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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5일 주일설교 / 소자를 실족케 하지 말라(마18:5-14)
04/05/2020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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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4월5일 주일예배설교 성경본문 :마태복음18장5절-14절 설교제목 : 소자를 실족케 하지 말라 5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6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7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8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9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10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12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14이와 같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마태복음18:5-14 소자 중 하나도 실족케 하지 말라

본문은 예수께서 소자 중 하나라도 실족케 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어린 시절을 생각해 보면 길을 가다가 돌에 걸려 넘어질 때가 있었습니다. 때로는 좁은 오솔길에 구덩이를 파서 가려 놓고 친구들의 발이 빠지게 하며 놀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돌에 걸려 넘어지거나 발을 헛디뎌서 넘어지면 가벼운 경우는 손을 털고 일어날 수 있지만 때론 심각한 부상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연약한 사람은 큰 사고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에 실족케 되어 마음의 상처와 아픔을 겪는 경우들이 많고 심지어는 신앙생활을 접는 경우도 종종 생깁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님의 실족케 하지 말라는 말씀을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예수께서는 소자를 실족케 하는 것이 예수님을 거절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5-7절 보겠습니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6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7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소자는 어린 아이와 같이 된 자를 말합니다. , 하나님을 의존하는 자를 말합니다. 자기 의를 의지하지 않고 예수님만 생명 삶은 자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소자를 실족케 하는 것에 대하여 무서운 경고를 하십니다. 연자 맷돌은 나귀가 돌리는 큰 맷돌입니다. 바다에 그냥 던져지는 것도 무서운 일인데 그냥 맷돌도 아닌 연자 맷돌을 목에 달고 바다에 빠뜨리는 형벌을 받는 것이 소자를 실족케 하는 것 보다 더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소자를 실족케 하는 것이 이처럼 무서운 경고를 받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소자를 실족케 하면 예수를 거절하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5절을 보면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라고 하셨습니다.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예수님 때문에 소자 하나를 환대하고 따뜻하게 대하면 그것이 곧 예수님을 영접한 것과 같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역으로 생각하면, 소자를 영접하지 않는 것은 예수를 모르는 행위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자를 실족케 하는 것은 맷돌을 목에 달고 바다에 던져지는 것보다 무서운 겁니다.

 

(25:40)에 말씀을 보면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5절에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말세에 있을 심판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무엇으로 심판의 기준을 삼으시는가 하면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 입니다. 그래서 지극히 작은 자를 영접한 자는 영생에 들어가고, 지극히 작은 자를 실족케 한자는 영벌에 들어가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이런 판결이 가능할까요? 그것은 소자를 어떻게 생각하고 대하는지가 예수님을 아는지 모르는지를 기준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누구든지 소자를 실족케 하는 자는 그 형벌을 면하기 힘듭니다. 소자에게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 이렇게 신앙적으로 중대한 문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14:13)”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고 했습니다. (고전8:9)”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고 성도에게 걸림돌이 되지 말라고 권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소자들을 실족케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판단하고 정죄하는 겁니다. 판단하고 정죄한다는 것은 소자를 무시하고 업신여긴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소자를 판단하고 정죄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그 상대를 업신여기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낫다는 생각으로 우월감과 교만에 빠져 있기에 상대를 무시하고 업신여길 수 있고 판단하고 정죄할 수 있는 겁니다. 즉 자신을 의롭게 생각하고 예수님만 의지하는 자를 업신여기는 겁니다.

종교적 우월감은 정말 무서운 겁니다. 우월감을 같는 것은 그럴 만한 근거가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경건하게 보이는 많은 일들을 합니다. 그래서, ‘나는 너희와 달라!’ 이 생각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 판단하고 정죄할 수 있는 겁니다. 이 종교적 우월감을 가진 사람은 기도도 많이 하고 구제도 많이 하는데 사람이 따뜻하지를 않습니다. 믿음이 좋다고 하는데 같이 있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소자를 실족케 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또 소자들을 실족케 하는 것은 외식입니다. 외형으로 종교적이고 경건한데 마음은 세상의 가치를 목적하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외형적으로는 그렇게 경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결국 그 경건을 가지고 목적하는 것,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세상의 복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지를 않습니다. 기도하고 구제하고 금식하고 하는데 자기 영광을 위해서 하지 하나님 앞에서 살지 않습니다. 이러한 외식이 소자들을 실족케 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소자들에게 걸림돌이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날 교회가 소자들에게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는 자가 천국에는 크다고 하셨는데 교회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세상가치들을 획득하려고 하고 세상의 권세를 가지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외형적으로 경건하고 웅장하지만 소자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공의라는 이름으로 소자들을 실족케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공의를 이루시는 것도 결국 사랑의 완성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네 자신을 실족케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8-9절 보겠습니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9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예수께서는 소자를 실족케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문제를 더 진전시키십니다. 너희는 소자를 실족케 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씀하시고 그리고 더 나아가 네 자신을 실족케 만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이해시키기 위해 또 하나의 충격적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실족케)하거든 찍어 내버리라는 겁니다.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는 겁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논리는 명확합니다. 네가 성한 몸을 가지고 지옥에 가는 것 보다는 불구가 되더라도 천국에 가는 편이 낫다는 겁니다.

