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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광규 시모음
04/13/2020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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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림돌 

 

잘 아는 스님께 행자 하나를 들이라 했더니

지옥 하나를 더 두는 거라며 마다하신다

석가도 자신의 자식이 수행에 장애가 된다며

아들 이름을 아예 장애라고 짓지 않았던가

우리 어머니는 또 어떻게 말씀하셨나

인생이 안 풀려 술 취한 아버지와 싸울 때마다

자식이 원수여! 원수여!” 소리치지 않으셨던가

밖에 애인을 두고 바람을 피우는 것도

중소기업 하나를 경영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고 한다

누구를 들이고 둔다는 것이 그럴 것 같다

오늘 저녁에 덜되 먹은 후배 놈 하나가

처자식이 걸림돌이라고 푸념하며 돌아갔다

나는 못난 놈! 못난 놈!” 훈계하며 술을 사주었다

걸림돌은 세상에 걸쳐 사는 좋은 핑계거리일 것이다

걸림돌이 없다면 인생의 안주도 추억도 빈약하고

나도 이미 저 아래로 떠내려가고 말았을 것이다

 

 

말밤나무 아래서 

 

나는 이 바람이 어디서 오는지 알죠

바람을 보내는 사람이 누군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소리가 뭐야?”라고 물었을 때

당신 수다야라고 대답했던 사람이죠

 

아침 햇살 살결과 이른 봄 체온

백자엉덩이와 옥잠화 성교

줄장미 생리하혈과 석양의 붉은 볼

물봉선 입술과 대지의 살 냄새를 가진 사람이죠

 

나는 이 바람이 어디서 오는지 알죠

바람을 보내는 사람이 누군지

죽음이 뭐야?”라고 물었을 때 간결하게

당신을 못 보는 것이지라고 대답했던 사람이죠

 

나는 바람이 어디서 오는지 알죠

바람을 보내는 사람이 누군지

말밤나무 몸통과 말밤 눈망울

말밤나무 손가락을 가진 사람이죠.

 


몸관악기 

 

뒤축 다 닳은 구두가

살이 부서진 우산을 들고 퇴근한다

 

당신의 창의력은 너무 늙었어요!

나는 어린 사장의 말이 뼈아프다

 

망가진 우산에서 쏟아지는 빗물이

슬픔의 나이를 참으라고 참아야 한다고

기운 어깨를 적시며 다독거린다

 

, 계속 이렇게 살 거야?

심란한 비바람이

넥타이를 움켜잡고 흔들어댄다

 

빗물이 들이치는 낡은 포장마차 안

술에 젖은 몸관악기가

악보 없이 운다.

 

 

미안하다, 수캐 

 

수캐를 향나무 아래 매어놓고 키운 적이 있다

쇠줄에 묶였으나 나처럼 잘 생긴 개였다

나는 창문을 열고 그 개를 가끔 바라보았다

그 개도 나를 멀뚱히 쳐다보며 좋아했다

우리는 서로 묶인 삶을 안쓰러워하였다

언젠가 한밤중, 창이 너무 밝아 커튼을 올렸다가

달빛 아래 눈부신 광경을 보았다

희고 예쁜 암캐가 와서 그의 엉덩이를 맞대고 있었다

화려한 창조 작업의 황홀경, 나는 방해가 될까봐

얼른 소리를 죽여 커튼을 내렸다

엄마 아빠의 그것을 본 것처럼 미안했다

나는 그 사건을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다

그 개의 사생활을 그 개의 비밀을 지켜 주고 싶었고

그 암캐가 향나무 아래로 자주 오길 기대했다

암캐는 안보이고 어느 날부터 수캐가 울기 시작했다

동네 사람들은 개가 울어 재수 없다고 항의했다

나는 개장수에게 전화하라고 아내에게 화를 냈다

헌 군화를 신은 개장수가 오토바이를 타고 왔다

개장수는 철근으로 짠 상자를 마당에 내려놓았고

당황한 개는 오줌을 질질거리며 주저앉았다

개장수는 군홧발로 마구 차며 좁은 철창에 개를 구겨 넣었다

한두 번 낑낑대다 발길질에 항복하던 슬픈 개

나는 공포에 가득 찬 개의 눈길을 피했다

폭력 앞에 비굴했던 기억이 떠올라 괴로웠다

개는 오토바이에 실려 짐짝처럼 골목을 빠져나갔고

나는 절망의 눈초리가 퍼붓던 개의 신음소리를 들었다

얼마 후, 골목에서 어슬렁거리던 강아지 떼를 보았다

아비 없이 쓰레기통을 뒤져서 먹이를 구하는

설설대는 강아지들을 거느린 슬픈 암캐

나는 그 암캐가 향나무 아래로 몇 번을 찾아왔었는지

팔려간 수캐에게 몇 번째 암캐였는지 모른다

수캐는 나에게 그걸 말하지 않았고 나는

알았어도 그걸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달빛을 잘 받는 목련나무 아래 수캐를 매어놓았더라면

그가 더 황홀한 일생을 보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미안하다, 평생을 묶여 살다 도살장으로 실려 간 수캐

 

 

무량사 한 채 

 

오랜만에 아내를 안으려는데

'나 얼마만큼 사랑해'라고 묻습니다

마른 명태처럼 늙어가는 아내가

신혼 첫날처럼 얘기하는 것이 어처구니없어

나도 어처구니없게 그냥

'무량한 만큼'이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무량이라니!

