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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양라면의 진실
08/29/2012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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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분께서 올려주신 글을 보고 퍼왔습니다.

삼양라면의 창업주이신 전중융회장님께서 참으로 훌륭하신 분이시네요.

그분의 기업정신에 큰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아이들이 라면을 먹고 싶어할때 마다 못 먹게 했었는데 이젠 안심하고 먹여도 될 것 같네요.

라면중에 유일하게 MSG 를 넣지 않았다 하니까요.ㅎㅎ

 

(펌)삼양식품의 모든 정신이 전 회장으로부터 나온다. 그의 식품에 관한 철학은 식품산업의 근본적 도덕성이 무엇이다 하는 근원을 제시했다는 점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2년 전 대한상공회의소가 일반국민, 대학교수, 현직 CEO 등 모두 500명을 대상으로 8개항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했을 때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의 근간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전체 응답자의 42.0%가 ‘창의력’을 꼽았고, 그 다음으로 ‘정직과 도덕성’(29.8%), ‘인간미’(11.6%), ‘장인정신’(9.4%) 순으로 나타났지만 해당 기업인에 몇 명의 기업 총수와 함께 전중윤 회장이 포함됐다.

기업인이 추구해야 할 가장 큰 목표로는 48.8%가 ‘이윤창출’을 꼽고 다음으로 ‘고용창출’(30.8%)과 ‘이윤의 사회환원’(17.0%)이라고 답하면서 역시 해당 기업인으로 전 회장을 들었다.

국내 기업인에게 요구되는 자질을 묻는 질문에서는 ‘윤리경영의지’(48.6%)와 ‘연구학습자세’(18.0%)가 필요한 것으로 조사됐고 그곳에도 눈에 띄는 인물로 전 회장이 포함됐다.

이처럼 전 회장에 대한 사회적 신뢰는 여전히 높다. 하지만 이른바 ‘우지(牛脂)파동’이라는 잔인한 공격 앞에서 끝까지 진실 규명을 위해 법정투쟁을 전개하면서 죽어가던 삼양식품을 살려내기까지 처절한 결단을 내려야 했던 순간과, 국내 최초의 거대 보험회사를 접고 왜 5원짜리 이익도 보장되지 않던 라면 생산에 뛰어들어 굶주림에 울고 있는 국민을 가슴에 안았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결단 1


 
.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우리나라 식품산업의 대부로서 대한민국 라면 생산 1호 기업인 삼양식품의 49년 역사를 이끌고 있는 전 회장의 인생은 1961년 새롭게 시작된다.

대관령에 국내 최대 목장을 만들어 낙농업과 목축업을 전파한 효시의 기록도 전 회장이 가지고 있지만, 우리 국민을 초근목피의 기아(飢餓)경제로부터 탈출시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삼양식품을 설립하고, 숱한 우여곡절 끝에 회사 설립 2년 만에 제2의 주식이라고 불리게 되는 라면을 선물했을 때 그 기쁨과 라면의 원조를 탄생시켰다는 자긍심은 참으로 대단했다.

그러나 국민이 보내준 환희의 훈장보다 꼭 20년 전인 1989년 11월, 학문에도 없는 ‘공업용 우지’라는 권력의 비수에 맞은 고통의 편린은 말할 수 없이 잔인했다.

가장 혹독한 시련으로 꼽히는 우지파동으로 사실상 기업이 도산 직전까지 갔을 때 정치적 압박과 일부 검찰의 여론몰이에 맞서 대법원까지 가는 7년9개월간의 법정투쟁 끝에 기어코 무죄를 확인받은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진실을 밝히겠다는 그의 무서운 집념이 일구어낸 결과였다.

동시에 노태우 정권이 이 나라 기업인에게 가한 참혹한 형벌과 맞선 혈투의 이력서이기도 했다. 전 회장은 인간의 한계수명이 120세가 정설로 되어 있기 때문에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과거의 악연에 관해서는 이미 마음을 비웠고, 울화통이 치밀 때는 독서보다 좋은 약이 없다며 책상 위에 가득 쌓인 책을 가리켰다.

그의 독서량이 어느 기업인도 따를 수 없을 만큼 대단하고, 책을 6권이나 썼다는 것도 재계에서는 이미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속상할 때는 책을 약처럼 본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그는 여전히 불편한 세상사를 많이 지켜보는 것 같았다. 아직 한계수명까지는 더 활동하셔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자 “우리 삼양식품이 2~3년 안에 무차입경영을 실현할 것이다.