이 끔찍한 경고는 다행이도 실제로 손과 발을 찍어 버리고 눈을 빼 버리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그리고 만일 정말 손과 발을 찍어 내서 지옥에 안 가고 천국에 간다면 그렇게 해야 할 겁니다. 그러나 죄에 문제는 손과 발을 잘라내고, 눈을 빼낸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죄에 원인을 해결하라는 겁니다. 손과 발이 죄를 짓고, 눈이 죄를 범하면 잘라내고 뽑아야 하는 것 같이 죄에 원인을 해결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럼 우리 죄에 근원지가 어디입니까?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죄로 인하여 부패했습니다. 죄에 문제는 마음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바뀌어야 하고 마음이 고쳐져야 하는 문제라는 겁니다.

그러니 네 자신이 실족케 되지 않도록 네 마음을 단속하라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실족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만일 누군가가 소자를 실족케 한다면 이미 자신의 마음이 실족한 상태에 있는 겁니다. 자신이 자신을 실족케 한 겁니다. 무엇이 자신을 실족케 만듭니다. 소자를 실족케 한 것과 같습니다. 우월감과 교만이 자신을 실족케 했고 외식으로 이미 자신이 실족한 겁니다.

6절에 보면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이라고 해서 이 경고가 누구든지 해당되는 경고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안심할 문제가 아닙니다. (7:22)에 보면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쪼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는 경고를 잊지 않아야 합니다.

아무리 보기에 진짜 같아도, 믿은 사람 같고 경건한 사람 같아도, 누구든지 소자를 실족케 하는 자는 자신이 이미 실족한 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을 실족케 하는 일과 싸워야 합니다. 종교적 우월감을 뽑아내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 앞에 사는 신앙의 본질을 회복해야 합니다. 어떻게 회복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설 때만 회복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우리 안에 있는 이 교만함을 뽑아내지 못합니다. 우리 힘으로는 신앙의 본질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나가면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소자를 실족케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10-14절 보겠습니다.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12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14이와 같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예수께서는 소자 하나도 실족케 하지 말라고 하시고 또한 네 자신들로 실족케 되지 않도록 마음을 잘 단속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마무리를 소자 중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뜻을 설명하기 위해 예수님은 길 잃은 양을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목자가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길 잃은 양을 찾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길 잃은 양 한 마리 찾은 기쁨이 아흔 아홉 마리가 주는 기쁨보다 크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사실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비유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빠른 머리는 바로 세상적인 가치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한 마리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다가 아흔 아홉 마리가 잘못되면 어떻게 하나? 이런 생각이 당연히 듭니다. 도대체 왜 길 잃은 양을 한 마리 찾는 것이 이토록 기쁜 일이 될까요? 그 양만 특별한 가치가 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다른 양들도 다 귀합니다.

해답은 하나님 뜻에 있습니다. 114절에 이와 같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입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소자 중 하나도 잃어지지 않는 겁니다. 양이 아흔 아홉 마리가 있어도 한 마리가 없으면 안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하나도 잃어지지 않는 것이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길 일은 양 하나가 귀합니다. 왜 귀합니까? 하나님의 뜻 안에 있기 때문에 귀합니다. 아무리 귀한 양 아흔 아홉 마리가 있어도 한 마리가 없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는 소자를 실족케 하지 않도록 다짐하고 조심합니다. 예수님만 의지하는 것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자는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일이라는 것을 기억합니다.

또한 우리 자신이 실족케 되지 않도록 늘 우리의 마음을 단속합시다. 누구든지 소자를 실족케 하는 것은 이미 그 자신이 실족한 상태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자를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합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자기 의를 버리고 예수님만 의지하는 소자를 하나님이 결코 잃어버리지 않으신다는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은혜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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