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unrhee
소정(insunrhee)
Arizona 블로거

Blog Open 07.08.2008

전체     879046
오늘방문     200
오늘댓글     7
오늘 스크랩     0
친구     254 명
Blog News Citizen Reporter
2015 Koreadaily Best Blog
2014 Koreadaily Best Blog
2013 Koreadaily Best Blog
2011 Koreadaily Best Blog

  달력
 
만년 소녀 내 친구 은희
10/31/2019 17:42
조회  715   |  추천   9   |  스크랩   0
IP 184.xx.xx.174

두달 후 워싱톤 DC를 방문 하려고 한다. 
평생 파마 한번 안해 본 단발머리의 웃음기 가득한 만년 소녀, 

내 친구 은희도 만나 보고, 그녀의 그림 전시회도 볼겸,  DC 구경의 기대로 마음이 부푼다.


은희와 나는 같은 초등학교와 같은 대학교를 다닌 고향 친구이니 
보통 인연이 아니다. 
어쩌면 형제 만큼, 아니 형제 보다 더 가까운 사이.
그녀와의 추억은 지금으로부터 50 년전으로 거슬려 올라갈 수가 있으니까.

친구의 집은 우리 시골 동네 유일한 의원이었다. 
학교 가는 길목에 있는 그녀의 집에 어쩌다 놀러가면 아주 낯설은 냄새들이 났었다. 
첫째는 소독약 냄새.
청결이 그 집 제일의 신조였을 것이 틀림없다.

당시로선 그림의 떡 같던 현대식 입식 구조의 그애의 집엔, 
친구 아버지 박의원님이 흰 가운을 입고 왔다갔다 하셨다.
우리는 시골서 의원을 하니 돌팔이 의사가 아닐까 의심한 적도 있었는데, 
경성 의대도 수석으로 졸업하셨고, 농부와 소독약 문제로 대통령 상까지 받으셨다는 것을 

최근에 아버지를 하나님 나라로 떠나 보낸 딸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항상 기분이 좋으시고 친절한 우리 아버지와 너무도 다른 분위기의, 

엄하고 무서운 인상을 풍기시던 박의원님과 함께
친구의 키 큰 엄마도 초등학교 선생님 출신이어서 
우리 시골에는 어울리지 않는 뭔가가 있었다. 
나는 괜히 주눅이 들게 만드는 그 집에는 가고 싶지 않아서 정 심심하면 몰라도 
자주 놀러가지 않았다. 

두째로 병원에 연달아 붙어있는 살림 집은 부자집 냄새도 폴폴 피웠다.

우리들은 싸구려 얼음 덩어리도 사치였던 때 
상상도 못해 본 냉장고와 아이스크림 만드는 기계까지 갖출 정도로 문화 수준이 달랐었다.
우리 동네 전체에 중학교에 하나 밖에 없는 피아노까지 갖추었다면 

더 할 말이 없을 것이 아닌가?   

초등학교 교육배경 밖에 없으신 우리 엄마와 아버지는 

자영업을 하셨기 때문에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그래서 그런지 어른끼리 가깝게 지내지 못하셨다. 


그렇지만 그집도 아이들이 7 남매나 되고 우리 집도 7 남매로 많을새 
제일 큰언니가 우리 언니보다 나이가 조금 많았다. 
그 다음 오빠가 하나 있었고 나와 은희가 같은 나이가 되고, 
동생들도 넷, 줄줄이 나이가 같았다.  
그래서 다 같은 초등학교 동문들로 추억을 공유할 수 있는 특별한 인연.

초등학교 다니기 전 은희가 우리 집에 와서 소꼽 놀던 때의 기억 하나 생생한 것을 꺼내 본다.
그때 은희는 천역덕스럽게 
“얘, 너 아니?  깡통에 물을 붓고 밥을 할 때 
또 물을 붓고 끓이고, 또 물을 붓고 끓이면서 밥을 하면 
밥알이 한도 없이 길게 커진다.”라고 이야기를 했다. 
그 얘기가 안 믿어져 눈을 크게 떳더니 정색을 하고 이겨 버리는 것이었다.  
처음엔 안 믿었는데 하도 우기니 반신반의 하게 만들어서 

한번 나도 실험을 해 봐야지 했었다. 
은희가 보통 애들과는 많이 달랐던 것을 그 말을 곱씹을 때마다 느꼈다.

그애가 조숙하여 다른 보통 애들과 다를 뿐만 아니라 
얼마나 철학적인 아이였던가를 말해주는 일화가 있다.
"나는 밥을 꼬박꼬박 먹는 것이 너무 속된 것 같아."하며 괜히 자주 굶었다.  
먹을 것만 있으면 동생들에게 빼앗길까봐 혼자 입에 넣던 가난한 시절의 어린애로서 
나는 그애가 조금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해서 그애의 가족 모두가 다 키들이 크고 덕대가 좋았는데도 
은희만 키가 자라지 않고 깡 마르고 비실비실했다. 
가끔 앓기까지 했는데 예의 밥 굶는 버르장머리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2, 3 학년 때는 늑막염으로 많이 아팠던 것 같다. 
몇달씩이나 학교를 결석했다. 


시골 초등학교는 세 반 밖에 없었는데 그애는 남녀 혼합 반, 나는 여자 반에 있었다. 
그애가 아픈 바람에 나는 6 학년 때 문제없이 전교 어린이 회장도 혼자 차지하고, 

졸업할 때 일등상도 받았다.

박의원님이 화가 많이 나셨다는 후문이었다.

