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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애님의 자녀교육과 역경의 열매
12/28/2011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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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황경애 (1) “훌륭한 자녀 원하면 기도하는 부모 되세요”

[2010.01.25 21:11]트위터로 퍼가기 싸이월드 공감 페이스북으로 퍼가기    


‘20억 장학생 엄마’. 어느새 내 이름 황경애(미국명 에스더 최) 앞에는 ‘은혜 엄마’가 아닌 이런 수식어가 붙었다. 큰딸(최은혜)을 비롯해 두 아이(성찬, 은희)가 미국 정부나 빌게이츠재단, 대학 등에서 받은 장학금이 170만 달러를 넘겨 생긴 말이다. 

은혜(25)는 보스턴대 국제정치학과를 전액 장학생으로 졸업하고 백악관 인턴십을 거쳐 미 정부 장학금으로 스페인 바르셀로나대에서 유학했다. 지금은 미국 10대 로펌인 폴 바이스 법률회사에 근무하고 있다. 

장남 성찬(22)은 보스턴대 4년 전액 장학생으로 미국 내 800만 대학생 가운데 32명만 뽑는 외교관 특별 프로그램 ‘펠로십’(10만 달러)에 합격한 예비 외교관이다. 전 세계 주요 국가에서 5년간 교육을 받고 나면 외무고시를 거치지 않고 외교관으로 국제무대에 설 수 있다. 성찬이는 또 연예 기획사에서 “제2의 가수 비로 키워주겠다”는 제안을 받기도 했다. 183㎝에 만능 운동선수에다 춤 솜씨 또한 뛰어나 아이를 눈여겨본 것이다. 하지만 아들은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다. 

막내딸 은희(20)는 하버드대 4년 전액 장학생이면서 빌게이츠재단 100만 달러 장학금을 받고 있다. 은희의 꿈은 가난한 나라의 도시를 개발해 빈곤과 질병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미국 애틀랜타에 살고 있는 나는 최근 들어 한국에 있는 시간이 부쩍 늘었다.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키웠는지, 그에 대해 강의를 다니느라 일정이 빡빡한 것이다. 교회, 학교, 공공기관 등에서 세미나 요청을 받아 가면, 늘 한결같은 질문을 받곤 한다. 

“대체 어떻게 세 아이들을 그렇게 훌륭하게 키운 거예요?” 모두들 귀를 쫑긋하고 나의 대답을 간절히 기다린다. 하지만 그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은 똑같다. 

“훌륭한 자녀로 키우고 싶다면 먼저 기도하는 어머니가 되십시오.” 

자녀교육과 관련해 내 말의 처음과 끝은 ‘기도’뿐이다. 남편 없이 세 아이를 먼 이국 땅에서 홀로 키운다는 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이 동반된다. 그러나 내가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였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매일 시편 23편을 수시로 암송하고, 새벽기도와 저녁예배를 드림으로써 온전히 하나님만을 바라봤다. 그것이 우리 아이들을 올바로 키워낸 원동력이다. 

요즘 전 세계는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곳곳에서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강조하고 싶다. “고난은 변장하고 찾아오는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라고. 

물론 나 역시도 어쩌면 그 사건을 겪기 전까진 그저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며 ‘밋밋하게’ 살았을지 모른다. 10여년 전 우리 가족은 나이지리아 출신의 국제사기단에 걸려 전 재산을 몽땅 날렸다. 그때 남편은 극심한 스트레스를 견디다 못해 가출했고, 이때부터 나는 우리 가족을 책임져야 했다. 아이들에게 자랑스러운 엄마가 되어야 했지만, 어찌나 사는 게 힘들던지 눈물로 베개를 적시는 날이 많았다. 그때마다 주님은 말씀을 주셨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역경의 열매] 황경애 (2) 사우디서 간호사 생활… 예배드리다 경고장

[2010.01.26 21:00]트위터로 퍼가기 싸이월드 공감 페이스북으로 퍼가기    


지금 내가 우리 아이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듯 내 어머니도 나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셨다. 어머니의 기도는 당신의 딸이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열국’이란 말이 뭔지도 몰랐던 어린 시절부터 나는 어머니의 기도 속에서 성장했다. 그 기도가 있었기에 지금은 세계를 다니며 수많은 부모들과 자녀교육 경험담을 나누고 있다. 솔직히 나는 잘나지도 못했다. 프로필 어디에도 눈에 띄는 이력이 없다. 

1960년 경북 경주시 안강에서 태어나 지방에서 간호대(대구 신일간호대학)를 졸업하고 81년 서울로 올라왔다. 아마 20군데 이상의 병원에 취업 지원서를 냈던 것 같다. 하지만 지방 출신이기에 늘 퇴짜만 맞았다. 아무리 성실하게 환자를 돌볼 수 있다고 해도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실망감이 밀려왔지만 좌절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 시간을 뚫고 나가리라 마음을 다잡았다. 

그때 마침 서울대학병원에서 중환자실 집중간호 교육 프로그램 연수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힘든 과정이라 신청자가 많지 않았다. 실력이라도 쌓자며 그 프로그램에 지원해 열심히 공부했다. 

얼마 후 눈에 띄는 공고를 보게 됐다. 한미재단 후원으로 심장병 어린이를 미국에 데려가 수술을 받도록 하는데, 옆에서 아이를 보살필 간호사를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번에도 망설임 없이 신청서를 냈고, 나는 심장병 어린이를 미국 뉴욕의 병원에 데려가 간호사 자격으로 최첨단 심장 수술을 보조하고 봉사하는 일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다섯 살 여자 아이 민영이를 만났다. 결혼을 하지 않았지만, 그 아이가 어찌나 예쁘고 사랑스러운지 마치 친딸처럼 민영이를 돌봤다. 하지만 민영이는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 슬픔을 견디기 힘들어 일을 그만두고 귀국해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에 들어가 선교학을 공부했다. 

그러던 중 83년 가을 사우디아라비아 정부 초청 간호사로 가게 됐다. 그곳 왕립병원에서 일하면서 영어와 아랍어 통역을 담당했다. 또 매주 기숙사에서 비공개로 간호사들을 모아놓고 성경공부 및 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문제가 터졌다. 회교국에서 선교를 했다며 상부에 보고가 들어갔고, 경고장이 날아온 것이다. 여기에서 또 걸리면 강제추방 또는 사형이라고 알려줬다. 먼 이국땅에서 갑자기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그날부터 병원 기숙사 골방에 들어가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얼마 후 휴가를 겸해 나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도피시켜 주신 것 같다. 

