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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의 꽃과 처용단장
06/15/2020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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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의 꽃과 처용단장

 

우주의 삼라만상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물론 그것들은 물리적인 창조와 형성의 과정을 거쳐 존재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인식의 주체인 인간의 입장에서는 인간이 물리적 존재물을 어떻게 인식하는 가에 따라 존재물의 존재방식이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인간의 존재물에 대한 인식은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게 된다. 언어의 개념화를 통해 사물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가령 언어로서 규정되거나 인식되지 않은 어떤 꽃이 있다면 그 꽃은 해당 인식 주체에게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존재물로서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것이다. 그 꽃을 인식하고 그것에 알맞은 이름을 붙여 주었을 때 그 꽃은 드디어 의미를 가지고 나의 입장에서 존재하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이데거는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그러나 언어를 통해 존재물을 개념화하고 이름을 붙여주는 과정에는 잘못된 개념의 언어를 사용하거나, 인식주체의 잘못된 인식의 오류가 개재될 가능성이 크다. 불교의 유식론에서는 현상계의 모든 존재는 인식상의 오류를 통해 인식된 표상식(表象識)의 형태로 존재한다고 했다. 따라서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고 했을 때, 그렇게 규정한 존재는 본질과 다른 잘못 인식된 존재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우리나라 10대 시인 중 한 명인 김춘수 시인은 당초에는 사물에 의미를 붙여주기 위한 시를 썼다. 그러나 이후 언어의 한계성과 인식의 불완전성을 깊이 깨달아 무의미(無意味) 시를 쓰는 데 주력했다. 아래와 같이 이라는 시에서 처용단장(處容斷章)’이라는 시로 전환하여 단순한 이미지로만 시를 썼던 것이다.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처용단장(處容斷章) / 김춘수

 

11

 

바다가 왼종일

새앙쥐 같은 눈을 뜨고 있었다.

이따금

바람은 한려수도(閑麗水道)에서 불어오고

느릅나무 어린 잎들이

가늘게 몸을 흔들곤 하였다.

 

날이 저물자

내 늑골(肋骨)과 늑골(肋骨) 사이

홈을 파고

거머리가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베고니아의

붉고 붉은 꽃잎이 지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다시 또 아침이 오고

바다가 또 한 번

새앙쥐 같은 눈을 뜨고 있었다.

뚝 뚝 뚝, ()의 사과알이

하늘로 깊숙이 떨어지고 있었다.

 

가을이 가고 또 밤이 와서

잠자는 내 어깨 위

그해의 새눈이 내리고 있었다.

어둠의 한쪽이 조금 열리고

개동백의 붉은 열매가 익고 있었다.

잠을 자면서도 나는

내리는 그

희디흰 눈발을 보고 있었다.

 

12

 

삼월(三月)에도 눈이 오고 있었다.

눈은 라일락의 새순을 적시고

피어나는 산다화(山茶花)를 적시고 있었다.

미처 벗지 못한 겨울 털옷 속의

일찍 눈을 뜨는 남()쪽 바다,

그날 밤 잠들기 전에

물개의 수컷이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삼월(三月)에 오는 눈은 송이가 크고

깊은 수렁에서처럼

피어나는 산다화(山茶花)

보얀 목덜미를 적시고 있었다.

 

13

 

()이 걸어오고 있었다.

늙은 홰나무가 걸어오고 있었다.

한밤에 눈을 뜨고 보면

호주(濠洲) 선교사(宣敎師)네 집

회랑(廻廊)의 벽()에 걸린 청동시계(靑銅時計)

겨울도 다 갔는데

검고 긴 망또를 입고 걸어오고 있었다.

내 곁에는

바다가 잠을 자고 있었다.

잠자는 바다를 보면

바다는 또 제 품에

숭어새끼를 한 마리 잠재우고 있었다.

다시 또 잠을 자기 위하여 나는

검고 긴 한밤의 망또 속으로 들어가곤 하였다.

바다를 품에 안고

한 마리 숭어새끼와 함께 나는

다시 또 잠이 들곤 하였다.

 

*

 

호주(濠洲) 선교사(宣敎師)네 집에는

호주(濠洲)에서 가지고 온 해와 바람이

따로 또 있었다.

탱자나무 울 사이로

겨울에 죽두화가 피어 있었다.

()님 생일(生日)날 밤에는

눈이 내리고

내 눈썹과 눈썹 사이 보이지 않는 하늘을

나비가 날고 있었다.

한 마리 두 마리,

 

14

 

눈보다도 먼저

겨울에 비가 오고 있었다.

바다는 가라앉고

바다가 있던 자리에

군함(軍艦)이 한 척닻을 내리고 있었다

여름에 본 물새는

죽어 있었다.

물새는 죽은 다음에도 울고 있었다.

한결 어른이 된 소리로 울고 있었다.

눈보다도 먼저

겨울에 비가 오고 있었다.

바다는 가라앉고

바다가 없는 해안선(海岸線)

한 사나이가 이리로 오고 있었다.

한쪽 손에 죽은 바다를 들고 있었다.

