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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해서 죽은 노인
02/03/2020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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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해서 죽은 노인 / 박규환

 

 

새벽 산책길에서 자주 만나 알게 된 노인 한 분을 우연히 거리에서 만났다. 그 분의 말이, 나도 알고 있는 또 다른 노인 한 분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며칠 전에도 산책길에서 마주친 일이 있었는데 갑자기 죽었다니 허망한 생각이 들어 “언제? 왜 죽었대요?”하고 다급하게 묻는 나에게 그는 “왜는 뭐, 심심해서 죽었겠지”하는 심드렁한 대답이었다.

그런데 그 말하는 품이 죽는다는 일이 그렇게 아쉬울 것도 무서울 것도 없다는, 그냥 살다가 할 일이 없어 심심해지면 심심치 않을 방법으로 죽음을 손쉽게 택해도 되는 것 같은 태도였다. 심심하면 장기도 두고 바둑도 두는 것처럼 죽는 것을 그냥 심심풀이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아 그게 달관이란 것일까 혹은 생사일여(生死一如)를 몸소 깨달은 대인의 풍모랄 것인가. 그의 죽음에 놀랐던 내가 오히려 민망했다. 하긴 장기나 바둑처럼 세월을 허비(사람에 따라서는 결코 허비랄 순 없겠지만)하는 것이나 죽어서 무덤위에 흘러가는 세월이 뭐가 다르냐는 투다. 그래 자기도 심심해서 살기가 싫어지면 그렇게 손쉽게 죽어도 괜찮겠다는 각오가 되어 있기 때문인지 모를 일이다.

심심한 일이거나 외로운 일이거나 괴로운 일이거나 누구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는, 자기 스스로 철저히 자기만이 해결해야 되는 것이 특히 노인의 과제이고 보니 할 수 없이 죽음으로 끝맺어야 되는 것이랄 때 늙는다는 일은 분명 슬픈 일임에 틀림없다. 누가 그를 위해 심심해 주고 외로워해 주고 괴로워해 주고 대신 죽어 주겠는가!

어찌됐건 부음을 전한 노인의 말대로라면 노인은 병들지 않고 심심해서도 죽나보다. 얼마나 생명의 가치가 퇴색했으면 ‘심심’해서 죽었을까! 하지만 노인이 “심심”하다는 말은 그냥 지나치면서 흘려듣기엔 너무나 절실하다. 젊은 사람이 공휴일 같은 때 때로 맛보는 일시적인 ‘무료(無聊)‘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날로 분주한 생활 속에 찾아드는 잠시의 ’무료‘라면 그야 복된 순간일 수도 있으련만, 밤이나 낮이나 설혹 누군가가 베풀어 주는 관심 따위가 별로 달가울 것도 없는 변함없는 공백의 세월은 능히 노인을 죽일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산다는 것이 ’심심‘하지 않기 때문에 유지되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 그건 곧 생을 영위(營爲)하는 일인데 그게 끝나면 동시에 삶이 끝나는 것 아니겠는가! 갚아야 될 빚이 있고 받아야 될 보수가 있으며 사랑해야 될 욕망이 있을 때 그게 사는 것일 터인데, 그게 아니라면 만사휴의(萬事休矣)랄 수 있지 않겠는가.

죽은 노인이 병이 든 것도 아니고 교통사고도 아닌데 그렇게 되었다면 ‘심심’해서 죽었단 말이 가장 근사한 추측일 듯하다. 노인에겐 ‘심심’한 것 외에 별로 있을 것이 없다. 오래 앓다가 죽는 사람도 ‘심심’해서 죽기는 마찬가지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오래 병상에 누웠으니 정신적이거나 육체적인 활동을 할 수 없으므로 ‘심심’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 그는 결국 심심해서 죽는 것이 된다. 물론 상처가 깊거나 병상(病狀)이 짙어서 견딜 수가 없다 보면 누구와도 즐길 수가 없겠으니 그게 심심할 일이고 도시 재미란 게 없으니 그래서 죽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죽은 다음 저 세상이 있다면 거기선 심심할 일 같은 건 없을는지 모르니까……

요즘 넘쳐나는 게 노인인데 그 대부분이 할 일이 없다. 잊어버리지 않을 정도로 노인에게도 일자리를 주어야 된다느니 하는 은전(恩典)이나 복음(福音)이 어디선가 때때로 들려오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버스의 경로석만큼이나 크게 혜택이 돌아오는 것 같지도 않다. 지드의 “부지런한 벌은 슬플 줄을 모른다.”던 말은 할 일이 있고 바쁘게 살아야 슬픔도 잊고 ‘심심’하지도 않을 터인데 ‘부지런한 벌’이라도 될 노인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냥 할 일이 없는 것뿐만이 아니다. 사는 것같이 사는 것도 아니면서 세월 보내며 살아가는 데 슬픔과 아픔과 괴로움은 분명 이겨내기 어려운 노릇이다. 한 번 가면 다시는 올 수 없는 세월인데 그게 아깝지 않고 오히려 지겹다는 생각이 든다는 거야말로 슬픈 일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참으로 얼마 남지 않은 세월인데 말이다.