이 사건은 결국 나를 헌신자로 만들었다. 요즘 집회를 다니면서 더 크게 느끼는 게 있다면 어머니의 기도는 힘이 세다는 것이다. 시골 출신의 평범한 소녀가, 잘나지도 공부를 많이 하지도 않은 내가 세계를 무대로 활동한다는 건 바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해 달라’고 간절히 부르짖은 어머니의 기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 기도 덕분에 스무 살을 갓 넘기면서 시작된 숱한 고난에도 좌절하지 않고 지금까지 버텨왔다. 그 기도가 나를 이렇게 자녀교육 강사로서, 복음 전도자로서 전 세계를 누비며 살게 하고 있다. 

미국으로 건너간 나는 이모님의 소개로 교회에서 아이들 아빠를 만나 84년 12월 결혼했다. 재미교포 2세였던 남편은 당시 신학대 1학년 학생이었다. 애들 아빠와 함께 이민교회 사역을 시작했다. 

역경의 열매] 황경애 (3) 수련회 중 모녀 익사 위기… ‘보이지 않는 손’이 구조

[2010.01.27 22:00]트위터로 퍼가기 싸이월드 공감 페이스북으로 퍼가기    


“엄마∼!” 막내딸 조이(한국명 최은희)가 파도에 휩쓸리며 비명을 질렀다. 그때 조이의 나이 다섯 살. 해변에 있던 나는 정신없이 바다로 뛰어들었다. 내가 수영을 못 한다는 것도 생각지 못했다. 조이와 나는 순식간에 파도에 밀려 먼 바다로 떠밀려갔다. 멀리서 애타게 나를 찾는 아이들의 목소리조차 아득해졌다. 순간 어디서 그런 힘이 생겼는지 조이를 들어올려 최대한 얕은 바다로 집어던졌다. 조이만이라도 살기를 바랐다.

마침 인근에서 윈드서핑을 즐기던 아이들이 조이를 건져내 아이는 무사했다. 그 장면을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몸에 힘이 빠지고 점점 가라앉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내가 죽는구나.’

숨을 쉴 수 없었다. 첫 딸 그레이스(한국명 은혜)가 태어나고, 세 아이와 함께했던 행복한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지금 내가 죽으면 우리 막내 조이는 어떡하나! 엄마의 손길이 한창 필요한데… 하나님 저 좀 살려주세요. 이번 한번만 더 도와주세요!”

흩어지는 정신을 부여잡고 기도했다. 그때 하늘에서 밧줄이 내려왔다. 있는 힘을 다해 그것을 부여잡았고, 어느새 나는 큰 숨을 내쉬며 정신을 잃었다.

그 기억은 지금도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 된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우리 세 아이는 해변으로 나온 나를 보고 “엄마가 죽었다”며 하염없이 울었다고 한다. 모두 내가 살아난 것이 기적이라고 했다.

그날은 우리 교단이 속한 연합수련회 기간 중이었다. 때마침 다른 교회에서 온 아이들 가운데 한 그룹이 자동차에 윈드서핑 보드를 실을 것인지 말 것인지를 놓고 오전에 엄마와 씨름했다고 한다. 결국 아이들에게 엄마가 졌고, 서핑 보드를 차에 실었다. 그 아이들이 윈드서핑을 즐기다 조이를 발견하고 해변으로 데리고 나온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미 조이를 구하기 위해 아이들을 통해 서핑 보드를 준비시켰던 게 아닐까.

또 나와 조이가 물에 빠지기 10분 전, 근처에서 다른 물놀이 사고가 있었다. 그래서 바닷가에는 이미 구조대와 구급차가 도착해 있었고, 나 역시 누군가의 손에 들려 해변으로 나오자마자 신속하게 응급조치를 받을 수 있었다. 이 역시 하나님의 섭리 아니겠는가.

조이는 지금도 가끔 “엄마는 내 생명의 은인이에요”라고 말한다. 나 또한 견디기 힘든 일을 당할 때마다 이날의 절박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새 힘을 얻곤 한다. ‘죽었다가 살아난, 덤으로 사는 인생인데, 무엇이 두렵겠는가’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연약한 인간이기에 그 마음을 끝까지 품지 못하고 결국 거대한 문제 앞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애틀랜타에서 개척한 이민교회가 부흥해 교회 건축을 계획하고 있었다. 처음 200만 달러가 필요하던 차, 한 흑인 목회자가 아이들 아빠에게 접근했다.

아프리카 나이지리아 유전 개발에 투자하면 그 수익금으로 교회를 건축할 수 있다고 유혹했다. 그의 감언이설에 속아 남편은 카드 대출까지 받아 전 재산을 투자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기도를 하면서도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아이들 아빠를 말렸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가 미리 교회 재정 집사님들에게 혹시 투자와 관련, 사인을 요구할 때 절대 사인하지 말라고 얘기해뒀기에 교회 돈은 손 대지 못했다.

알고 보니 그 흑인 목회자란 사람은 나이지리아 국제 사기단의 일원이었다. 목사 명함도 가짜였다. 은행에 있던 생활비마저 국제 사기단에게 몽땅 털리며 1998년 여름, 우리 가족은 거리에 나앉을 위기에 처했다. 

[역경의 열매] 황경애 (4) 국제사기 당해 큰 고통… 방송국 취업 재기 몸부림

[2010.01.28 17:28]트위터로 퍼가기 싸이월드 공감 페이스북으로 퍼가기    


1998년 여름 국제 사기단에 말려들어 전 재산을 잃고 아이들 아빠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견디다 못해 이듬해 여름 가출했다. 그 전까지 기도원을 왔다갔다했던 남편이 아예 짐을 싸들고 기도원으로 들어간 것이다. 

남편이 갑자기 사라진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러운데, 더 견디기 힘들었던 건 뒤에서 수군대고 헐뜯는 소리였다. 심지어 아이들에게까지 상처가 되는 말들을 쏟아냈다. 함께 신앙생활을 했던 이들도, 친하게 지낸 이웃들도 모두 등을 돌렸다. 누구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정말 뼛속까지 파고드는 외로움과의 싸움이었다. 집 밖에도 나가지 않고 그저 울분을 토해냈다. 

그렇게 며칠을 보냈다. 뜻밖의 상황에 놀란 아이들의 모습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정신을 번쩍 차렸다. 

“내가 우리 애들을 잊고 있었어!” 

세 아이를 끌어안고 무릎 꿇고 기도했다. 그리고 이사야 말씀을 읽었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사 45:7). 

우리 인생에 빛이 있을 때만, 평안이 있을 때만 주님이 함께하는 게 아니라 어둠이나 환난 가운데 있을 때도 함께하시는 것이다. 

욥을 보라. 욥이 고난 받을 때 가까운 친구들조차 하나님을 원망하라고 했지만, 그는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에게 갑절의 복을 더해 주셨다. 하나님께선 지금 이 시간 나로 하여금 주님만이 나의 구원자이심을 고백하게 하셨다. 

