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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256 윈스톤
06/07/2018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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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냄새를 기억한다. 


단발머리 여고 시절, 명동 한 복판 학교로 가는 길은 지난 밤 화려한 도심의 행적을 말해주는 갖은 쓰레기와 오물들 특유의 느끼한 냄새로 종종걸음 치며 등교하는 어린 여학생의 순진을 비웃곤 했다. 

가서는 안될 곳, 금지된 구역을 선언하는 일종의 경보, 나를 자꾸만 밀쳐내는 은밀한 음모의 냄새.  


엘에이 다운타운. 홈리스들의 천국이 되어버린 4가 윈스턴 256 번지 상가에 들어서면 나는 언제나 그 기억 한 켠에 웅크리고 있던 냄새의 추억에 젖는다. 

그것이 버터냄새였던가, 아니 술냄새였던가, 어쩌면 온갖 추잡한 본성이 토해낸 오물의 냄새였을 것이다. 


그 거리를 바삐 걸으며 행여 금기의 물이라도 들을세라 옷매무새를 추스렸던 새침한 여고생의 등교길을 떠올리는 순간 이십년전의 명동과 똑같은 냄새를 풍기는 바로 이곳, 지금 여기 내가 낯선 미국 땅에 와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는다. 


여기나 거기나, 사람 사는 데는 다 마찬가지구나-  비로소 아침이 시작된다.


남편은 두 달 전, 가방 도매를 시작했다. 왜 하필이면 가방 장사였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 그 자신도 모를 것이다. 

미국 땅에 내려서 ‘먹고 살’ 일을 찾다 보니 우리는 잘 나가던 광고쟁이도 벤처기업 사장도 아니고 여성지 기자라거나 웹사이트 기획자 같은 건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보통의 흔해 빠진 이민자, 외국인, 게다가 가진 돈 별로 없는 그저그런 신출내기 전입자의 정형화된 인간군에 자연스럽게 속해 있었다. 그 바탕을 인정하고, 인정하고, 매일 가슴을 두드리며 인정하고 비로소 물어물어 뒤지고 나름대로 재고 겨냥하고 계산해서 찾아낸 일이 바로 여기, 엘에이 다운타운 도매 상가의 핸드백 홀세일 가게였다고 했다. 


지난 겨울, 온 겨레가 신나는 물건 사제끼기에 광분하는 미국식 크리스마스를 잘 구경하고 매일매일 아파트에 쳐박혀 아이 학교 마중이나 다니던 두어 달을 보내고 나자, 남편은 가게에 나와서 일을 도와달라고 요구했다. 


허걱! 가게라니? 세상에 태어나 장사라고는 2년 전, 아이 학교 운동회 때 후원회 엄마들이랑 수다 떨며 떡볶이 몇 접시 팔아본 경험이 전부인 나에게? 총알이 날아다닌다는 무시무시한 미국 엘에이 한복판에서? 더구나 종목도 낯선 홀세일이라니? 


‘이제 와서 무슨 소리야. 미국 안 간다고 그랬더니 미국 가면 나더러 공부 하랬잖아. 먹여 살리는 건 자기가 다 한다구. 자기가 다 알아서 할 거니깐 너는 영어 공부만 열심히 하라구우-!"


차마 목소리가 되어서 밖으로 튀어나오지는 않았다. 내가 스물 몇살 만 되었더라도, 그 정도만큼만 철이 든 상태였더라도 호기 넘치게 따졌을텐데, 이제는 그럴 수가 없다. 


그 출발점에 옹송거리며 서있던 당시의 우리 가족에게는 철부지 미망에 묶인 나약함 따위 팽개치고 겁없이 뛰어들 용기, 용기를 넘어 앞뒤 안보고 휘두를 만용이라 해도 어찌되었든 '전진' 할 수 있는 기꺼움만이 유용한 가치였기에. 


그럼에도 막상 다운타운이라는 곳에서 일해야 한다는 '통보'를 접하며 순간 머리 속으로 그린 그림이란 것은, 70년대 평화 시장쯤 될 법한 을씨년한 회색빛 배경에 꺼먼 애들 큰 총 옆에 차고 휘적휘적 돌아다니다가 밸 꼴리는 면상에 대고 냅다 무차별 방아쇠를 당기는 무법 천지 한 장면이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덜컹대는 그 험상궂은 동네에 점방 아줌마로 눌러 앉아 장사라는 걸 해야 한다고? 

더구나 미국 와서 몇 달이 지나도록 영어 한마디가 제대로 입에서 굴러나오지 않는 어처구니 없는 주제 또한 무대책인데. 


단 하나 희망은 내가 가방을 엄청 좋아하는 여자라는 사실이었다. 


백화점에 쇼핑이라도 갈라치면 옷 보다는 핸드백에 손이 먼저 가고 티 셔츠 하나 고르기는 힘들어도 무더기로 쌓여있는 매대에서 솜씨좋게 가방 하나 잘 고르는 건 식은 죽 먹기였던 ‘가방력’ 을 자랑하는 터라 죽으란 법은 없구나 싶었던 셈이다. 


본래 스타일 안 받쳐주는 여자들이 가방과 구두에 목숨을 거는 건 뭐 익히 알려진 보상 심리지만, 어쨌거나 들인 돈에 비해 영 효과가 안 나오는 옷 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제 맵시를 다 보여주는 가방에 위안을 삼아왔던 지난 날이 이렇게 호구지책에 도움이 될 줄은 미처 몰랐던 셈이다. 


그 해, 그 삼월, 엘에이에서 만난 새 봄은 천사의 도시 한복판에 어설픈 진을 치고 전쟁터로 떠밀린 내게로 참, 낯설게,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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