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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긍휼하심을 경험하는 신앙
02/03/2020 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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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예수께서 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시니 30큰 무리가 절뚝발이와 불구자와 소경과 벙어리와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앞에 두매 고쳐 주시니 31벙어리가 말하고 불구자가 건전하고 절뚝발이가 걸으며 소경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기이히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32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33제자들이 가로되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의 배부를만큼 떡을 얻으리이까 34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가로되 일곱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나이다 하거늘 35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36떡 일곱 개와 그 생선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매 37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으며 38먹은 자는 여자와 아이 외에 사천 명이었더라 39예수께서 무리를 흩어 보내시고 배에 오르사 마가단 지경에 가시니라

오늘은 본문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의 긍휼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증거하겠습니다.

늘 강조하듯이 예수님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본문에서 마태는 예수님을 긍휼하신 분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께서 많은 병자를 고치셨다고 기록하고 있고 또한 사천명을 먹이셨습니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32)”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일들은 예수님이 긍휼하신 메시야 이심을 잘 보여줍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그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것에 가장 큰 이유는 예수님의 긍휼하심을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게 베푸신 그 긍휼하심을 알아야 우리의 신앙생활이 즐겁고 기쁜 것이 됩니다.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을 위한 기도를 보면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시기를 구하노라(3:18,19)” 고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측량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바울은 궁극적으로 성도들이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궁극적인 결과를 가지기 위해서는 바울은 먼저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아야 함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긍휼을 알아야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되는 겁니다.

 

차별하지 않는 긍휼

예수님의 긍휼은 차별하지 않은 긍휼입니다. 예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굶고 있는 무리 사천명을 먹이셨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이미 예수님께서 많이 행하신 일입니다. 앞서 이미 오천명을 먹이신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왜 비슷한 일을 왜 또 행하셨고 또 마태는 이것을 기록하고 있는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전혀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이 일이 앞에 일들과 가장 구별되는 점은 이 일들이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행해진 일들이라는 겁니다. 앞에 가나안 여인의 믿음으로 우리가 보았습니다. 이방지역에서 이방인 여자에 대한 일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치신 곳도 이방 지역이고 이방인 병자들입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경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경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라고 합니다. 이곳은 갈릴리호수 북동편이고 이곳 역시 이방인의 지역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방사역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본문에 나옵니다. 31절에벙어리고 말하고 불구자가 건전하고 절뚝발이가 걸으며 소경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기이히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여기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고 한 것으로 보아도 이들이 이방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천명을 먹이신 일도 이방인들이 그 대상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이방들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긍휼하심은 차별이 없는 긍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긍휼하심은 민족과 인종, 성별과 귀천에 차별없이 베풀어 주시는 긍휼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 그 분 안에서 하나가 되는 신앙입니다. 세상에는 차별이 있습니다. 이것을 깨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무엇으로 세상의 차별을 깨지 못합니다. 아무리 세상 좋아진다 해도 차별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이 차별을 깨뜨립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그 담을 허무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2:13).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14)”고 합니다.

유대인도 예수님의 긍휼하심이 필요하고 이방인도 예수님의 긍휼하심이 필요합니다. 그 누구도 예수님의 긍휼하심이 필요 없는 자는 없습니다.

 

필요한 것을 주시는 긍휼

예수님의 긍휼은 필요한 것을 주시는 긍휼입니다. 예수님이 많은 병자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본문30절에큰 무리가 절뚝발이와 불구와 소경과 벙어리와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두매 고쳐 주시니

예수께서는 자신 앞에 온 자들이 이방인들이라고 그들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앞에 둔 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들은 믿음을 가지고 나온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그냥 그 앞에 둔 자들입니다. 그러나 다 고쳐 주셨습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셨습니다. 그들의 가장 절실한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육신의 문제가 아닙니다. 육신의 병도 무서운 것이 사실입니다.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에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또 암이 두렵습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무섭고 우리고 두려워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정말 우리가 코로나 바이러스 보다 무서운 것은 죄입니다. 암보다 무서운 것은 영혼의 병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가 느끼지 못한다고 그 결과가 오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심각한 병자들이 등장하는가 하면 그것은 죄의 무서움과 그리로 인해 인류가 영혼의 병이든 고침이 필요한 자들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문둥병이, 38년된 병자가, 귀신들인 것이다 타락한 인간의 상태를 보여주는 겁니다. 병의 무서움만 보라는 것이 아니고 그 병을 통하여 죄의 무서움과 영혼의 병의 무서움을 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영혼의 병을 고치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보라는 겁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주시는 긍휼하신 메시야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생명의 양식을 주십니다. 본문 35절에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36떡 일곱 개와 그 생선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매 37다 배불리 먹고..”