나는 인천으로 중학교를 갔는데 그애는 시골 중학교로 남겨졌다. 
언니 오빠가 있는 서울로 중학교 3학년 때야 비로소 전학하여 합세한 것은 건강 문제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중 들으니 내가 예쁜 교복을 입고 인천에서 내려가면 그렇게나 부러웠었다고 한다.
그애가 이화여고를 당당히 입학하고서부터 나를 이긴 값에 맘이 활짝 피었던 것 같다.  

공부는 딴전이고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던 나는  
시험 과목이 제일 적고 학비가 제일 싼 국립대학을 지원했다.  
선생님이 만류했지만 효녀의 심정으로 학비가 싸다는 이유로 다른 것은 재지 않았다. 

은희가 자기도 같은 미술대학을 간다하며, 

나도 서울로 미술공부를 다니지 않으면 안된다고 우기며 강력히 이끌어 주었다. 
그애가 그렇게 해주지 않았으면 결코 미술대학 근처도 못 갔을 것이다. 
은희가 다니던 국제 미술학원에 등록하여 
마지막 몇달동안 인천에서 서울까지 밤기차를 타고 열심히 다닌 것이 

큰 도움이 되었으니 평생 고마운 일이다.


그 덕을 본 사람이 하나 더 있는데 종민이다. 
내가 학원에서 얻어다가 준 구성 그림을 모방하여 열심히 그린 덕에 

홍익미대에 합격할 수 있었노라고, 

서울과 지방의 미술 실력이 너무 차이가 났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일 조차 잊어버렸는데, 

지난번 한국에 갔을 때 만나 고마워하며 털어놓은 이야기로 알게 되었다.

결국 내 덕이 아니라 은희 덕이요, 은희가 두 사람을 구해준 것.

대학 입학 시험을 치르고 시골 집에 와 있을 때 어느날 아침, 예감이 다른 전화가 왔다. 
서울에 남아 있던 은희였다. 
“얘! 인선아! 나랑 너랑 둘 다 다 합격했어!” 
그 얼마나 신이 났던 일이었는지! 믿을 수 없이 좋아서 방방 뛰었다.
도저히 합격하리라고는 기대할수 없도록 그해 경쟁율이  S 대 최고의 13대 1이었기 때문이었다.    

대입 말고도 서울 생활을 먼저 시작한 그 친구 때문에 여러가지로 도움을 받았던 것 같다.
심지어 촌티를 벗겨 주려고 잔소리도 해대었다. 
"얘, 그렇게 입을 오무리고 웃지 말아, 보기 싫어!" 라느니, 
"그렇게 신발을 끌며 걷지 말아!" 라느니, 지가 언니나 된것처럼 굴었다.
괜한 구박이라고 느낀건 내가 볼땐 지도 별수없는 촌 닭!ㅎㅎㅎ

둘 사이가 소원해 진 것은 같이 선교센터에 다니다가 그녀가 먼저 그만두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연락도 잊어버리고 결혼도 먼저하고 미국에 먼저 들어왔다.
와서 사는 동안 내내 그 친구를 깡그리 잊어버리고 살았었다. 


그러나 우리의 인연의 줄은 더 질겼던 모양이다. 
다른 친구를 통해 연결이 다시 되어 샌프란시스코 근방에 사는 은희를 찾아갈 수 있었다.
그게 벌써 25년 전인가 보다.

백인 의사와 결혼하여 소공녀처럼 예쁜 딸과 잘생긴 아들 하나씩을 두고 살고 있었다. 
그 집에 가보았더니 그림같이 아기자기하게 꾸미고 살고 있었다. 
어릴적 말괄량이 모습과 너무도 다른, 그녀의 생소한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당시 군대 생활하는 남편이 벌어다주는 것에만 의존하여 

조신히 알뜰한 살림을 하는 것을 보는 것은 신기하기까지 하였다.


그날 밤 10 년 만의 회포를 많은 이야기로 풀었다. 
미 육군사관학교 나온 신랑을 의대 공부를 시킨 이야기며, 
죽음에게 아주 가까이 갔었던, 인생의 허무함을 맛 보았던 날들의 이야기며, 
선교센터의 비리 이야기며….
물론 좋아하던 남학생, 첫사랑 이야기까지 잊지 않았다.

그후로는 의기투합 전화 뿐 아니라 2-3 년에 한번씩은 왕래하며 지나고 있다. 
여러 사람들을 만나보았지만 이야기가 그렇게 잘 통하는 사람을 만나기가 아주 어렵다. 
내가 생각하는 것과 비슷히 생각하고, 비슷히 말하고…
믿음의 배경까지 같으니 안 그럴수가 없다만, 
같은 고향, 같은 학교 출신이어서 더욱 그런 모양이다.


그래도 다른 것이 있는데 나보다 훨씬 생활에 지혜롭고 주관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어드바이저, 그녀의 조언을 백프로 신뢰하고 의논하기를 좋아한다. 

친구는 살림솜씨, 자녀교육도 일류이면서 그때 벌써 꾸준히 그림을 열심히 그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미국인 화가들과 교통하며 전시회도 계속하며 활동을 하고 있다. 
이번의 전시회가 미국내 8번째 개인전이면서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고 하니
꼭 DC에 가서 축하를 해주고 싶다.

아 참, 하아프 연주도 들을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기타, 피아노, 하아프도 연주 할 줄 아는, 재주 많고 예술 혼이 가득한 내 친구 은희가 참 자랑스럽다.
소꼽친구에서 라이벌로, 언니로, 신앙의 동지로, 그리고 영원한 친구로 자라나는
만년 소녀 내 친구 은희가 참 고맙다. ( 2009년 )


이 블로그의 인기글

만년 소녀 내 친구 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