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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대한인국민회 100년 발자취 (연재)
02/12/2009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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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희 연구원이 전하는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100년 발자취 (1)

한국일보 하와이, 기사일자: 2009-02-11
 

지난 2월 1일은 하와이 대한인국민회가 조직된 지 100주년이 된 날이었다.
하와이에서는 내달 6일 100주년 기념식을 갖는다. 본보는 국민회가 어떻게 조직되었고, 어떻게 회관을 마련하였는지, 그리고 아직껏 국민회가 존재하는지등 국민회 100년의 발자취를 하와이 한인 이민사를 연구하고 있는 이덕희 연구원의 3회에 걸친 기고를 통해 더듬어 보는 시간을 마련한다.

<편집자주>



초기 하와이 한인 이민자들이 조직한 첫 단체는 1903년 8월 7일에 조직된 ‘신민회’라고 알려져 왔다.

하와이 한인에 관한 첫 한글 책자는 1907년에 귀국한 현순이 1909년 서울에서 출간한 『포와유람기』이다.

현순은 이 책 12 면에 “1903년 가을에 호놀룰루에서 홍승하, 안정수, 윤병구 등이 발기하여 新民會신민회를 조직하였다.

목적은 하와이 동포의 교육과 상업을 장려하는 것이며, 호놀룰루에 중앙회를 두고, 지부들이 있었다.

그러나 임원들 사이에 분규가 있어 1904년 봄에 해체되었다.”고 기록하였다.

1951년에 로스앤젤스에서 출판된 『在美韓人史略재미한인사략』(상권)에서 저자 노재연은 ”1903년 8월 초순에 호놀룰루에서 홍승하, 안정수, 윤병구 제씨가 신민회를 설립하고, 카우아이 섬 카파하 지방에도 신민회를 설립하였으니, 회장 한주동, 부회장 장영환, 서기 정진상 제씨와 회원 양천태, 고석주, 조병옥 제씨더라.“ 하였다.

한편, 김원용은 캘리포니아 주 리들리(Reedley)에서 1959년에 출간 한 그의 저서 『재미 한인 오십년사』 85면에 ”1903년 8월 7일에 홍승하, 윤병구, 문홍석, 박윤섭, 임치성, 임형주, 김정국, 안정수, 이교담들의 발기로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목적은 구국정신을 고취하며, 일본의 침략행동을 반항함이며, 그 강령은 동족 단결, 민지 계발, 국정 쇄신이며 회장은 홍승하였다.

동년 12월 2일에 카우아이 섬 카파하 지방에 지회를 설립하고,(중략) 내부 분열을 당하여 1904년 4월 20일에 해체되었다.“라고 기술하였다.

이 세 책자에 인용된 사람들의 호놀룰루 도착 도착일자 (월/일/년)는 다음과 같다.

안정수 (1/13/03), 윤병구 (=우병길 10/5/03), 홍승하 (2/18/04), 한주동 (12/28/03), 장영환 (12/28/03), 정진상 (12/28/03), 양천태 (12/28/03), 고석주 (12/5/03), 조병옥 (12/28/03), 문홍석 (1/23/04), 박윤섭 (12/5/03), 임치성 (7/8/04), 임형주 (1/9/04), 김정국 (?), 이교담(10/15/03)

이들 중 안정수만이 1903년 8월 이전에 도착하였음으로, 신민회 설립 일자가 늦추어져야 하거나, 설립자의 이름이 달라져야 한다.

또한 카우아이 섬의 지회를 설립한 사람들도 모두가 12월 5일이나 28일에 도착하였기 때문에 12월 2일 설립일자도 신빙성이 없다.

더구나 김원용은 “신민회가 감리교인들의 조직이던 까닭에 교파의 시기로 불교인들과 성공회 교인들이 무조건 반대하며 혼란을 일으키는 한편 이민 경비 수봉사건으로 인하여 내부에 싸움이 시작 되었다.”라고 서술하였다.

