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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인물 오디세이] 'DYL 프로퍼티LLC' 이춘근 대표 "길 위를 떠도는 게 내 운명"
08/07/2017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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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에 대한 동경을 따라 지난 45년간 10개주 25개 도시에 거주하며 성공적으로 아메리칸드림을 일군 DYL프로퍼티 이춘근 대표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상진 기자
미지에 대한 동경을 따라 지난 45년간 10개주 25개 도시에 거주하며 성공적으로 아메리칸드림을 일군 DYL프로퍼티 이춘근 대표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상진 기자
덴버서 세탁소 8곳 운영
한인회·상의 회장 역임

10개주 25개 도시 거주
부동산 투자로 부 일궈

8년간 4차례 암 발병
6개월 시한부 선고도

"인생·사업도 놀이처럼
즐기면 성공은 따라와"


뭐 이런 인생이 다 있나 싶었다. 토종 미국인이 그렇게 살았다 해도 입이 벌어질 터인데 45년 전 이민 온 한인 1세가 연고도 없는 10개주 25개 도시에서 살며 각종 사업으로 아메리칸드림을 일궜다고 하니 놀라움보다 궁금함이 앞선 게 사실. 역마살을 운명이라 말하는 'DYL 프로퍼티LLC' 이춘근(72) 대표다. 사업도 인생도 놀이처럼 살아온 이 유쾌한 사업가는 지난 8년 간 4번의 암 선고를 받고 2년 전엔 6개월 시한부 판정까지 받았지만 길 위를 바람처럼 떠돌다 길 위에서 죽는 것이 꿈이라며 오늘도 괴나리봇짐 꾸릴 궁리로 행복해 보였다.

#가보지 않은 길을 쫓아

전남 곡성 출생인 그는 광주농고 졸업 후 군 입대했고 제대 후 5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 체신부에서 행정직 공무원으로 근무했다. 안정된 직장이었지만 유신선포를 앞둔 당시 한국 정치상황에 염증을 느낀 그는 1972년 여름, 누나가 있던 앨라배마 버밍햄으로 왔다. 오자마자 앨라배마 주립대학(UAB)에 입학해 어카운팅을 전공했다. 그곳에서 처음 잡은 직장은 바디샵. 1년 뒤 그는 신문에 난 구인광고를 보고 미국을 대표하는 기차 제조사인 '풀맨 스탠다드'에 용접공으로 입사했다. 미국생활이 안정세에 접어들자 그는 한국에 나가 아내와 맞선을 보고 두 달 후 결혼했고 1974년 미군 입대했다. 4년 뒤 제대한 그는 시애틀에서 세탁소를 인수, 비즈니스를 시작했다. 부부의 성실함으로 매상이 1년 만에 2배로 뛸 만큼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그러나 2년 쯤 지나니 슬슬 좀이 쑤셔 왔단다. 그때 마침 친하게 지내던 한인 이웃이 휴스턴으로 간다하자 두 말없이 그를 따라나섰다. 힘들게 일군 사업체가 이제 막 궤도에 올랐는데 아무 연고도 없는 곳으로 이주라니.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됐다.

"어려서부터 늘 새로운 곳에 대한 동경이 있어 기회만 있으면 변화를 선택했죠. 대신 한 번 결정하면 1년 안에 성공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늘 최선을 다했습니다."

#성공을 거머쥐다

1981년 봄 휴스턴으로 이주한 그는 그곳에서도 세탁소 사업을 했다. 이번엔 기존에 있던 사업체를 인수하지 않고 빈 가게를 렌트해 세탁소를 차렸다. 이후 20여 년간 그의 세탁소 브랜드가 된 'USA클리너'였다. 사업은 승승장구했고 그는 사업 확장을 위해 전 재산 20만달러를 털어 인근 7000스퀘어피트 규모의 쇼핑몰을 매입, 건축을 추진했다. 그러나 그 무렵 휴스턴 경기가 최악으로 치달으면서 건축 융자를 받지 못하게 돼 결국 적잖은 손해를 보고 건물을 매각해야만 했다. 안정적인 시애틀 사업을 접고 휴스턴에 온 게 후회될 법도 싶었다.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좋은 경험을 했는데 왜 후회를 해요. 이제껏 몰랐던, 어떻게 하면 실패하는지 뼈저리게 알게 됐잖아요. 당시 그 경험이 이후 부동산 투자를 하면서 가장 큰 자산이 됐으니 오히려 감사한 경험이었죠."

