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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보내준 내복/이정아
01/24/2020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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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보내준 내복

이정아

한국에서 아들아이의 결혼 피로연을 하기로 날짜가 잡혔다. 그 며칠 전 친정엄마가 저혈당 쇼크로 쓰러지셨다고 연락이 왔다. “할머니는 참석 못하실지도 몰라.” 했더니 아들은 서운해한다.

피로연 당일, 정신이 맑지 않은 상태로 동생이 부축하여 엄마는 오셨다. 지팡이를 짚고 한걸음 한걸음 힘들게 걸음을 옮기다 손자를 보더니 이름을 부르고 눈을 크게 뜨신다. 마치 용궁에서 심청이 만난 심봉사처럼. 온 가족이 둘러서 있다가 박수를 쳤다. 그런 기적 같은 힘은 어디로부터 오는 걸까?

며칠 뒤 아들 내외가 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인사차 할머니 집에 들렀다. 할머니와 손자는 부둥켜안고 오랜 이별을 했다. 다시는 못 만날 사람들처럼 울고 울었다. 정말 살아생전의 마지막 만남일 수 있겠다. 바라보는 딸은 오히려 덤덤한데 평소 말 수 적고 무뚝뚝한 아들아이가 많이 운다. 조손(祖孫)의 슬픈 이별 장면은 아직도 마음에 남아있다.

어머니의 간병을 위해 친정집에 머물렀다. 어머니를 돌보느라 애쓴 동생들과 올케들에게 잠시라도 휴식을 주고 싶었다. 갑작스러운 엄마 돌보미 역할이 서툴다. 그간 너무 무심했다.

기운 없는 딸과 기운 더 없는 엄마가 마주 앉았다. 배터리 눈금 두 개 남은 딸과 남은 한 눈금마저도 깜빡거리는 엄마. 다 된 배터리들끼리 누가 누굴 돌보는지 모를 상황이다. 눈금 하나 짜리의 수저 위에 두부를 얹으면 얌전히 받아 드신다. 다음 순서는 고기 한 점. 고개 흔든다. 눈금 두 개짜리가 대신 먹는다. 몇 차례 반복하다가 상을 물린다. 새 모이만큼 드시고 설거지하는 동안 잠이 드셨다.

명랑 쾌활하던 엄마는 말 수 없는 낯선 엄마 되었다. 엄마 옆에서 책도 읽고 반찬도 만들고 분리수거도 하며 목욕을 시켜드렸다. 일주일 한시적인 효녀 노릇도 쉽지 않음을 알았다. 그래도 딸이 옆에 있어선지 내가 미국으로 돌아올 무렵엔 기운을 차리셨다.

기운 차리신 후 첫마디가, 교회의 개근상을 물으신다. 이미 아파서 12월 한 달을 결석하셨다니 무척 억울해하신다. 연말에 개근상으로 내복을 받으시곤 했단다. 어머니날엔 여름 속옷을 받고, 성경퀴즈에선 양말을 상품으로 받고, 야유회 땐 모자를 받으셔서 다 모아 놓으셨다. 겨울내의까지 구색 맞춰 내게 주려고 했단다. 해마다 소포 꾸러미에 들었던 것들에 그런 사연이 깃들인 줄 몰랐다. 어머니의 시간과 삶이 갈피갈피 들어있는 보따리였구나.

시간 속에 영원한 것은 없으며, 낡고 때 묻고 시들지 않는 것은 없다. 그렇다 해도 엄마는 내 옆에 영원히 사실 것만 같은 어리석은 믿음이 있다. 새 달력을 걸며 벌써 내가 이런 나이가 되다니 하고 혼자 중얼거렸다. 미수(美壽)를 바라보는 딸을 낳은 엄마는 이제 88 미수(米壽)를 맞으신다.

요즘 엘에이도 부쩍 추워져서 내의가 필요하다. 향후 10년은 더, 엄마로 부터 내의를 꼭 받아 입기로 결심했다.


[LA중앙일보] 이 아침에
2020/01/24 미주판 22면 기사입력 2020/01/23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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