그날 이후 뼈와 살로 지은 낡은 무량사 한 채

주방에서 요리하고

화장실에서 청소하고

거실에서 티비를 봅니다

내가 술 먹고 늦게 들어온 날은

목탁처럼 큰소리를 치다가도

아이들이 공부 잘하고 들어온 날은

맑은 풍경소리를 냅니다

나름대로 침대 위가 훈훈한 밤에는

대웅전 나무문살 꽃무늬단청 스치는

바람소리를 냅니다

 

 

별국 

 

가난한 어머니는

항상 멀덕국을 끓이셨다

 

학교에서 돌아온 나를

손님처럼 마루에 앉히시고

 

흰 사기그릇이 앉아 있는 밥상을

조심조심 들고 부엌에서 나오셨다

 

국물 속에 떠 있던 별들

어떤 때는 숟가락에 달이 건져 올라와

배가 불렀다

 

숟가락과 별이 부딪히는

맑은 국그릇 소리가 가슴을 울렸는지

 

어머니의 눈에서

별빛 사리가 쏟아졌다.

 

 

소주병 

 

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주면서

속을 비워간다

 

빈 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다닌다


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

문 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보니

마루 끝에 쪼그려 앉은

빈 소주병이었다.

 

 

수종사 풍경(風磬)

 

양수강이 봄물을 산으로 퍼올려

온 산이 파랗게 출렁일 때

 

강에서 올라온 물고기가

처마 끝에 매달려 참선을 시작했다

 

햇볕에 날아간 살과 뼈

눈과 비에 얇아진 몸

 

바람이 와서 마른 몸을 때릴 때

몸이 부서지는 맑은 소리.



아내 

 

아내를 들어 올리는데

마른 풀단처럼 가볍다

 

두 마리 짐승이 몸을 찢고 나와

꿰맨 적이 있고

또 한 마리 수컷인 내가

여기저기 사냥터로 끌고 다녔다

 

먹이를 구하다

지치고 병든 암사자를 업고

병원으로 뛰는데

 

누가 속을 파먹었는지

헌 가죽부대처럼 가볍다.

 

 

얼굴반찬 

 

옛날 밥상머리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얼굴이 있었고

어머니 아버지 얼굴과

형과 동생과 누나의 얼굴이 맛있게 놓여 있었습니다

가끔 이웃집 아저씨와 아주머니

먼 친척들이 와서

밥상머리에 간식처럼 앉아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외지에 나가 사는

고모와 삼촌이 외식처럼 앉아 있기도 했습니다

이런 얼굴들이 풀잎반찬과 잘 어울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내 새벽 밥상머리에는

고기반찬이 가득한 늦은저녁 밥상머리에는

아들도 딸도 아내도 없습니다

모두 밥을 사료처럼 퍼 넣고

직장으로 학교로 동창회로 나간 것입니다

밥상머리에 얼굴반찬이 없으니

인생에 재미라는 영양가가 없습니다.

 

 

완행버스로 다녀왔다 

 

오랫만에 광화문에서

일산 가는 완행버스를 탔다

넓고 빠른 길로

몇 군데 정거장을 거쳐 직행하는 버스를 보내고

완행버스를 탔다

 

이곳저곳 좁은 길을 거쳐

사람이 자주 타고 내리는 완행버스를 타고 가며

남원추어탕집 앞도 지나고

파주옥 앞도 지나고

전주비빔밥집 앞도 지나고

스캔들 양주집 간판과

희망맥주집 앞을 지났다

고등학교 앞에서는 탱글탱글한 학생들이

기분 좋게 담뿍 타는 걸 보고 잠깐 졸았다

그러는 사이 버스는 뉴욕제과를 지나서

파리양장점 앞에서

천국부동산을 향해 가고 있었다

 

천국을 빼고는

이미 내가 다 여행 삼아 다녀본 곳이다

완행버스를 타고 가며

남원, 파주, 전주, 파리, 뉴욕을

다시 한 번 다녀온 것만 같다

고등학교도 다시 다녀보고

스캔들도 다시 일으켜보고

희망을 시원한 맥주처럼 마시고 온 것 같다

직행버스를 타고 갈 수 없는 곳을

느릿느릿 완행버스로 다녀왔다

 


폭설 

 

술집과 노래방을 거친

늦은 귀가길

 

나는 불경하게도

이웃집 여자가 보고 싶다

 

그래도 이런 나를

하느님은 사랑하시는지

 

내 발자국을 따라오시며

자꾸 자꾸 폭설로 지워 주신다.

 

 

공광규, 시모음, 소주병, 아내, 무량사, 걸림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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