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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티오에서 상추 기르기
05/19/2011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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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은퇴하면 야산이 내 어깨를 둘러싼 곳이나 풀을 따서 시냇물에 흘려보낼 수 있는 곳에 가서 농군이 되기로 했었다. 네이버에서는 교통지도를 위성사진으로 바꾸어 많은 땅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물색하기도 했다.


이제 미국에 온지 벌써 4년이 꽉 차 온다. 처음에는 미국의 50개 주 모두 내가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앨라스카 설원에서 나 자신으로 침잠할까, 하와이에서 파도소리에 맞추어 허리춤을 추어 볼까, 콜로라도에서 산맥의 정기를 받아 볼까? 아니면 뉴욕이나 엘에이에서 노래방과 사우나를 다닐 것인가?


나는 하늘 아래 여러 동네를 마다하고 내가 익숙한 캘리포니아의 데이비스라는 곳에서 짐을 풀었다. 옛날에 살던 동네라는 이유 이외에 내가 이곳에 있을 특별한 이유는 없다. 중고등학교를 이곳에서 다닌 아이들에겐 고향 같은 곳이긴 하다.


나는 이곳에 임시로 살고 있다. 아내의 얘기는 아이들이 자리 잡고 나면 그들과 적당히 떨어진 곳에 가서 정착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나는 남의 나라에서도 정착을 못하는 이중의 디아스포라인 셈이다. 소박한 집이라도 내 집이 있으면 미국생활에 더 애착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는 아쉬움도 있다. 금상첨화라면 미국에서도 한적한 시골에 가서 터를 넓게 잡고 화초를 기르고 갖가지 채소를 심어 먹는 생활을 하고 싶다.


내가 세 들어 있는 콘도에는 나무로 담장을 한 15평 남짓의 패티오가 있다. 10평 정도는 세멘트로 포장되었고, 그나마 나머지 땅은 아름드리 고목이 하늘을 온통 가려 대낮에도 방에 불을 켤 정도로 그늘이 졌다. 지난번에는 바람이 세게 불어 큰 가지 하나가 부러져 지붕을 부수고 내려앉을 뻔 했다. 집 주인에게 사실을 말하고 나무를 베어내자고 요청했다. 나의 진짜 속셈은 나무가 없어져 햇빛이 잘 들게 되면 여분의 땅에 무언가를 심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나는 고목이 베어진 옆자리에 자갈을 며칠에 걸쳐 골라낸 다음 거름을 듬뿍 붓고 한 평 반 정도의 흙장난 같은 밭을 만들었다. 홈디포에서 토마토, 가지, 파프리카 모종을 사다가 세 줄을 채웠다. 그리고 나머지 땅에는 한국 그로서리에서 겹 상추와 모듬 상추의 씨앗을 사다 뿌렸다.


씨앗을 뿌린 후 담배 피우러 나갈 때마다 물을 주고 정성을 들인 결과인지 유산된 아이가 하나도 없이 모두가 파릇파릇 싹을 틔웠다. 나는 아침저녁으로 쪼그리고 앉아 개미 관찰하듯 식물의 오묘한 성장과정을 응시했다. 저마다 다른 모습과 방식으로 자라나는 채소들은 자신의 앞날을 스스로 책임지는 실존적인 인간들 같았다.


일주일 전부터는 씨를 되게 뿌린 곳에서 상추를 솎아내어 아내와 아침에 샐러드를 만들어 나누어 먹는다. 녹차의 세작과 같이 어린 잎사귀엔 식물의 정기가 모두 모여 있다는 말을 그대로 믿으며 아내에게 내 것을 덜어준다. 아내는 드디어 회개한 이교도가 되어 고맙고 감격한 눈빛으로 어쩔 줄 모른다.


어제 아내와 나는 상추를 얼마의 속도와 방법으로 뜯어 먹어야 하는지에 대해 말다툼했다. 상추란 주먹만해지면 잎사귀를 뜯어 먹는 것이라고 내가 주장하면, 아내는 상추가 너무 되게 심어져 있어 자꾸만 솎아 내야 한다는 반론이다. 아내는 막무가내로 플라스틱 바가지를 옆에 놓고 마치 실험포에서 식물을 다루듯 상추를 조심스럽게 뽑는다. 그 모습이 참으로 행복해 보인다.


화초와 채소를 기르는 것은 취미를 넘어서는 즐거움이 있다. 식물이 자라나는 모습에서 자연의 경이로움을 느끼고, 식물이 병들고 시들 때에는 한없는 자비의 마음이 생겨 내 자신이 순수해 지는 것 같다. 덤으로는 만고에 공통분모가 없을 듯한 아내와 나 사이에 논쟁을 벌일 일이 생겨서 좋다.


내친 김에 나무 울타리 넘어 바깥에는 깻잎, 쑥, 그리고 화초로는 분꽃, 봉숭아, 채송화, 코스모스 씨를 뿌렸다. 싹이 겨우 트기 시작했지만 나는 벌써 시집 못간 딸의 손과 발의 스무 개 가락에 봉숭아물을 들여 줄 생각에 잠겨 있다.


황대권이라는 사람은 교도소의 담벼락 추녀 밑에서도 온갖 화초와 식물을 키우고 ‘야생초 편지’라는 책까지 썼다. 나는 교도소보다 넓고 자유스런 곳에 살고 있으므로, 마음먹기에 따라 그보다 훨씬 행복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바라던 농군이 되기 시작하였으니 반드시 행복해질 것으로 믿는다. 

 

                       우리집 콘도의 패티오 일부와 채소밭, 밭 왼쪽에는 베어낸 고목의 그루터기

 

채소밭 맨 위 쪽부터 토마토, 가지, 파프리카, 청양고추, 겹상추, 모듬상추



 

나무 울타리에 심은 쑥


 

울타리 바깥의 화단. 앞으로부터 채송화, 봉숭아, 분꽃, 깻잎

 

울타리 앞에 심은 코스모스


 


보잘 것 없으나 나에게 귀중한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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