그 때부터 나와 아이들은 매일 예배를 드리며 시편 23편을 함께 읽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아이들과 살려면 직장을 구해야 했다. 마침 지인의 소개로 개국을 앞둔 한인 방송국에 들어가게 됐다. “방송 일은 전혀 모르지만 아무 일이나 시켜만 주면 열심히 하겠다”고 약속했다. 밤을 새워가며 방송 관련 일에 매달렸다. 새벽 일찍 일어나 출근을 서둘렀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강행군에 온몸이 쑤시고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에 몇 번 쓰러지기도 했다. 처음 다짐과 달리 한번은 이렇게는 도저히 못 살겠다 싶어 아들을 불렀다. 

“존(한국명 최성찬)! 할아버지께 가서 생활비 좀 받아오너라. 그래도 할아버지는 평생 의사로 사셨으니 우리보다 형편이 나으실 거야.” 

그런데 이제 겨우 열 살을 넘긴 아들의 말이 폐부를 찔렀다. 

“엄마, 할아버지보다 더 부자이신 하나님께 달라고 하세요.” 

순간 야속하고 화도 났지만, 아들의 말이 절대 틀리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이후부터는 절대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만을 바라보았다. 방송 일은 의외로 잘 맞았다. 

얼마 되지 않아 혼자 기계를 직접 다루기도 하고 생방송도 진행하게 됐다. 제작, 편성뿐 아니라 글도 직접 쓰고 행정 업무도 책임졌다. 

어느새 방송 관련 총 책임자로 올라섰다. 그렇게 3년을 방송국에서 일했고, 이후 사장이 바뀌면서 나도 일을 그만두게 됐다. 

그 시절, 집에 돌아와 지치고 울고 싶을 때면 시를 썼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시로 쓰면서 마음을 달랬다. 그 시들을 모아 첫 시집 ‘그 사랑 향기 되어’를 출간했다. 주님을 향한 내 마음의 고백도 담았다. 

[역경의 열매] 황경애 (5) 백화점서 장사하며 삼남매 뒷바라지 ‘고된 나날’

[2010.01.31 19:43]트위터로 퍼가기 싸이월드 공감 페이스북으로 퍼가기    


방송국을 그만두고 장사를 시작했다. 친구의 도움으로 백화점에 작은 주얼리 숍을 오픈했다. 태어나서 장사란 건 처음 해봤다. 그런데 아이들과 살기 위해 죽기 살기로 덤비니 그것도 적성에 맞는 듯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포도 하나씩 늘어 다섯 개의 숍을 운영하게 됐다. 

물건은 애틀랜타에 있는 도매상을 주로 이용했고, 가끔 한국의 남대문이나 동대문 시장에서 가져다 팔았다. 손님이 원하는 물건을 꼭 맞게 찾아주니 백화점 내에서도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경기가 불황일 때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쌓이는 납부 고지서를 보기가 무서울 정도였다. 그런 날이면 특히 아이들 학비나 기타 학업에 필요한 것들을 지원하지 못할까봐 전전긍긍했다. 

솔직히 미국도 과외 비용이 만만치 않다. 운동부 등록비, 운동 장비 구입비, 유니폼 구입비, 대회 나갈 때마다 드는 출전비, 악기 구입비, 서클 활동비, 캠프비, 학용품 구입비, 프로젝트 비용 등… 아이가 셋이다 보니 그 부담감은 더했다. 

한국은 공부를 위해 과외를 하지만 미국은 그렇지 않다. 다방면에서 고루 실력을 갖춘 리더로 성장하기 위해 공부보다 예체능에 오히려 더 많이 투자한다. 

큰딸 은혜는 고교 때 다이빙 선수였고, 아들 성찬은 육상과 펜싱 선수, 막내딸 은희는 육상과 배구 선수였다. 모두 학교 대표로 활동했다. 피아노 바이올린 트럼펫 기타 연주는 수준급이었다. 아이들 각자가 이런 것들을 하고 싶어 하니 아무리 돈이 들고 육체적으로 고단해도 하지 말라고 말릴 수 없었다. 

나는 세 아이의 엄마요, 사업가로 참 바쁘게 살았다. 한밤중에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다 너무 피곤해 고속도로 갓길에 차를 세워두고 잠든 적이 많았다. 그럼 경찰이 깨워 나를 에스코트해주기도 했다. 

세 아이는 또 아이들대로 바빴다. 학교 수업이 끝난 뒤 매일 세 시간 가량 연습을 하고, 일주일에 두세 번씩 경기를 치렀다. 그러고 나면 밤 10시를 훌쩍 넘겨서야 집에 돌아왔다. 씻고 간식을 먹고 나면 11시, 그때부터 아이들은 밀린 숙제나 시험공부를 시작했다. 그럼 나도 옆에서 아이들과 함께했다. 성경책을 보거나 시를 썼다. 혹시 아이들이 졸까봐 보초를 서는 것이다. 몸이 천근만근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 같아도 엄마로서 해야 할 일이기에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나는 새벽 5시면 일어나 예배를 드렸다. 

하지만 사춘기인 아이들은 나의 상태가 어떤지도 모른 채 가끔 화를 내거나 스트레스를 폭발시키기도 했다. 그 또한 고스란히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아이들도 힘든데, 풀 데가 없으니 가장 가까운 엄마에게 화풀이를 하는 거야’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어느새 엄마는 샌드백 역할까지 하고 있었다. 

무조건 참고 인내하려고 애썼지만 그래도 연약한 인간이기에 주변을 둘러싼 상황이 견디기 힘들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곤 했다. “주님, 제가 얼마나 더 울어야 합니까?” 

이렇게 울먹이면서 기도하면 하나님은 어느새 다가오셔서 내 마음을 부드럽게 감싸주었다. 

“사랑하는 내 딸아, 조금만 참고 기다려라. 내가 너에게 기쁨이 넘치게 하리라.” 

그러면 또 거짓말처럼 새로운 하루를 시작할 용기가 생겼다. 

[역경의 열매] 황경애 (6) 아픔 겪으며 너무 일찍 철든 아이들에 늘 미안

[2010.02.01 18:28]트위터로 퍼가기 싸이월드 공감 페이스북으로 퍼가기    


아들 존이 고교 3학년 때 학교에서 갑자기 쓰러졌다. 학교 공부, 대입 준비, 운동, 장남으로서의 책임감 등 모든 게 그 아이에게 짐이 되었던 모양이다. 아버지가 안 계시니 자신이 집안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압박감이 컸던 것 같다. 하필이면 내가 사업차 중국 상하이에 출장 갔을 때 그렇게 된 것이다. 존은 엄마가 걱정할까봐 일부러 연락하지 않았다. 

집에 돌아온 뒤에도 아들은 졸업시험 등으로 바쁘게 지내다 졸업식을 끝내고 나서야 그 사실을 털어놓았다. 나는 아들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존을 데리고 병원 응급실로 직행했다. 그랬더니 의사는 “아직까지 존이 살아 있는 게 기적이에요”라며 나를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았다. 