 

15

 

아침에 내린

복동(福童)이의 눈과 수동(壽童)이의 눈은

두 마리의 금송아지가 되어

하늘로 갔다가

해 질 무렵

저희 아버지의 외발 달구지에 실려

금간 쇠방울 소리를 내며

돌아오곤 하였다.

한밤에 내린

복동(福童)이의 눈과 수동(壽童)이의 눈은 또

잠자는 내 닫힌 눈꺼풀을

더운 물로 적시고 또 적시다가

동이 트기 전

저희 아버지의 외발 달구지에 실려

금간 쇠방울 소리를 내며

돌아가곤 하였다.

 

*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은 아침을 뭉개고

바다를 뭉개고 있었다.

먼저 핀 산다화(山茶花) 한 송이가

시들고 있었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이들이 서넛 둘러앉아

불을 지피고 있었다.

아이들의 목덜미에도 불 속으로도

눈이 내리고 있었다.

 

16

 

모과(木瓜)나무 그늘로

느린 햇발의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지는 석양(夕陽)을 받은

적은 비탈 위

구기자(枸杞子) 몇 알이 올리브빛으로 타고 있었다.

금붕어의 지느러미를 쉬게 하는

어항(魚缸)에는 크낙한 바다가

저물고 있었다.

Vou 하고 뱃고동이 두 번 울었다.

모과(木瓜)나무 그늘로

느린 햇발의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장난감 분수(噴水)의 물보라가

솟았다간

하얗게 쓰러지곤 하였다.

 

17

 

새장에는 새똥 냄새도 오히려 향긋한

저녁이 오고 있었다.

잡혀온 산새의 눈은

꿈을 꾸고 있었다.

눈 속에서 눈을 먹고 겨울에 익는 열매

붉은 열매,

봄은 한 잎 두 잎 벚꽃이 지고 있었다.

입에 바람개비를 물고 한 아이가

비 개인 해안통(海岸通)을 달리고 있었다.

한 계집아이는 고운 목소리로

산토끼 토끼야를 부르면서

잡목림(雜木林) 너머 보리밭 위에 깔린

노을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18

 

내 손바닥에 고인 바다,

그때의 어리디 어린 바다는 밤이었다.

새끼 무수리가 처음의 깃을 치고 있었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오는 동안

바다는 많이 자라서

허리까지 가슴까지 내 살을 적시고

내 살에 테 굵은 얼룩을 지우곤 하였다.

바다에 젖은

바다의 새하얀 모래톱을 달릴 때

즐겁고도 슬픈 빛나는 노래를

나는 혼자서만 부르고 있었다.

여름이 다한 어느 날이던가 나는

커다란 해바라기가 한 송이

다 자란 바다의 가장 살찐 곳에 떨어져

점점점 바다를 덮는 것을 보았다.

 

19

 

팔다리가 뽑힌 게가 한 마리

길게 파인 수렁을 가고 있었다.

길게 파인 수렁의 개나리꽃 그늘을

우스꽝스런 몸짓으로 가고 있었다.

등에 업힌 듯한 그

두 개의 눈이 한없이 무겁게만 보였다.

 

110

 

은종이의 천사(天使)

울고 있었다.

누가 코밑수염을 달아 주었기 때문이다.

제가 우는 눈물의 무게로

한쪽 어깨가 조금 기울고 있었다.

조금 기운 천사(天使)

어깨 너머로

얼룩암소가 아이를 낳고 있었다.

아이를 낳으면서

얼룩암소도 새벽까지 울고 있었다.

그해 겨울은 눈이

그 언저리에만 오고 있었다.

 

111

 

울지 말자,

산다화(山茶花)가 바다로 지고 있었다.

꽃잎 하나로 바다는 가리워지고

바다는 비로소

밝은 날의 제 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발가벗은 바다를 바라보면

겨울도 아니고 봄도 아닌

설청(雪晴)의 하늘 깊이

울지 말자,

산다화(山茶花)가 바다로 지고 있었다.

 

112

 

겨울이 다 가도록 운동장(運動場)

짧고 실한 장의자(長椅子)의 다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겨울이 다 가도록

아이들의 목덜미는 모두

눈에 덮인 가파른 비탈이었다.

산토끼의 바보,

무르팍에 피를 조금 흘리고 그때

너는 거짓말처럼 죽어 있었다.

봄이 와서

바람은 또 한번 한려수도(閑麗水道)에서 불어오고

겨울에 죽은 네 무르팍의 피를

바다가 씻어 주고 있었다.

산토끼의 바보,

너는 죽어 바다로 가서

밝은 날 햇살 퍼지는

내 조그마한 눈웃음이 되고 있었다.

 

113

 

봄은 가고

그득히 비어 있던 풀밭 위 여름,

네 잎 토끼풀 하나,

상수리나무 잎들의

바다가 조금씩 채우고 있었다.

언제나 거기서부터 먼저

느린 햇발의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탱자나무 울이 있었고

탱자나무 가시에 찔린

(西)녘 하늘이 내 옆구리에

아프디 아픈 새발톱의 피를 흘리고 있었다.




김춘수 시인

 

김춘수, 꽃, 처용단장, 무의미 시, 존재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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