중역 인사권도 2세한테 물려주고 책임경영을 할 수 있도록 해줬다. 나로서는 지켜보는 일이 남았고, 개인적으로는 최근 치아 때문에 고생하고 있다. 죽음도 새로운 세계로 가서는 생명체이기 때문에 건강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어야 한다”면서 유언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지만 특히 최근의 근황이 솔깃하게 들렸다.

“윤주영 전 장관이 <백인백상(百人百想)>이라는 사진집을 준비하면서 우리 사회에 많은 공적을 남긴 분의 근영(近影)과 함께 그분들이 바라는 미래의 우리 사회에 대해 고견을 모아 사진집에 같이 싣는다고 해요. 그래서 내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내가 생각하는 바를 몇 자 적어 줬는데, 나는 오늘의 잘못 때문에 내일을 희생해서는 안 된다고 자주 강조해요.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을 지금도 하고 있고, 그래서 원고도 쓰고 각계 사람을 만나면 상호 공존공영하면서 이기주의를 배척하는 노력을 하라고 당부하거든. 인간은 누구나 태어날 때 각자가 해야 할 사명을 가지고 나와요. 그 중 하나가 인류를 선진으로 변화시키는 데 공헌하라는 사명이야. 왜? 인간이기 때문에 그런 사명이 주어져요. 만물의 영장이니까 마음을 가지면 할 수 있다 그거지. 그런데 인간에게는 3대 부정심리라는 게 있어요. 부정부패·무위도식·무질서 조장 심리, 이게 있어. 그렇기 때문에 이기주의자가 나오고 악폐가 나오는데, 그걸 치유하는 것이 교육이라는 말이오. 그런데 교육의 최고 목표는 덕을 가르치는 것인데도 기술을 가르쳐. 먹는 기술을 가르치고, 빼앗는 기술을 가르치고, 지배하는 기술을 가르치고 말이지. 그렇게 되니 도덕이 황폐해지고 정의가 붕괴하고 미래가 희생당하게 된단 말이야.”

전 회장은 의식적으로 정치문제를 피해서 말했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모든 것이 정치로 풀어야 할 충고 같았다.“자본주의를 자꾸 강조하는 것도 도덕의 결함에서 오는 거예요. 자본주의의 질서는 필요하지만 자본주의가 훌륭한 미래를 약속한 바도 없고, 성장률을 높인다는 약속도 없고, 인류의 위기를 구한다는 약속은 더더욱 없어. 부의 밸런스를 조정하는 역할도 자본주의가 하는 게 아니라 통치자의 덕목이 하는 거야. 그래서 요즘 교육이 큰일났다고 말하는 건데, 내가 생각할 때 인과응보(因果應報)를 가르치면 모든 게 해결돼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소중하게 체험한 가르침이 거기에 축적돼 있어. 대자연의 법칙을 선현들이 경험으로 집대성해 놓은 것이 인과응보라는 말 속에 들어있어요. 인과응보의 무서운 가르침을 우리 사회가 깨닫지 않으면 법도 약자와 빈자만 지배하고 부자와 부패권력에는 아부하는 결과를 초래할 거야. 그러면 미래는 계속 불행해지고 또다시 우리는 내일을 희생하게 돼있어요. 부디 생각 좀 하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어. 삶의 법칙이 무엇이다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는 거예요.”

라면을 만들게 된 배경에는 전 회장에게 인생을 거는 결단이 담겨 있을 것이다. 전 회장은 동방생명회사를 만들었고 제일생명도 운영했을 만큼 1950년대에는 요즘의 기준으로 봐서도 재벌이었다. 그랬던 전 회장이 라면사업을 생각한 것은 결코 단순할 수 없는 ‘인간사랑’이었던 것 같다.