아들 몸 안의 피가 50%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했다. 신경성 위염으로 시작된 것이 위궤양이 됐고 그것이 위벽에 내출혈을 일으켜 결국 과다출혈로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서둘러 응급 수혈을 받고 위내시경 등 종합검사를 했다. 병원에 며칠간 입원해 휴식을 취한 뒤 3개월간 통원 치료를 받았다.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잃을 뻔했으니 내 마음이 어땠겠는가. 나는 하나님께 아들을 살려 달라고, 건강하게 고쳐 달라고 간절히 매달렸다. 그때 일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정리하고 사업장은 직원들에게 맡겼다. ‘혹 나를 필요로 할 때 돈을 번다는 이유로 아이들의 마음을 살피지 못한 것은 아닐까’ 후회가 밀려왔다. 

우리 아이들은 또래들에 비해 참 어른스러웠다. 어렸을 때 아픔을 겪으면서 일찍 철든 것이다. 하지만 엄마인 나로서는 그게 고맙기보다 오히려 미안할 때가 많았다. 

큰딸 그레이스는 어릴 때부터 맏이 노릇을 톡톡히 했다. 존과 조이는 뭐든 그레이스를 따라했다. 특히 막내 딸 조이는 언니를 “엄마”라고 부르며 잘 따랐다. 언니가 체조를 하거나 피아노를 치면 그 옆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그레이스는 내게도 친구 같은 존재이면서 때론 선생님 같았다. 힘들고 지칠 때면 언제나 옆에서 나를 겪려해줬다. 한번은 내가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그레이스는 “엄마, 세계는 하나예요. 누구나 똑같아요”라며 나를 ‘훈계’했다. 

존과 함께 교회 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질의응답 시간에 목사님이 아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존,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이 무엇이니?” 

괜히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나는 애들 아빠에 대해 말하고 싶지도 않았고 할 말도 없었다. 가장 아이들이 예민할 때 가족을 버려두고 집을 나갔으니 용서가 되지 않았다. 고통의 터널을 나오기까지 아이들과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아이들에게조차 아빠에 대해 말하지 않았는데, 그날 목사님께서 존에게 이런 질문을 하신 것이다.

그런데 아들의 마음은 나와 달랐다. “예, 저는 아버지에게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키 크고 잘 생긴 외모를 받았습니다.” 

그 아이의 음성을 듣는데 왠지 울컥했다. 아들은 어느새 내 마음을 읽었는지, 손을 꼭 잡아줬다. 그리고 세미나를 마치고 나올 때 존은 말했다. 

“엄마, 아빠가 아무리 잘못했어도 저를 낳아주신 분이고, 아빠가 계셨기에 제가 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어요. 엄마가 할 수 없으면 예수님의 마음으로 용서하세요.” 

아들의 말이 맞았다. 이렇게 귀한 아이들을 낳게 해줬는데, 왜 용서를 못하겠는가. 어느새 성장한 우리 아이들은 나보다 훨씬 더 어른스럽게 엄마를 가르치고 있었다. 

[역경의 열매] 황경애 (7) 버팀목이던 어머니 사고로 잃고 깊은 절망

[2010.02.02 17:37]트위터로 퍼가기 싸이월드 공감 페이스북으로 퍼가기    


2007년 7월 19일 오전 10시50분. 사랑하는 어머니의 칠순 선물로 마련한 헌정 시집을 품에 안은 채 애틀랜타 공항에 도착했다. 깜짝 놀라게 해드리려고 일부러 알리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비행기에서 내리기 두 시간 전부터 머리가 몹시 아팠다. 그때는 잠을 못 자서 그런가보다 생각했다. 공항에 도착해 짐을 찾고 나오는데, 아들 존이 소리쳤다. “엄마, 외삼촌이 빨리 전화하시래요.”

뭔가 불길한 생각이 스쳤다. 동생의 전화번호를 누르는데 손이 떨리고 마음이 불안했다. “누나,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어. 교통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셨어.”

수화기를 타고 동생이 울면서 말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아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었다. 겨우 존의 부축을 받고 이동할 수 있었다.

남편이 집을 나간 뒤 나는 부쩍 어머니를 의지하며 살았다. 모든 것을 어머니와 상의했고, 매일 어머니와 대화를 해야만 마음이 안정됐다. 아이들이 나에게 투정을 부리면, 나는 고스란히 어머니에게 의지하고 위로받곤 했다. 그런 어머니가 언제부터인가 “이젠 네 스스로 알아서 해라”고 냉정하게 말씀하셨다. 이런 때를 미리 알고 그러셨던 것인지….

막내 조이가 대학에 들어가면 어머니를 모시고 살려고 했다. 함께 여행을 다니고, 맛있는 음식도 해드리고, 밤을 새우며 이야기도 나누고, 특히 성지순례를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이가 고교를 졸업하기 직전 어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장례를 치르고 나는 몇 달간 움직이지 못했다. 왜 살고 일해야 하는지, 의욕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얼마나 상실감이 컸던지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몸 이곳저곳이 아팠다. 머리가 터질 듯해 좀처럼 성경도 읽지 못했다. 이러다 죽을 것 같았다.

결국 아이들의 도움을 받아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다. 하지만 의사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도 증상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진통제에 의지해 살았다.

‘만약 어머니가 지금의 내 모습을 보신다면 뭐라 하실까.’ 그분의 날카로운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이 세상에 너를 사랑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이러고 있는 거니? 네 편을 들어주는 아이들은 생각지도 않는 거니? 이제부터 너는 울어도 가슴으로 울어야 해. 강인한 엄마의 모습을 보여야 해!”

비로소 성경을 볼 수 있는 힘이 생겼다. 아주 작은 목소리지만 기도할 수 있었다. “하나님, 저를 긍휼히 여겨주시옵소서. 아직 제가 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조이도 대학에 보내야 합니다. 저에게 힘을 주시옵소서.”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6개월 정도 흘렀을까. 차츰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 막내딸 조이는 대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조이가 처음 원서를 낸 곳은 스탠퍼드대였다. 사실 어머니와 나는 조이가 태어났을 때부터 하버드대에 전액 장학금을 받고 들어가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런 조이의 모습을 매일 그림으로 그렸다.

하지만 조이는 스탠퍼드대가 명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따뜻한 지역에 있고 주거환경이 애틀랜타와 비슷해 공부에 집중하기 좋을 것 같다며 그 대학을 선호했다. 시간이 흘러 어느새 합격자 발표일이 다가왔다. 그런데 결과는 ‘불합격’. 조이는 믿기지 않는 듯 며칠을 계속 울었다. 아이도 그렇지만 나를 비롯, 학교에서조차 실망이 대단했다. 왜 떨어졌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조사단을 꾸려야겠다고까지 했다.