다만, 신민회가 해체되는 경우를 설명하면서 김원용이 인용한 이민 경비 수봉사건인, 이른바 “테일러 사건”은 실제로 1904년 2월 중순에 일어났다.

설립 일자와 설립자들의 이름이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신민회라는 단체가 조직되었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신민회를 효시로 친목회, 공진회, 전흥회, 의성회, 자강회, 협성회, 국민동맹회, 공동회 등 정치·사회적 친목단체들이 오하우 섬과 다른 여러 섬에 조직되었다.

새로 조직된 단체들 이외에 초기 이민자들은 자기들이 모여 사는 농장 동네에 “동회” 제도를 두기도 하였다.

1907년 8월말까지 존재했던 24개 단체와 동회의 대표자 30명이 호놀룰루에 모여 5일간의 연속 회의를 끝나는 9월 2일에 기존의 모든 단체를 통합하여 한인 합성협회를 조직하였다.

제도는 회장제이었고, 목적은 조국 국권 회복, 재류동포의 안녕보장과 교육 장려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된 『공립신보』의 1907년 9월 6일자 ‘하와이 소문(소식)’란에는 “하와이에 있는 동포들이 (중략) 각 단체를 합하여 한 큰 단체를 조직하였으니 과연 내두에 큰 효력이 있을 줄 믿노라”는 글로 합성협회의 조직을 보도하였다.

합성협회는 호놀룰루 누우아누 스트리트(Nuuanu Street) 1038번지에 회관을 임대하고 10월 22일부터 『합성신보』를 발간했다.

그 후 1년 동안 47개 지역에 지회가 설립되어 1,051명의 회원이 확보되었는데, 이 숫자는 21세 이상의 전체 한인교포 3,800여 명 중 1/3이었다. 회비는 예납금이라 하여 매년 $2.25였다.

<사진설명: 1907년 합성협회가 임대한 회관, 1038 Nuuanu St.>



***
이덕희 연구원이 전하는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100년 발자취 (2)

기사일자: 2009-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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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미주 본토에서는 1903년 9월 23일에 안창호가 샌프란시스코(桑港 상항)에서 이대위· 김성무 등과 함께 친목회를 조직하였다가, 1905년 4월에 5일에 친목회를 확장 개편하여 공립협회를 조직했다.

1907년까지 상항을 중심으로 로스앤젤스(羅城 나성) 등 6개 지역에 지방회를 설립하였다.

하와이와 미주 본토에서 독자적으로 활동하던 합성협회와 공립협회의 대표들이 1908년 10월 23일 콜로라도 주 덴버에서 개최된 북미애국동지대표회에 참석하였고, 참석한 모든 이들은 한인이 통일된 활동을 펼쳐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두 협회의 대표자들은 두 단체의 합동을 논의하였다. 그들은 11월 30일에 합동발기문을 발표한 후, 1909년 2월 1일에 두 협회가 정식으로 통합하여 국민회를 발족시켰다.

캘리포니아 파사디나에 조직되었던 대동보국회가 1909년 8월에, 그리고 호놀룰루에 조직되었던 전흥협회가 1910년 4월에 합류하였다.

그야말로 미주한인사회가 한 단체로 통일된 것으로, 국민회는 “대한인국민회”로 개명되었다. 국민회는 공립협회를 개편한 북미지방총회와 합성협회를 개편한 하와이지방총회 나뉘었고, 상항에 이 두 지방총회를 통합·조정하는 중앙총회를 두었다.

하와이 합성협회에서 발간한 『합성신보』는 아직까지 1부도 발굴되지 못했다. 국민회는『합성신보』를『신한국보 The United Korean News』로 제호를 바꾸고 1909년 2월 12일에 창간호 (주필: 홍치범)를 발간하였다.

이 창간호에 국민회 조직에 관한 기사는 없는데, 상항에서 발간된 『신한민보』에는 국민회 성립에 관한 기사 여러개가 실렸다.

