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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22일 주일예배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03/22/2020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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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3.22 미주서부교회 주일예배

성경본문 : 마태복음17장24절-27절 설교제목 : 예수께서 성전세를 내시다. 24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가로되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25가로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가라사대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뇨 세상 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26베드로가 가로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하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27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본문에는 예수께서 성전세를 내신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20세 이상의 성인이 되면 일년에 한 번씩 성전세로 반세겔을 낼 의무가 있습니다.

(30:13-16참조)”무릇 계수중에 드는 자마다 성소에 세겔대로 반 세겔을 낼찌니 한 세겔은 이십 게라라 그 반 세겔을 여호와께 드릴찌며 14무릇 계수 중에 드는 자 곧 이십세 이상 된 자가 여호와께 드리되 15너희의 생명을 속하기 위하여 여호와께 드릴 때에 부자라고 반 세겔에서 더 내지 말고 가나한 자라도 덜 내지 말지며 16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속전을 취하여 회막의 봉사에 쓰라 이것이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이 되어서 너희의 생명을 속하리라

반 세겔은 두 드라크마, 또는 두 데나리온으로 이틀 노동한 임금에 해당됩니다. 유대인들에게 성전세를 내는 것은 하나님의 성전을 위한 일이기에 의무인 동시에 그들의 자부심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세를 내지 않아도 되시는 분이다(24-26)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도착하셨을 때에 세금을 징수하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왔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너의 선생이 성전세를 내지 아니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러한 질문은 성전세를 받겠다는 뜻보다 예수님의 견해를 드러내고자 한 질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좋은 의도의 질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율법이나 어떤 전통을 무시하는 자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성전제에 대해 거부하는 견해를 가졌을 것을 예상하고 그것을 드러나게 하려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을 빌미삼아 예수님을 성전을 위하지 않는 자로 하나님 백성의 의무를 소홀히 하는 자로 몰고 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러한 질문을 들은 베드로가 무슨 생각인지 예수님의 말씀도 들어보지 않고 내신다하고 대답하고 예수님께서 계신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하여 예수께서 아시고 베드로에게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뇨 세상 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하시므로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세를 받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세상 임금들이 세금을 타인에게 받는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러하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자신은 성전세에서 자유로운 분이라는 것이 말씀하는 겁니다. 당시 왕의 아들들은 세금을 내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졌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왕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아들들은 세금에서 자유로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당연히 성전세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겁니다.

 

예수께서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성전세를 내셨다(27).

그런데 본문에 말씀 27절에 보면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 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성전세로 내지 않아도 되는 분이라는 것을 말씀하시고는 베드로에게는 또 성전세를 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예수님이 직접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오해케라는 말은 넘어지게 라는 뜻인데 이것은 논란거리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오해일까요? 예수께서 율법을 소홀히 여긴다는 오해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율법을 완전케 하시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이러한 문제로 사람들이 실족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 율법을 완성하시는 분이며 그 율법의 뜻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게 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이제 아무 일도 아무 형식도 가지면 안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을 오해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전세를 내셨습니다.

 

다시 본문의 요점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요점은 이것입니다. 첫째, 예수님은 성전세를 내지 않아도 되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는 모든 일에 자유로운 분입니다. 그리고 둘째 요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성전세를 내셨습니다.

 

자 그럼, 이러한 사실이 왜 중요할까요?

우리 오늘 본문에서 더 좀 깊게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본문의 말씀이 단순히 세금 문제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 성경을 해석하고 이해하는데 있어야 중요한 방법이 무엇인가 하면 본문의 위치와 문맥을 보는 겁니다. 우리 마태복음을 계속 살펴보는 중에 있는데 16장에서17절에 걸쳐 흐르는 그 맥락이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맥락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것이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는 말씀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러니까, 이 예수님이 세금을 내신 일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여주는 말씀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에 예수님의 성전세를 내신 이 사건도 역시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십자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꼭 지실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님께 강요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진정한 자유를 가진 분입니다. 그 분이 원하시는 대로 해도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신 겁니다. 죽으실 아무런 이유가 없는 분이지만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진하여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베드로가 성전세를 내기 위한 돈을 어떻게 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께서 독특한 방법을 통하여 얻게 하십니다. 베드로에게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곤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고 하십니다.

이 독특한 일은 예수님의 신적권위를 보여줍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베드로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잡힌 물고기 입을 열면 한 세겔이 얻게 하시기 위하여 어떤 일들이 벌어져야 할까요?