[역경의 열매] 황경애 (8) 스탠퍼드대 탈락 막내 하버드·예일대 동시합격

[2010.02.03 17:34]트위터로 퍼가기 싸이월드 공감 페이스북으로 퍼가기    


전교 수석에 우수한 SAT 성적, 뛰어난 리더십, 다양한 봉사활동과 과외활동, 무수한 수상경력, 고교대표 운동선수, 오케스트라 활동, 한번도 놓친 적 없는 개근상, 교사들의 추천서….

막내 딸 조이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 아이가 스탠퍼드대에 떨어졌으니 다들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이러한 때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기도뿐이었다. “하나님, 이게 어찌된 일인가요? 믿고 구하면 받은 줄로 믿으라고 하셨는데…제발 조이의 마음을 붙잡아주세요.”

그런데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불고하던 조이가 토요일 저녁부터 주님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열심히 적었다. 다음날 주일예배 때 조이가 단상에 올라 그날 적은 것을 읽기 시작했다. 간증문이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나와 함께 하신 주님, 지금까지 지켜주신 주님, 나의 삶을 통해 영광받기 원하시는 주님, 어떤 상황에서라도 주님을 원망하지 않고 경배드리며 감사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비록 제가 원하는 대학에는 떨어졌지만 하나님께서 더 좋은 계획을 갖고 인도해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가슴이 울컥했다. 주님의 위로와 평강이 조이에게 임한 것이다. 다시 하루가 지나고 월요일, 2008년 3월 31일 드디어 기다리던 소식이 전해졌다. “엄마, 나 하버드대와 예일대에 동시 합격했어요!”

하나님은 실패를 통해 겸손하게 하시고 전폭적으로 주님을 신뢰하게 하신 후 응답하신 것이다. 내 어머니의 오랜 기도요, 우리의 기도에 그렇게 응답하셨다. 조이와 나는 한참을 부둥켜안고 울었다.

그동안 남편 없이 홀로 세 아이를 키우며 흘린 눈물의 양이 얼마나 많았던가. 하지만 그 순간 흘리는 눈물은 서러워서가 아닌 너무나 벅차고 기뻤기에 흘리는 것이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조이가 말했다.

“엄마, 울지마. I made it for you. It’s grace of God. Glory to God(전 엄마를 위해 해낸 거예요. 이건 하나님의 은혜예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요).”

큰딸이 열두 살, 막내가 여덟 살, 뜻하지 않게 전 재산을 잃고 남편은 집을 나가고, 아이들과 빈털터리로 남겨진 나. 그때 의지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믿음뿐이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최선을 다해 살았고, 다행히 아이들도 신앙 속에서 멋지게 자라줬다.

하지만 솔직히 세 아이 모두가 사춘기를 겪을 땐 아빠 없는 자리가 너무 커 힘들 때도 많았다. 특히 “엄마, 나도 아빠가 없어서 얼마나 힘든지 알아요?”라며 눈물 흘리는 아이들을 볼 때면 가슴이 미어졌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시간을 애태웠던가. 행여 상처를 받고 어디로 뛰쳐나갈까….

그럴수록 나는 뼈가 으스러지도록 일하면서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했다. 아이들이 숙제할 때나 시험 공부할 때는 함께 밤을 새웠고, 운동 경기가 있는 날이면 밤 10시까지 운동장을 지켰다. 아무리 아파도 일을 나갔고, 힘들고 지쳐도 주저앉지 않았다. 그러면서 새벽기도와 저녁예배는 단 한번도 거르지 않았다.

슬픔과 눈물을 기쁨으로 바꿔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결코 이런 시간도 없었다.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가 아니었다면 ‘하버드대의 기적’도 없었다. 그래서 다짐했다. “이제부터는 울지 말고 웃자”라고. 

[역경의 열매] 황경애 (9) 막내딸 대입 코앞에 두고 니카라과 단기선교

[2010.02.04 17:37]트위터로 퍼가기 싸이월드 공감 페이스북으로 퍼가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 주님께 드릴 것”

하나님의 복은 계속됐다. 막내딸 조이는 하버드대 4년 전액 장학금을 받은 데 이어 2008년 4월 15일 빌게이츠재단으로부터 100만 달러 장학금 수혜자에 선정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10년간 박사 공부가 끝날 때까지 학비를 지원해주는 것이다. 미국 대학의 학비는 비싸다. 명문 사립대는 더욱 그렇다. 좋은 대학을 가고 싶어도 학비 때문에 못 가는 경우가 많다.

막내는 어렸을 때부터 ‘척척박사’였다. 무엇이든 혼자서 해냈다. 학교 다니는 동안 숙제나 준비물을 잊은 적이 없고, 철저하게 시간표를 작성해 그대로 움직였다. 특히 조이는 엄마 혼자 힘들게 일한다며 유난히 공부에 집중했다.

꼬박 밤을 새우기도 여러 번, 애처로울 때가 참 많았다. 그러면서도 조이는 신앙생활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금요 성경공부와 주일예배는 꼭 지켰다. 한번은 조이가 12학년이 되던 여름, 한창 공부로 바쁠 시기에 갑자기 남미 니카라과로 선교 여행을 가겠다고 했다. 12학년은 한국으로 치면 고3 수험생으로 촌각이 아까운 시기였다. 성적 관리며 시험 준비, 서류 준비 등으로 24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바쁜 때였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학 입학 때까지 3개월간 쉴 수 있으니 그때 가는 게 어떠냐”고 조용히 아이를 타일렀다. 그러자 조이는 이렇게 대답했다.

“엄마, 내 인생에서 가장 귀중한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고 싶지, 남아도는 시간을 드리고 싶지 않아요.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잖아요.”

조이는 그때 선교기금도 모았다. 1800달러 정도를 모았다. 선교에 들어가는 비용는 1500달러였다. 300달러가 남으니 나는 조이에게 필요한 학용품을 사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조이는 단호했다. “저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아니에요.”

사도행전을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부부가 밭을 팔아 하나님께 바치기로 했는데, 금액의 일부만 가져와서는 전부 가져왔다고 거짓말했다. 결국 하나님의 진노로 죽임을 당했다. 조이의 일침에 큰 것을 깨달았다. 결국 조이는 2개월간 선교 훈련을 받고 2주 동안 니카라과로 단기 선교를 갔다 왔다. 이처럼 아이는 선교 열정 또한 대단했다.

또 고교 때는 봉사서클 회장까지 맡아 열심히 봉사를 다녔다. 어느 날 조이가 긴 머리카락을 자르겠다고 나섰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여학생들에게 긴 머리는 자랑거리였다.