“옛날 중국 고사에 식족평천(食足平天), 먹는 게 족하면 천하가 태평하다는 말이 있어. 중국 제왕들도 그렇게 말했고, 국민도 그렇게 생각했거든? 어느 나라 국민이나 마찬가지예요. 먹는 게 제일이야. 내가 동방생명을 만들고 나중에 제일생명도 운영하다가 넘겼지만, 생명보험이라는 게 뭐요? 1년에 사람이 얼마나 태어나고 몇 살 때 얼마나 죽고, 또 평균 수령이 어떻게 된다 하는 숫자가 나와 그것을 보험료 산출 근거로 삼는데, 결국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한다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 아니오? 그런데 1960년대가 돼도 식량이 모자라 하루에 두 끼밖에 못 먹어요. 그게 우리나라 실정이었어.
그것도 우리가 수복하고 서울에 왔을 때 미국에서 ‘480호’라고, 원조 밀가루를 거의 무제한으로 줬기 때문에 그것을 먹고 살았어. 무상으로 줬지만 그때 그 밀가루가 없었다면 아마 우리는 굶어 죽었을 거요. 그만큼 식량이 부족했으니까. 그걸 받아 전부 수제비 해먹고 국수 해먹고 그랬는데, 그것만 먹어서는 안 되잖아. 육류를 먹어야 다리에 힘도 붙고 일을 하는데, 고기를 어디서 먹어요? 그래서 꿀꿀이죽이라고, 지금 사람들은 모를 거야. 남대문시장 안에 가면 미군이 먹다 남은 쓰레기 같은 고기 뼈다귀나 닭다리 같은 것을 담아 와서 끓인 죽이 있는데, 그게 꿀꿀이죽이에요. 그걸 먹으려고 수백 명이 아침마다 늘어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했어. 양재기라는 것을 아는지 모르겠는데, 양재기통 하나에 5원입니다. 5원으로 생명을 부지하는 거요.”

 

꿀꿀이죽 이야기를 할 때는 그의 눈 속에 물기가 고이는 것 같았다. 꿀꿀이죽을 기억하는 국민이 아직은 많을 것이다.
“국민의 건강이 유지돼야 나라도 일어서는 것이니 어떻게든 먹여야겠는데 식량은 절대부족이고, 누군가 나서서 정책을 세워 해결해줘야 할 텐데 정치가에게 기대할 수도 없고, 정말 참담했어요. 또 미국사람이 한없이 우리를 먹여 살릴 리 없으니 480호 원조도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르고, 생각할수록 암담했지요. 그럴 때인데 아마 1959년일 거야. 마침 도쿄(東京)에 출장가서 라면을 먹어보게 됐어요.
그때 우리 돈으로 라면 한 그릇에 30원 정도 했는데, 먹어보니 영양가도 들어 있고 맛도 좋고 희한했어. 그때 그 일본 라면이 85g입디다. 삶지 않은 상태에서 면의 중량이 그래. 현재 우리의 일반 라면은 120g이거든? 그러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 국민의 배가 일본 국민의 배보다 크다는 말이에요. 지금도 일본 라면은 85g이야. 그래서 일본에서 먹어본 라면을 생각하고 이것으로 빈곤을 퇴치하는 길을 찾아야겠다 싶어 백방으로 알아보는데, 느닷없이 5·16이 일어나잖아요?
5·16도 경제를 살리겠다고 일어났지만 그게 또 혁명한 사람들 생각처럼 쉽게 되나요? 특히 먹고 사는 문제는 정변이 일어난다고 바로 해결되는 게 아니에요. 남산 밑에만 가도 굶주린 채 누워있는 사람이 수없이 많고, 청계천으로 가면 비참해서 못 볼 지경이야. 애를 낳아 키우지 못해 남의 집 대문 앞에 버리는 경우도 숱하게 있었어요. 먹지 못하니 젖이 나오지 않잖아요.
그런 장면을 보면서 정말 가슴이 아프고, 그때 결심을 굳힌 거야. 정변 나기 전에 알아봤던 것도 있고, 내가 나서서 라면공장을 시작해야겠다고 말이지. 내가 정치가도 아니고 사회사업가도 아니지만 굶어 죽는 사람들을 보고 그냥 있을 수 없었어. 그걸 인간에 대한 막연한 애정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심정으로 시작한 것이 라면사업이에요.”
결단 2

정부가 해결하지 못하는 일을 개인이 나서서 추진한다는 것이 쉬울 리 없었을 것이다. 그 과정을 다 설명하기도 쉽지 않겠지만 무엇보다 정부 정책부터 국민이 무엇을 하고 싶다고 해서 하게끔 뒷받침하던 시절이 아니었다. 특히 라면공장을 세우려면 기술도 있어야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이 라면을 생산할 수 있는 기계설비였다.

그러나 절벽이었다. 설비를 들여와야 하는데 심각한 것이 달러 매입이었다. 4·19 후 민주당 정권이 들어섰지만 갑자기 무역이 늘어난 것도 아니고 자유당 때 조금 남았던 달러까지 다 써버렸으니 정부에 달러가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정보부장 하던 JP(김종필)를 만나야겠다는 것이었다.