최소한 누군가가 바다에 한 세겔을 빠뜨려야 하고 그것을 어떤 물고기가 입에 물어야 하고 또 그 물고기가 베드로의 낚시에 처음으로 잡혀야 하고 도대체 어디서부터 하나님이 손을 쓰신 겁니까? 이 일이 일어날 과정을 생각해 보면 머리가 아플 지경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일을 통해 자신의 신적권위를 보여주신 겁니다.

왜 굳이 이러한 신적권위를 보이시는 걸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이 신적권위를 가지신 분이지만 얼마든지 자유하신 분이고 죽으시지 않아도 되는 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시는 십자가라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시는 겁니다.

 

이러한 사실이 우리에게 깨닫게 하는 교훈을 두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성도의 자유는 이웃을 위해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성전세를 내신 일, 그리고 우리 구원을 위해 지신 십자가를 통하여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자유로 인하여 종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바울이 이것을 잘 배우고 실천했습니다. (고전9:19-22)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서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바울은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 하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종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종이 되었습니다. 자기를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아 그러니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상대할 수 없어! 라 하지 않았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되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으니 율법 없는 자는 상대 안 해! 라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자유인입니다.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가 이웃과 형제들을 오해하여 실족케 하는 것이 된다면 자유를 절제해야 하고 연약한 자들을 배려해 주어야 합니다. 나는 자유한데 너희는 왜 이래! 이러면 안됩니다.

성도는 자신이 마땅히 누릴 권리라도 연약한 이웃과 형제를 위해 제한하거나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6:2)”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말씀을 주십니다. 삼자가 되어서 관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려움에 함께 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참 그리스도의 법 아래 있는 자들의 자유의 모습입니다.

 

둘째, 기독교 신앙은 자연의 질서와 일반원칙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본문을 통하여 배우는 것은 기독교 신앙을 자연의 원리와 일반원리들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해도 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기독교는 분명히 초월적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의 원리와 일반 원칙들을 결코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초월을 동원하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필요하시면 하십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일들을 자연의 질서와 하나님이 세우신 일반원칙들로 일하십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겁니다. 누가 병이 들게 되면 때론 하나님이 초월적인 기적의 역사로 치유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대부분 의사의 손을 통하여 치료하십니다. 의사의 손과 의료 기술을 통해 치료를 받는 것이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주로 하시는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방법을 무시하고 하나님이 치료해 주실 거야 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심각한 오해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어떤 모습이 되기 쉬운가 하면, 무엇인가 특이하고 초월적이고 비상식적인 것이 있어야 더 신앙적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가만히 예배 드리면 신앙이 없는 사람처럼 생각하고 일어나고 흔들고 넘어지고 하여튼 무엇이든 하는 것이 신앙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정말 잘 알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신앙은 특이한 것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신기한 일을 하고 남들이 하지 않는 특이한 행동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연의 질서와 일반원칙을 존중하며 상식적이며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것을 무시하지 않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순종해 나가는 겁니다.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안하무인이 되면 안됩니다.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대화가 되지 않는 사람이 되면 안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잘 모릅니다. 요즘 코로나19로 인해 우리가 생활에 많은 제약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누리고 하던 일들을 제약 받고 있습니다. 이제 외출도 마음 편히 할 수 없습니다. 모이는 것이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하고 감사하지 못했던 일들이 얼마나 감사한 것이었는지 새삼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 아무것도 특이할 것이 없었던 우리의 일상이, 늘 그날이 그날 같은 일상의 평온함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언제나 초월이 관여된다는 것은 그 만큼 위기라는 뜻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께 어떤 초월적인 일을 간구하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 여러분이 비상상태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기적, 초월. 이런 것들은 없는 것이 사실은 좋은 겁니다. 그것은 마치 아프면 약도 먹고 주사도 맞고 영양제도 주입해야 하는 것과 같은 겁니다. 그것이 좋으십니까? 그냥 밥 먹고 사는 일상이 좋은 겁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면서 마무리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세를 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세를 내실 필요가 없는 분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실족하여 넘어지지 않게 하시려고 성전세를 내셨습니다.

이 성전세를 내신 사건속에 예수님의 십자가을 지신 원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실 이유가 없는 분이지만 아니 죽으실 수 없는 분이지만 죄인인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갑시다. 우리의 자유를 타인을 위해 양보할 수 있기 성도가 되길 바랍니다. 또한 우리에게 주어진 자연적인 일들과 일반적인 원칙들을 무시하는 상식적이고 윤리적인 것을 존중하는 자가 됩시다. 우리에 주신 일상의 아름다움과 복됨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서 이러한 일들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하고 누리는 자들이 되기 바랍니다.


코로나19,기독교,성전세,오해,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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