“엄마, 병원에 입원한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러 갔다가 백혈병에 걸린 여자 아이를 만났어요. 그 아이가 병을 치료하느라 머리카락이 다 빠져 모자를 쓰고 있는데 무척 안타깝더라고요. 그래서 친구들과 머리카락을 자르기로 했어요. 후에 그 아이들이 쓸 수 있는 가발을 만들어주려고 해요.”

얼마나 기특한 생각인가. 그렇게 아름다운 심성을 가진 아이인데, 어찌 축복하지 않으실까.

하나님은 어린 딸의 믿음과 헌신을 기쁘게 받으셨다. 12학년 말 조이는 3200명의 학생들을 제치고 고등학교를 수석 졸업했다. 또 8000명 관중 앞에서 대표로 졸업 연설을 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확실하게 책임져주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항상 더 좋은 것으로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신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 1:7). 

[역경의 열매] 황경애 (10) 신앙·인성교육 힘쓰며 공교육 최대한 활용

[2010.02.07 17:34]트위터로 퍼가기 싸이월드 공감 페이스북으로 퍼가기    


“어떻게 세 아이를 혼자서 키우셨습니까?” 앞으로 이 질문에 대해 구체적으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먼저 어릴 적부터 신앙교육을 철저히 시켜야 한다. 한번은 존이 독감에 걸려 학교를 빠지게 됐다. 미국 학교들은 독감에 걸린 학생은 무조건 집에서 쉬게 한다. 그렇게 하루 이틀을 보내던 중 주일이 됐다. “존, 오늘까지 푹 쉬어야 월요일 학교에 갈 수 있지 않겠니?” 만류하는 엄마를 아들이 설득했다. “엄마, 아무리 아파도 교회는 꼭 갈 거예요. 학교는 빠져도 교회는 빠질 수 없거든요.”

교회에서 예배 드리면서 찬양하고 기도하고 성도들과 함께 교류하는 생활을 일찍부터 배운다면 사춘기 때 방황을 하더라도 다시 하나님 품으로 돌아올 확률이 그만큼 높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는 10대들은 범죄에 잘 노출되고 강인한 의지가 없으면 죄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 따라서 주의 전을 사모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글자 한 자, 수학 문제 하나 더 가르치기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르쳐야 한다.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요 2:17).

두 번째는 인성교육이다.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요즘 아이들, 버릇없다”는 소리를 곧잘 듣는다. 나 역시 실제 경험하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예절 같은 인성교육을 해야 한다.

우리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나의 외할머니, 즉 증조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할머니는 나를 대신해 엄마의 빈 자리, 아빠의 빈 자리를 채워주셨다. 94세에 돌아가셨으니 우리 가족과 13년을 사셨다. 할머니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등에 업고 재우셨다. 아이들은 할머니의 그런 따뜻한 사랑을 느끼며 잠들었다. 

그래서인지 세 아이 모두 따로 가르치지 않았는데 어른을 공경했다. 미국 아이들이지만 버스나 지하철에서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한다든지, 어른에게 큰절을 하고, 선생님들을 존경했다. 또 손님이 오면 문 앞까지 나와 인사하고, 문 밖까지 배웅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처럼 한국의 아름다운 예절교육과 어른에 대한 공경심을 어릴 때부터 가르쳐야 한다. 예의를 잘 갖추어서 국제 무대에 나간다면 모든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게 될 것이다.

셋째, 공교육을 최대한 활용하라. 하버드대 학부모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막내딸 기숙사에 갔다. 딸의 룸메이트 모두 미국 최고의 사립고교 출신이었다. 이들 부모는 조이가 공립고교 출신에다 전액 장학금을 받는다고 하니 서로 믿지 못하겠다는 눈치였다. 조이는 목표를 세워놓고 학교 공부에 충실하는 스타일이었다.

요즘 미국도 한국 못지않게 교육열이 뜨거워 입시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교육에 많은 투자를 한다. 우리나라 부모들도 자녀를 외고나 과학고에 입학시키려고 초등학생 때부터 사교육에 열을 올리고 있다.

하지만 공립학교에서도 대입에 필요한 것들을 충분히 가르쳐준다. 공교육이 무너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사교육만 맹신하는 학부모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부모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 교육비를 마음껏 쓸 수 있다면 혹시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비싼 사교육비에 투자하기보다 공교육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할 것을 주문한다. 어떤 환경이든 스스로 목표를 정하고 최선을 다한다면 그 결과는 행복한 웃음뿐이다.

[역경의 열매] 황경애 (11) 성적 A받으면 용돈 1달러… 모든 자녀적용

[2010.02.08 17:32]트위터로 퍼가기 싸이월드 공감 페이스북으로 퍼가기    


내가 어렸을 땐 거지들이 참 많았다. 부모님은 그들을 보면 데려다 밥을 지어 먹였고, 옷가지들을 챙겨줬다. 또 이웃들이 도움을 요청하면 절대 마다하지 않으셨다. 그 모습이 어찌나 선하고 아름답던지. 요즘 부모들은 자녀들로부터 그런 존경을 받고 있는가.

나는 아이들에게 항상 대접하는 자가 되라고 가르쳤다. 그것이 네 번째 자녀교육 원칙이다. 큰딸 그레이스는 유난히 퍼주기를 좋아했다. “네 것도 좀 챙겨라”고 잔소리를 할 정도였다. 그럼 그레이스는 “엄마도 그러잖아요”라며 웃었다. 아이들은 엄마가 말하는 대로 하지 않고 행동하는 대로 한다. 그래서 아이는 어른의 거울이라는 말도 있다. 

나는 “주는 자가 복 되도다”라는 말씀을 참 좋아한다.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더 행복하지 않을까. 그래서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이같이 가르쳤다. “한 번 대접을 받으면 두 번 주는 자가 되어라.”

아들이 한국에서 유학할 때 주말에는 인천과 분당의 교회에서 영어 교사로 봉사한 적이 있다. 자기는 무료 봉사를 하려고 했는데, 교회에서는 교통비라며 사례비를 줬다고 한다. 아들은 봉투도 뜯지 않은 상태로 전액을 농어촌교회 선교헌금으로 드렸다. 하나님은 아들의 믿음을 기뻐 받으시고, 더 많은 장학금으로 갚아주셨다.

다섯 번째, 긍지를 심어줘야 한다. 그레이스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 일이다. 하루는 아이가 펑펑 울면서 집으로 왔다. 스쿨버스를 타고 오는 길에 한 백인 아이가 눈이 찢어진 동양 아이라며 놀렸다는 것이다. 나는 그레이스의 손을 잡고 당장 그 아이의 집으로 가 부모를 만났다. 그리고 “당신네 할아버지가 좀 일찍 이민 왔을 뿐인데 무슨 유세를 하느냐, 아들이 계속 학교를 다니게 하고 싶으면 똑바로 교육시켜라, 인종차별 발언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 모르느냐, 교장 선생님께 신고하면 당신 아들은 학교를 옮겨야 한다”며 따끔하게 충고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그레이스와 눈을 맞추고 얘기했다. 

