나와 커피포트 달랑 한 개로 외국생활을 하던 이야기이다. 연보로 보건대 1983년과 1984년도 외대 중문과 교수시절, 미국에 방문교수로 가셨을 때의 이야기인 듯하다.

"부엌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었다. 커피포트를 밥솥 겸 냄비로 썼다. 숙소에 들자 커피포트에 쌀 한 공기를 씻었다. 손등에 물이 잠길 만큼 물을 부었다. 그리고 전기를 꽂았다. 4,5분이 지나자 철썩이는 파도 소리가 들렸다."

가난했던 시절에 달랑 하나 가져간 커피포트의 역할, 그 작은 사물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는 눈길이 빛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선 채로 숭늉을 마시고 누룽지 한 알도 남기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물을 붓고 설거지의 대미를 장식했다. 스위치를 뽑고 커피 포트를 거꾸로 들고 사래질을 치다가 세면대 위에 얌전히 엎어두었다. 성당에서 신부가 미사를 마치고 성찬을 나누고 그 제기를 씻고 닦아 제단을 치우듯 말이다.”

설거지를 신부님이 제기 닦듯 정성을 기울인 교수님. 정갈한 삶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식사 준비에서 설거지 까지 소홀히 하지않고, 그 의식이 오히려 재미있었다는 고백에서 아름다운 삶의 모습이 그려진다.

결핍속의 소박한 행복을 놓치고사는 우리들에게 부족한 삶도 행복일 수 있다는 걸 깨우쳐준다. 가난은 조금 불편한 일이지 불행한 일은 아니지 않는가?

오늘도 완벽과 완전, 최고와 최선, 효율과 효과만을 따지던 어리석은 하루를 반성하게 하는 글이다. 내일 아침, 해가 밝고 나면 다시 오늘과 같은 척박하고 다급한 내일을 살겠지만 ‘커피포트 하나'에 밥을 지어드시던 허세욱 선생님의 정신. 소박함, 절제, 정직 그게 수필의 정신 일지도 모른다.

냄비 하나
이정아

오래전 미국에 올 당시,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말들이 있었다. 와보니 맞지 않는 정보가 더 많았지만 이런 거였다. ‘미국대사관의 비자를 받으려면 인터뷰 때 한복을 입고 가면 비자가 잘 나온다.’ ‘미국에선 파티가 종종 있으니 파티용 한복을 지어가라.’  ‘미용비가 비싸니 헤어 컷 기술을 배워가라.’는 것 등이었다.

 지금부터 33년 전이니 인터넷도 발달하지 않았고 사람들의 통행도 번잡하지 않을 때여서 그 걸 다 믿었다. 도리가 없지 않은가? 미국대사관에 한복을 입고 가서 인터뷰했다. 공부하러 가는 남편을 따라가는 것이니 학교의 입학 허가서를 지참해 보이기만 하면 결격사유가 없었다. 공연히 한복을 떨쳐입고 가서 우스운 꼴만 된 셈이다.

그 당시 한국에선 유학생 가정이 1년에 1만불만 가지고 나갈 수 있었다. 쪼개어 한달에 800불 남짓으로 살아야했다. 기혼학생 아파트 월세 250불 내고나면 500여 불로 한달을 살아야했으니 되도록이면 한국에서 모든걸 공수해왔다.

미국살이 첫날, 배로 부친 짐은 아직 당도하지 않았다. 혹시몰라 이민가방에 넣어 가지고 온 코펠 하나가 유용하게 쓰였다. 식탁대신 종이 박스위에 상을 펴고 코펠로 밥을 짓고 찌개도 끓이고 코펠 뚜껑으로 커피도 마셨다. 남대문시장 등산용품점에서 사온 코펠은 오랫동안 우리 가정의 유일,만능조리기구였다.

 파티용 한복은 친정엄마가 특별히 신경을 써서 색색으로 다섯 벌이나 새로 지어왔건만, 우리가 살게 된 텍사스 주립대학이 있는 도시 오스틴(Austin)은 찜통더위여서 한 번도 한복을 입고 가는 파티가 없었다. 그곳은 도시 전체의 유니폼이 반바지에 티셔츠이다. 그 한복들은 이곳 엘에이까지 가져와 입어보지도 않은 채 교회의 거라지 세일에 기증하여 팔려 나갔다. 아마 어느 히스패닉 가정의 커튼으로 쓰이고 있지나 않을까?

 루머중 하나 들어맞는 것은 미용기술을 배워가라는 것이었다. 맥도날드의 '빅 맥'이 99전 일 때였는데, 그것도 비싸서 안 사먹던 유학생 시절이었다. 그러니 당시의 헤어 컷 비용이 5불이었어도 엄두가 안 났다. 솜씨 좋은 유학생 부인들끼리 서로 모여서 퍼머도 하고 커트도 하였다. 모든 한국 유학생이나 가족들은 헤어스타일이 비슷할 밖에. 지금 그 당시의 사진을 보면 무척 촌스럽다.

 이야기가 곁길로 가지만, 부인들은 가내 봉제업도 했었다. 여고동문이나 대학 선후배 사이인 유학생 부인들이 큰 상에 둘러앚아 인형을 만들었다. 인형의 몸통에 젓가락으로 솜을 집어넣으며 비싼 노동력들이 미국에 와서 고생한다고 쓴웃음을 짓곤 했다. 영락없는 달동네의 풍경이었다. 그래도 비슷하게 어려울 때이니 부끄럽지 않았다. 오히려 바느질을 하면서 수다 떨고 밥도 함께 지어먹으며 놀이삼아 일했다.  

 이민자의 필수코스인 남청여바(남자는 청소,여자는 바느질)을 경험한 것이 학위를 받은 듯 든든하다. 어떤 어려움도 다 견디어 낼 수 있다는 라이센스를 받은 것 같기에 말이다. 요즈음 돈을 싸들고와 흥청대는 철 없는 이민자들을 보며 '젊어 고생은 자산’이라는 말을 실감한다. 그때의 우리들이 자급자족하던 어려운 유학생활의 마지막 세대가 아닌가한다.

 한국을 떠나온지 33년이 되는동안, 동창들은 모두 사회의 지도층으로 자리잡고 부와 명예를 누리는 듯 보인다. 가끔은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이있다. 한국에 그대로 살았더라면 하고 상상의 나래를 펴기도한다. 하지만 인생의 행로엔 늘 선택의 기로가 있는 법이 아닌가? 삶을 저울에 달아 행복지수를 알아내긴 어렵다. 산다는 건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에 와 살면서 많이 누리기도 하였지만 놓치고 산 것들이 있다. 부모,형제,친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간절하다. 그 생각을 하면 늘 명치아래가 저릿하다. 그 아련한 아쉬움을 글로 풀어내는 삶을 살고있으니 아마도 이런 것이 팔자인지 모르겠다.

아직도 우리집 창고에 남아있는 낡은 코펠 한세트는 이민 초기의 어려웠던 삶을 돌아보게하는 소품이다. 초심이 들어있기에 버리지 않고 함께 살았다. 그 첫마음처럼 남은 날도 성실히 살아야겠다.

한국수필 2019년 1월호 / 추억의 명수필, 감상,같은 제목 나의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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