사업 실패 후 다시 시애틀로 돌아간 그는 세탁소 사업을 시작해 2년도 채 안 돼 4곳으로 늘릴 만큼 금세 재기에 성공했다. 그러나 1987년 다시 세탁소와 집을 처분하고 덴버로 이주한다.

"당시엔 떠날 수만 있으면 어디든 좋았죠. 그때 마침 여덟 살이던 막내가 덴버로 가자는 거예요. 이유를 물으니 좋아하는 풋볼팀인 덴버 브롱코스 때문이라는 거예요.(웃음) 알아보니 덴버가 살기 좋은 도시 1위라고 해 일단 가보자 싶어 짐부터 쌌죠."

덴버가 정말 살기 좋은 도시여서 그랬는지 그곳에서 그는 13년을 살았다. 세탁소 8곳을 비롯해 카운티 정부 소유 건물 관리업체와 군용 광학렌즈 제조사도 인수해 운영하며 성공한 사업가로 자리 잡았다. 그러면서 그는 한인사회 봉사활동에도 팔 걷어붙이고 나섰다. 콜로라도 한인세탁협 회장을 시작으로 한인회장, 상의 이사장, 평통 위원을 역임했고 오로라시 시장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주류사회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길 위의 인생

그가 남가주에 오게 된 사연은 지인이 모텔을 인수해 베이커스필드로 이주하면서 그에게도 모텔사업을 권유했기 때문. 그의 결정은 불 보듯 뻔한 일. 그는 1999년 3층짜리 모텔을 250만달러에 구입해 베이커스필드로 이사했다. 그리고 1년 뒤 호텔 매각으로 100만달러에 가까운 수익을 올리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부동산 투자에 뛰어들었다. 이후 그는 5년간 남가주 일대 상업용 건물 5곳을 사고팔았고 그때마다 100~300만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그 5년간 벌어들인 돈이 30년간 번 것보다 훨씬 많았단다. 그러나 어떤 인생이 있어 꽃길만 걷겠는가. 그에게도 시련이 찾아왔다. 2005년 아내 영옥씨가 유방암 선고를 받았고 4년 뒤엔 그가 오른쪽 갑상선암 판정을 받게 된다.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3년 뒤 그는 위암 3기 판정을 받고 위장의 70%를 절제해야만 했다. 다시 3년 뒤엔 왼쪽 갑상선암 판정을, 넉 달 후엔 림프절암 선고까지 받았다. 6개월 시한부 선고였다.

그러나 다행히 친척 의사의 도움으로 당시 막 출시된 신약을 알게 됐고 키모테라피도 병행하며 지금까지 건강하게 생활 중이다. 시한부 선고 후 그는 시간 날 때마다 집필활동을 해 올해 초 '흩어진 씨앗'이라는 자전적 소설을 출판하기도 했다. 또 2009년엔 수묵화에 입문, 4년만인 2014년 대한민국 국전에서 입선의 영예를 안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고단한 그의 투병생활에 가장 큰 힘이 돼준 것은 여행.

"원래 여행을 좋아했지만 암 수술 후엔 더 열심히 돌아다녔어요. 1년에 10여 개국을 간 적도 있었으니까요. 아마 제게 여행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떠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본능인 것 같아요. 미지의 땅에서 보는 풍경과 사람은 늘 가슴 뛰고 행복하니까요."

그러다보니 지금껏 부부가 여행한 나라만도 60여 개국이 넘는다.

"가수나 배우의 소원이 무대에서 죽는 것이듯 평생을 떠돌던 제 꿈은 길 위에서 죽는 겁니다. 누워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진 않아요. 떠돌다 죽는 것, 그게 바로 나다운 걸 테니까요."

순간 도종환 시인의 시 한편이 떠올랐다. '죽음에 이르는 길조차도/자기 전 생애를 끌고 넘는 이들이 있다/순탄하기만 한 길은 길이 아니다/낯설고 절박한 세계에 닿아서 길인 것이다'(처음 가는 길 중에서) 그리하여 그의 삶은 그 자체로 길 위에 선 모든 이들에게 바치는 따뜻한 헌사일는지도 모르겠다.

이주현 객원기자 joohyunyi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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