“너는 미국에서 태어났으니 미국 사람이고, 한국 부모의 뿌리를 가졌으니 한국 사람이야. 또 무엇보다 하나님의 자녀니까 자신감을 갖고 살아야 해. 미국에서 살면 인종차별은 언젠가 부딪치게 될 문제야. 그 장벽을 넘지 못하면 실패자가 된단다. 만약 뛰어넘지 못할 것 같다면, 뚫고 나가야 해.” 

그레이스는 그날 이후 더 당당해졌다. 반장도 하고, 고교 때는 부회장까지 지냈다. 또 고교 졸업식 때는 대통령 표창을 받고, 대학 2학년 때는 백악관에서 인턴십도 하게 됐다. 자녀가 언제 어디서든 당당하길 원한다면, 그 아이에게 자긍심을 심어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부모가 뚜렷한 믿음과 긍지를 품고 살아야 한다.

여섯 번째는 올바른 경제관념을 가르쳐야 한다. 어차피 용돈은 주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돈의 귀함을 체험할 수 있도록 절대 그냥 주지 않았다. 가령, 여덟 살 큰딸이 설거지를 하면 여섯 살 아들은 방 정리를, 네 살 막내는 빨래를 접도록 했다. 집안 일 외에도 아이들이 학교에서 A를 받아오면 1달러씩 용돈으로 주었는데, 그 액수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한번은 막내가 다른 친구는 A를 받으면 부모가 100달러를 준다며 불평했다. 그때 나는 “1달러면 아프리카에서는 다섯 식구가 하루를 살 수 있다”고 얘기해줬더니 막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돈의 가치는 어릴 때부터 확실하게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

[역경의 열매] 황경애 (12) 보스턴대 포기하려는 아들… 편지·눈물로 어루만져

[2010.02.09 17:31]트위터로 퍼가기 싸이월드 공감 페이스북으로 퍼가기    


“우리 아이는 주말이면 TV만 보려고 해요.” “아무리 감시해도 틈만 나면 인터넷 게임을 하고 있어요.” 

요즘 집회나 세미나를 인도하다 보면 이런 문제로 고민하는 부모들을 많이 만난다. 해결책은 의외로 간단하다. TV와 컴퓨터를 치우면 된다. 이것이 일곱 번째 자녀교육 원칙이다. 

아예 집에 TV가 없다면 그보다 더 좋은 게 또 어디 있을까. 하지만 상황이 그러지 못할 바에야 아이들에게 TV를 보지 말라고 말하기보다 TV를 봐도 재미가 없게 만들면 된다. TV를 틀었는데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없으면 보라고 해도 아이들은 보지 않는다. 나는 지금까지 케이블 TV를 신청한 적이 한번도 없다. 아무래도 TV 채널이 많다 보면 쉽게 TV를 보는 재미에 빠지게 마련이다. 

또 컴퓨터는 거실에 설치해 공개적인 장소에서 정해진 시간에만 볼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 어차피 대학에 가면 각자의 방에 컴퓨터를 가지게 된다. 하지만 어렸을 때는 자제력이 약해 부모의 강력한 통제가 필요하다. TV나 게임에 빠졌다고 자녀를 걱정하기 전에 우리 자신을 먼저 돌아보자. 요즘엔 TV 드라마나 인터넷 등에 빠진 어른들도 상당수다. 자녀를 위해 과감히 ‘보는 재미’를 포기해 보자. 

여덟째, 자녀와 적극적으로 대화하라. 존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 크게 다툰 적이 있다. 느닷없이 힘들게 합격한 보스턴대를 가지 않고 집 근처 커뮤니티 칼리지에 다니면서 돈을 벌겠다고 하는 게 아닌가. 아마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공부도 어렵고, 몸도 아프고, 환경적으로 모든 게 짜증이 났던 것 같다. 

“존, 엄마가 좋은 교육을 시키기 위해 얼마나 힘들게 일해 왔는지 잘 알 텐데,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니?” 아들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그러자 아들은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조차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엄마가 힘들게 일하는 게 싫어요. 그러니까 제가 나가 돈을 벌면서 공부하겠다는 거예요.” 

물론 그것은 고맙고 기특한 생각이다. 하지만 엄마의 심정을 더 깊이 헤아리지 못하고, 더 멀리 내다보는 눈을 가지지 못하고, 바로 앞에만 급급한 아들이 한심스러워 속이 상했다. 환경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의 꿈을 포기하겠다는 아들이 그저 안타까웠다. 더 이상 말을 하면 심하게 싸울 것 같아 편지를 쓰기로 했다. 그런데, 오히려 존은 그 편지를 받고 입을 굳게 닫아버렸다. 엄마의 진심을 알아주지 못하는 아들이 그저 섭섭했다. 그렇게 서로 말을 하지 않은 채 일주일을 보냈다. 

시간이 흐르니, 먼저 말을 꺼낼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기도했다. 또다시 일주일…. 어렵게 존의 이름을 불렀다. 아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에게 그간의 속사정을 털어놓았다. 나 역시 마음을 털어놓았고, 한참을 부둥켜안고 울었다. 서로의 진심을 이해하고 나니 더 가까워지는 계기가 됐다. 

“환경은 극복해야 하는 거야. 어떤 고난이 우리에게 온다고 해도 이겨내야 해. 하나님은 우리 편이시니까. 비가 온 뒤에 땅은 더 굳어지는 거야.” 

존은 보스턴대에 진학했고 기적처럼 4년 전액 장학금을 받았다. 지금은 미 외교관 장학생에 뽑혀 외교관 훈련을 받으며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부모들이여, 늘 자녀와 대화할 준비를 하고 기다려라.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역경의 열매] 황경애 (13) “큰 뜻 품는 자녀 원하면 함께 여행을 떠나세요”

[2010.02.10 17:33]트위터로 퍼가기 싸이월드 공감 페이스북으로 퍼가기    


여행은 꼭 필요하다. 여행은 삶에 활력을 주고 색다른 경험을 통해 보는 눈과 생각하는 마음을 넓혀준다. 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삶을 통해 간접적으로 인생 공부를 하게 한다. 세계 여러 곳을 다니다 보면 현장학습을 통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깨우치는 등 자연스럽게 삶의 철학도 습득한다.

그래서 나는 아홉 번째, 자녀들과 여행을 떠나라고 권하고 싶다. 여행을 하면 가족간에 끈끈한 정이 생긴다. 또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여행을 통해 자녀는 국제적인 감각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아이들이 어릴 땐 가까운 곳으로 여행을 다녔다. 중고등학생 때는 해외로 선교를 보냈다. 대학생 때는 외국에 교환학생으로 나가 공부하도록 했다. 큰딸은 스페인과 모로코에서 유학 생활을 하며 유럽을 여행했다. 또 해외 선교지를 다니도록 했더니 대학을 졸업할 때쯤엔 지구를 한 바퀴 돌게 됐다.

