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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에게 우대권리는 없습니다
01/14/2020 04:00
조회  820   |  추천   14   |  스크랩   0
IP 23.xx.xx.72

01/14/2020


노인에게 우대권리는 없습니다

노인이라고 봐주기를 바란다면 크게 잘못입니다
늙지 말았아야 하였지만 늙었기에 우대 받기를 기다리면
모든 젊은이는 도망 갈 것입니다, 내가 젊었을적 그리 하었기에
인과응보라 할까요, 주는데로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일직히 마음을 비워 놓았습니다
그래도 간간히 망각하고 대접 받기를 은근히 바라네요

내가 조인하는 산악회가 있습니다
모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산악회에 15인승 작은 벤차가 있는데
사람들이 좌석수보다 많은날엔 모든 사람들이 마음먹고 
주말산행을 계획으로 나왔는데 수가 많아 다 탈수가 없으면 
누가 양보해야 합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이때 내가 양보합니다
가까운 거리면 내차로 직접 갈 수 있지만 먼 곳으로
원정 산행시는 나는 가까운 등산로로 발길을 돌립니다

이때에 생각해 봅니다, 젊은 사람들이 한주의 스트레스를
날리려 나왔는데 늙은이가 먼저가서 앉어버리면 
그들의 입장이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나는 
먼저 타지 않습니다, 자리가 없으면 돌아서는 것이 
내 몫이라 생각하기때문입니다, 설령 노인에게 우대권이 있다손처도
양보하고 뒤로 물러서는 것이 노인의 몫이라 생각됩니다

어찌 벤차 타고 내릴적만 그러하리요, 세상사 모든 곳에
늙은이의 자새가 아닐까 여겨집니다, 늙은이는 한발 양보하고
젊은이들에게 기회와 권리를 주는 것이 노인의 미덕이요
의무인 것 같습니다, 젊은이들아 늙은이들 눈치보지 말고
용감하게 살아 가십시요, 그리고 노인은 양보하라

복음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1ㄴ-28
카파르나움에서,
21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22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23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24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25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26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27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28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오늘의 묵상

 

회당과 더러운 영의 만남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율법을 읽고 해석하는 공간, 그리하여 하느님의 현존을 믿고 깨닫는 공간인 회당에 더러운 영에 짓눌린 이가 들어올 수는 없었습니다. 마르코 복음의 저자는 현실의 당위를 깨뜨리고 있습니다.


함께할 수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함께해서 즐거운 사람이 있습니다. 평소에 서로 ‘코드’가 맞는 사람들과만 어울리다 보면, 낯선 이들에 대한 근거 없는 적대감은 이유 없이 커져 갑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그가 더러워서가 아니라, 더럽다고 여기는 세상 사람들의 이유 없는 적대감에 희생되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과 더러운 영을 분리하십니다. 더러운 영의 말은 이러하였습니다.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사람 사이를 갈라놓고 사람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는 것이 더러운 영입니다. 서로를 향한 시선이 서로를 멸망시킬 듯 날카롭다면 우리는 더러운 영에 취하여 사람다움을 잃어 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이 사람다움의 회복이었고, 사람다움은 이 세상에 함께하지 못할 사람이 없다는 무한한 자비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얽힌 실타래마냥 꼬인 이념의 논쟁들, 사상의 다툼들, 그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제 목소리 하나 내지도 못한 채 사람 꼴을 잃어 가는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입니다. 제 목소리를 내기 전에, 다른 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저만의 ‘코드’에 합당한 이들만 모인 공간(회당)을, 낯선 ‘코드’도 함께 나누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넓디넓은 공간으로 만들 줄 아는 이가 그리스도인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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