예수께서 굶주린 자들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이방인이라고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이 주시는 것으로 다 배불리 먹고배불리 먹었습니다.

사람의 인생에 먹는 문제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먹어야 합니다. 우리의 육신은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먹지 못하면 기진하게 되고 계속 먹지 못하면 결국 죽게 됩니다. 이처럼 양식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영적인 기근입니다. 우리에게 정말 무서운 병이 영혼의 병인 것처럼 우리를 정말 기진하여 쓰러지게 하는 것은 생명의 양식을 먹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양식은 그것으로 우리의 영혼을 만족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불행한 것은 육신의 양식만 구하는 인생은 그것으로 끝이 납니다.

그러나 영의 양식으로 사는 자는 결국 모든 것이 만족케 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 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더해 주십니다. 이것이 믿는 자들에게는 진리입니다. 육신을 위해 살면 잘 될 것 같아도 결국은 일생은 종 노릇하다가 결국 망합니다. 그러나 영의 양식을 먹는 자들은 결국 주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복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주십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양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진실로 필요한 것을 주시는 긍휼의 그리스도입니다.

 

긍휼을 배우고, 베푸는 그리스도인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긍휼을 배우고 실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긍휼하신 그리스도의 긍휼하심을 입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게 되는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은 제자들도 이 긍휼을 보고 배워야 했다는 겁니다.

예수께서 사천명을 먹이신 이 본문에는 앞서 행하신 오 천명을 먹이신 일과 비교되는 흥미로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마태복음 14장으로 가볼까요? 예수께서 오 천명을 먹이셨습니다. 여기에도 보면 예수님이 14절에큰 무리를 보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들을 고쳐 주시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15절을 보십시오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입니다. 무리들을 먹이는 일에 대하여 제자들이 예수님께 먼저 제안했습니다. 제자들은 그 무리들이 굶고 있는 상황을 생각하고 그들을 먹게 해야 할 것을 제안한겁니다.

!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차이가 있습니다. 본문32절에 봅시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네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라고 하시고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이 차이가 보이십니까? 유대인들이 그랬듯이 제자들도 그들의 긍휼이 제한적인 차별적인 긍휼이었습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종교적 우월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 우월감에 근거는 혈통과 율법에 근거한 겁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또한 율법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자랑하는 것들의 실재적인 내용은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형식적이 외식 적인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마땅히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율법을 가진 것으로 다가 아니고 그 율법이 요구하는 바 공평과 의라는 내용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없었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의 긍휼하심을 바로 알고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차별없이 긍휼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그 긍휼을 배우며 실천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도 이와 같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십자가를 안다는 것이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자랑하고 율법을 단지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과 같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이 가지는 내용으로 채워지는 겁니다.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므로 새 사람으로 태어난 자가 가지는 새로움의 내용들이 우리에게 채워져야 하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긍휼을 입은 자로 사는 겁니다.

그런데, 그 내용으로 채워지지 않고 단지 나는 예수님을 믿고 십자가를 안다는 것이 자기 자랑이 되고 자기 증명이 되어서 유대인들이 가진 똑 같은 우월감에 빠지게 됩니다. 여전히 자기 중심적이고 용서할 줄 모르고 긍휼을 베풀 줄을 모릅니다. 자기민족, 자기가 생각하는 이웃에게만 긍휼을 베푼다고 합니다. 그것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우리가 믿는 신앙이 기독교 신앙은 긍휼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겁니다. 죄로 인하여 영원히 사망에 거해야 할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긍휼하심, 이방여자와 같고, 문둥병자와 같고 소경 같고 불구 같은 우리를 차별없이 긍휼히 여기시는 예수 그리스도를우리의 무엇으로도 만족할 수 없고 늘 남 몰래 울어야 하는 사마리아 여인과 같이 여러 남편을 가져 보았지만 그것으로 위로 받을 수 없었던 그 사마리아 여인 같은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긍휼하심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만일 우리가 긍휼한 자가 되지 못하는 것은 긍휼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하심을 맛보아야 합니다. 오늘에 말씀이 우리 모두가 긍휼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말씀으로 역사하길 바랍니다.

미주서부교회, 김인식 목사 Fullerton, California. www.seoboochurch.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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