아들은 한국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 존은 자신의 뿌리를 더 공부하고 싶다며 한국행을 선택했다. 신촌이나 홍대 앞, 압구정동, 명동을 또래 친구들과 다니며 한국의 문화를 접했고, 주말에는 이들과 창덕궁이나 창경궁을 방문해 역사를 공부했다. 아들은 지금도 “한국 음식이 세계에서 제일 맛있다”고 한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한국인의 피는 속일 수 없나 보다. 여행이야말로 자녀 교육에 있어서 최고의 투자다.

마지막 열 번째, 자녀와 함께 공부하라. 나는 아이들이 어렸을 때 “공부해” “숙제해”라고 말한 적이 없다. 숙제를 도와준 적도 거의 없다. 내가 도와준다면 아이는 무엇이든 스스로 하려고 들지 않고 먼저 엄마를 찾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도서관에 자주 데려갔다. 그곳에서 스스로 공부하는 법에 익숙해지도록 했다. 막내딸 조이가 고등학생 때 미국 대표로 국제과학경시대회에 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다양한 과학잡지 등을 구독한 게 큰 도움이 됐다.

스스로 공부하는 아이로 키우고 싶다면 부모도 함께 공부해야 한다. 부모도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큰딸 그레이스가 백악관에서 인턴으로 일할 때 백악관에서 우리 가족을 초청한 적이 있다. 막내만 빼고 아들 존과 함께 백악관을 방문했다. 안내자를 따라 백악관 내부를 둘러보고 공원에 앉아 점심을 먹을 때 존에게 이렇게 말했다.

“언젠가 우리가 저 안에 들어가서 식사할 날이 오기를 기도한다.”

바라봄의 법칙. 평소 존경하는 조용기 목사님께서 항상 강조하시던 말씀이다. 나는 늘 이것을 마음속에 품고 살았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 11:1∼2)란 말씀도 있지 않은가.

“엄마, 어떤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에요?”라고 자녀들이 묻는다면 무슨 말을 해줄까.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훌륭하다고 가르칠 것인가. 공부만 잘하는 것과 공부도 잘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하나님을 찬양하니까 더 큰 지혜를 주셔서 공부도 잘하게 되었다는 믿음이 중요하다. 

“훌륭한 사람은 하나님 마음에 합당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이야. 또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고 사회와 나라와 세계를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사람이야.”

세상의 모든 엄마는 자녀들이 훌륭한 믿음의 소유자가 될 수 있도록 매일 기도해야 한다.

[역경의 열매] 황경애 (14·끝) 어려운 아이들 내 자식처럼 귀히 여겨 축복

[2010.02.12 16:07]트위터로 퍼가기 싸이월드 공감 페이스북으로 퍼가기    


7년 전 케냐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님의 간증을 들었다. “오늘 여러분은 이렇게 아름다운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지만 아프리카 케냐에서는 지금도 성전이 없어 나무 밑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비가 많이 오면 그나마 예배드릴 곳이 없어요. 오늘 성령님의 감동을 받으신 분께서 케냐를 위해 성전을 지어주십시오.”

어찌 보면 아프리카는 우리 가족에게 ‘원수’였다. 우리를 빈털터리로 만들었으니까. 그런데 선교사님의 말씀을 듣는데, 자꾸 ‘거룩한 부담감’이 밀려왔다.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함으로, 예수님의 사랑으로 아프리카 나이지리아 출신의 국제 사기단을 용서하자.’

그날 세 아이의 이름으로 성전 건축을 작정하고, 1만 달러를 헌금했다. 풍족해서 그런 큰돈을 드렸던 게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 그분의 사랑이 너무나 커 무엇이든 내어놓고 싶었을 뿐이다. 한데, 결과적으로 이것이 우리 가정에 씨앗이 될 줄이야….

후에 세 아이들이 대학교와 미 정부로부터 받은 장학금을 계산해보니 60만 달러. 거기에 보너스로 받은 장학금이 100만 달러. 세 자녀의 이름으로 건축헌금이라는 씨앗을 뿌렸더니 60배, 100배로 축복해주신 것이다. 성경말씀대로 이뤄진 것이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막 4:20).

후반기 인생을 힘차게 살고 있는 나의 비전은 선교사다. 현지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라기보다 물질로 후원하고 기도로 돕는 ‘보내기 선교사’다. 케냐 교회 건축을 시작으로 2007년엔 가나의 북쪽 타말레 지역에 어머니 기념교회를 지었다. 그곳에서 원주민 다곰바족을 위해 사역하는 선교사를 후원하고, 우물 파주는 일을 지금도 지원하고 있다. 그곳에 교회를 세우는 데 드는 비용은 3000달러 정도. 우물을 파는 데는 6000∼7000달러가 들어간다. 지금까지 여러 성도들의 정성어린 헌금과 나의 선교 후원금으로 10개의 교회를 건축했다.

2008년 9월 어머니 기념교회를 방문했다. 저절로 탄성이 쏟아졌고, 감동의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원주민들이 사는 조그만 마을에 최신식 건물로 멋지게 들어선 교회. 주일에는 예배를 드리는 아름다운 성전으로, 주중에는 아이들을 위한 학교로, 저녁에는 문맹자를 가르치는 교실로 활용되고 있었다. 내가 드린 헌금은 적은 액수였지만, 그것을 통해 큰 열매가 맺어지고 있었다. 이 밖에 동남아시아와 러시아 선교를 후원하고 있다. 올해는 남미 선교도 지원할 계획이다.

또 여름에는 한 달 정도 농어촌 미자립교회 목회자 자녀들을 초청해 영어캠프도 진행한다. 사실 이 사역은 지난 10년 동안 주변 지인들과 함께해 왔다. 이 일을 위해 농어촌선교회에서는 왕복 비행기표를, 어떤 분은 숙식을 제공하고, 미국의 교회들은 캠프를 열고, 나 역시 학생들을 후원해 함께해 왔다.

내 자녀가 귀하면, 남의 자녀도 귀하다. 하나님은 그렇게 세상의 엄마들을 창조하셨다. 그래서 나는 힘이 되고 능력이 되는 한 목회자 자녀들을 후원하고,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하고, 미국 유학생들을 나의 집으로 초청해 대접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다.

기도, 눈물, 헌신, 사랑, 시간, 물질의 씨앗을 심기를…. 특히 자녀의 이름으로 믿음의 씨앗을 심는 부모가 되기를 소망한다. 하나님은 믿음의 분량대로 축복하시기 때문이다.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 

위 글은 http://missionlife.kukinews.com 에서 퍼온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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