매일이 꼭 같다는 건 얼마나 비정한 일인가. 일년 내내 봄이기만 하고 마찬가지로 일년 내내 겨울이기만 하다면 나라도 살고 싶지 않을 것 같다. 그러자니 날마다가 꼭 같다는 것, 그게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그렇게도 빨리 흐르는 시간이 오히려 더디고 견디기 힘들다니 생각만 해도 슬픈 일이다. 그래 ‘심심’해져서 죽고 싶을 때 신은 그 뜻을 받아 들여 결국 불러가게 되는 것이리라.

‘심심’해서 죽었다는 부음을 내게 전한 그 노인의 표현이야말로 정곡을 찌른 명언임직하다. 죽고 싶도록 ‘심심’한 자기 체험을 통한 추리가 아니었을까! 이게 어찌 여기 나온 죽은 자나 산 자만의 이야기리오. 대부분의 노인들이 경험하는 변화 없는 절망의 나날에 염증을 느끼고 ‘심심’해서 죽어가는 것이리라. 여기서 또 하나의 ‘심심’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오래전, 젊었을 때 읽었던 기억이 있는 이상(李?)의 <권태(倦怠)>라는 수필이다. 정확한 건 기억에 없지만 대강 아래와 같은 줄거리였던가 싶다. 이상은 여기서 여러 가지 ‘권태’의 모습을 그의 독특한 언어의 기교와 시니컬한 패러독스로 묘파하고 있다. 막 나중엔 빈민촌(요즘은 달동네라고도 하는가본데)의 어린애들이 노는 광경을 그리고 있는데 5-6명의 어린애들이 한길 복판에서 놀고 있는 모습이다. 적발동부(赤髮銅膚)의 반나군(半裸群)인데 그들이 벗어 제낀 웃통만으론 성별마저도 분간하기가 어렵다. 이 빠진 그릇을 여기 사람들은 버리지 않으므로 사금파리도 벽돌조각도 없다. 그래 그들은 돌멩이를 집어 온다. 그리고 또 풀을 뜯어 온다. 풀! 이처럼 평범한 것이 또 있을까. 그들은 초록색은 무엇이거나 다시 없이 심심하다.

그렇지만 할 수 없다. 돌멩이로 풀을 짓찧는다. 푸르스름한 물이 돌멩이에 염색된다. 그럼 그것들은 팽개치고 또 다른 돌멩이와 풀을 가져온다. 같은 짓을 반복하지만 10분이면 이내 권태가 온다. 풀도 돌도 모두 싱거워진 것이다. 하늘을 향하여 팔을 뻗치고 소리를 질러 본다. 하늘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푸르냐고 조물주에 대한 비명이 아니고 무엇이랴.

아이들은 배고파 짖을 줄도 모르는 개들과 놀 수도 없다. 모이 찾느라 눈이 벌건 닭들과 놀 수도 없다.저희들 끼리 놀 수밖에……. 장난감 하나 없는 그들은 영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래 막 나중엔 모두들 길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억지로 똥이나 싼다는 줄거리였던 듯싶다. 노인은 삶의 끝은 죽음이라는 것쯤 다행히도 알고 있었으니 ‘심심’해서 죽을 수도 있겠지만, 애들은 처음부터 심심하게 태어났으니 사는 것이란 모두 이런 것인 줄 알기 때문에 죽을 것까지는 연구하지 못하고 그냥 똥이나 싸는 것이 아니었을까. 거기다 또 그들은 아직 산다는 것밖에 죽는다는 것이 있는 줄을 모르니 아무리 심심해도 죽는다는데 생각이 미치지 않을는지 모를 일이다.

딴 이야기지만 내가 사는 집 바로 건넛집에 80도 중반은 넘어 보이는 노파가 한 분 살고 있다. 아들과 며느리는 직장에 나가는 것 같고 손주 애가 하나 있는 것 같은데 아마 대학생이지 싶다. 하니까 모르긴 해도 이 노파가 하루 종일 집을 지키는가 싶은데 날씨가 좋고 따뜻한 날이면 대문을 열어 놓고 그 문턱에 앉아서 오가는 사람들이나 바라다보면서 시간을 보낸다. 따라서 나도 들고 날 때마다 그 노인을 만나기가 쉬운데 인사를 드리면 그렇게 반가워할 수가 없다.

얼마나 ‘심심’한 세월이랴! “나는 저렇게는 오래 살지 말아야할 터인데……”가 그 노파를 만날 때마다의 나의 생각이다.



박규환, 수필, 심심해서 죽은 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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