또한 멀리 블라디보스톡에서 발간된 『대동공보』1909년 1월 20일자에 국민회 조직에 관한 기사가 있다.『대동공보』의 「양회합동」이라는 제목 아래 기사는 다음과 같다.

“미국통신을 거한즉 미국에 있는 한인공립협회와 하와이에 있는 한인합성협회는 설립된 지 사오 년에 아름다운 목적과 용감있게 나아감이 전국에 모범이 될 만한 고로 일반 동포의 희망하는 바러니 이제 한걸음을 더 나아가 양회가 합동 하였다니 우리나라 앞길에 행복을 위하여 기뻐 치하함을 마지아니하며 그 합동 하는 취지서를 차호에 기재하여 모든 동포의 한번 봄을 작만 하겠노라.”

그리고는 2월 25일자 신문에(p. 1) 발기문 전문을 실었다. 발기문의 요지는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국민이 통일 단합을 해야 하는데, 우선 미주 동포가 단합하고, 일본에 있는 동포, 러시아에 있는 동포, 그리고 서북간도에 있는 동포가 합동하고, 나아가 2천만 동포가 단합해야 한다.
그래야만 독립과 자유를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렇듯 국민회는 하와이를 위시하여 미국 땅에 살고 있는 이민자들이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단합하여 만든 기관이었고, 회칙은 민주적 원칙을 따랐다.

하와이 국민회는 1313 Miller Street (현 하와이 주 보건국 주차장)의 사무실을 임대하고, 이 곳에서 『신한국보』를 발간하였다.『신한국보』는 중간에 분실된 호도 있지만, 대략 1909년 2월부터 1911년 1월까지의 호가 존재하며 1913년 8월 13일부터 『국민보』로 제호가 바뀌어 발행되었다.

국민회 회원들은 의무금이라 하여 매해 $3 (1912년부터 1922년 까지는 $5로 인상하였다가 그 후 다시 $3으로 인하)과 월연금(월회비)으로 매달 $0.10내지 0.50을 내고, 또 교육금과 구제금으로 연간 $0.50내지 $1.00을 냈다.

교육금은 국어학교 운영과 하와이 국민회 자체의 국어교과서를 발간하는데 쓰였다. 연회비와 월회비는 하와이의 여러 지방 지부(지방회)를 통하여 납부했는데, 그 중의 반은 각 지방회가 경비로 썼고, 반은 하와이지방총회로 보냈다.

하화이지방총회는 전체 예산의 1/5를 미주 본토 중앙총회로 보냈다. 이외에 특별한 일이 생기면, 따로 특연을 하기도 하였다.

하와이 지방총회의 예산에서 (총)회관 임대비를 지불하였다.

1909년 말 국민회 임시 대의회(회장 이내수)에서 회관을 임대하는 대신 $5,000의 예산을 들여 2층으로 된 회관을 건축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민 온 지 6,7년이 되면서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되어가는 이 시기에 조국이 일본에게 강점당하는 상황에 처했기 때문에 한인 이민자들이 하와이에 정주하려는 의식을 갖기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국민회는 장기적 안목에서 회관을 소유하는 것이 임대하는 것 보다 경제적으로 더 유익하고 안전하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회원 1천 명 각자가 $5 이상의 의연금을 기부한다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회관 건축 문제는 곧 이행되지 못했는데, 1913년 9월에 임대하여 사용하고 있던 회관이 팔리게 되어 회관 건축 문제가 다시 대두 되었다.

그리하여 국민회는 $6,000의 건축비를 모금하려고 하였다.

금액의 과다에 관계없이 동포 3,000명이 성금할 것으로 예상한 것으로 미루어 당시 21세 이상의 한인의 약 80%의 동참을 원했던 것 같다.

<사진설명: 1909년 국민회를 결성하고 촬영한 기념사진. 사진속의 건원절은 ‘시작하는 날’이란 뜻이다. 신한국보와 국민보 제호>

***

하와이 대한인국민회,호놀룰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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