“정보부에 내 고향 후배가 국장으로 있었어. 그 사람을 통해 JP를 만났어요. 그게 JP하고 지금까지 우정을 이어오게 된 계기인데, 일본 라면 하나를 들고 그분을 만나니 처음에는 영문을 몰라 멍하게 쳐다봐. 표정도 희한하고. 허허허…. 그래서 라면부터 끓여서 맛을 좀 보라고 했어. 맛이 어떠냐고 물었더니 맛있다고 그래. 그러면서 이게 뭐냐고 물어. 그래서 설명했어요. ‘혁명을 왜 했느냐? 국민들 배부터 채워줘야 할 거 아니냐? 국민들한테 무엇보다 급한 게 쌀인데, 쌀이 없다면 대용할 수 있는 뭔가를 생산해줘야 할 것 아니냐’ 그랬더니 정말 빨리 알아들어요. 당장 하라는 겁니다. 허허허….

그런데 달러가 없지 않으냐? 당시 기계 견적을 받아보니 라면을 생산하는 라인 하나를 발주하자면 6만 달러가 있어야 한다는 거요. 그때 국가 외환보유고가 3,800만 달러인가밖에 없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기가 막히는 일이지. 그러니 달러를 주나? 준다는 것은 공짜가 아니고 내가 우리 돈을 주고 정부가 가지고 있는 달러를 사는 거예요. 그런 시절이야. 그래서 정보부가 배정받은 달러를 내놓으라는 게 내 요구였어. 나는 실질적으로 정책을 추진하는 부처가 정보부였으니 거기에는 있을 줄 알았지. 그런데 없대요. 처음에는 JP가 건성으로 없다 하는 줄 알고 정말 각오를 단단히 하고 섭섭한 소리를 막 했어. 그때 정보부장이면 감히 쳐다보기도 겁날 때 아니오? 허허…. 그런데 진짜 없다는 거야. 그래서 JP가 어렵게 알아보더니 마침 미국에서 농림부가 쓸 10만 달러가 들어왔다면서 그 중 5만 달러를 겨우 살 수 있게 해줬어요. 그거라도 감지덕지다 하고 당장 신용장 열고 일본으로 갔지만 그때 달러 해결이 안 됐으면 라면공장은 어려웠어요. 그게 절묘한 운이고, 어찌 보면 내 인생을 변화시킨 순간이야.”.

 결단 3

보험회사 사장까지 하던 전 회장이 일본에서 라면 만드는 기술을 배우려고 공장 근처에 방을 얻어 견습공으로 일하던 것까지 다 이야기하자면 기가 막힐 것이다. 더구나 면(麵)의 원조는 중국이지만 라면으로 개발한 것은 일본이기 때문에 라면 생산 시설도 시설이지만 라면을 만드는 기술을 들여온다는 것은 정말 군사비밀 얻어오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그걸 또 묘조(明星)식품 오쿠이(奧井) 사장이라는 정말 큰인물을 만난 덕분에 가져오게 됐는데, 그 과정도 사실 내가 양심적으로 살아오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거야. 기술을 주기 전에 나에 대한 뒷조사를 다 하고, 내가 보험회사 사장이었다는 것도 자기들이 조사해서 알고는 깜짝 놀라. 그러고는 만나는 친구들의 됨됨이까지 전부 알아보고는 참 정직하게 살아온 사람이라면서 그제야 가르쳐줬어. 자기 심복인 비서실장한테도 가르쳐주지 않던 기술을 말이야.
그러면서 그 양반이 나보다 다섯 살 아래인데 한국의 삼양식품이 정상궤도에 오를 때까지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그래요. 은인이야. 그러더니 정말 기술자를 보내서 시설부터 첫 생산될 때까지 전부 도와줬어요. 그래서 첫 출하를 1963년 9월15일에 했어. 창업은 1961년도에 했지만 2년 만에 라면시대를 연 거야. 그러고 첫 출하 날을 우리 삼양식품 창사일로 삼고. 허허허….”

일본이 최대 라면회사인 닛신(日淸)을 통해 국수 가락에 양념을 첨가해 건조면으로 팔다 기름에 튀겨 라면이라는 형태로 만들어낸 것은 한국보다 4년 먼저다. 그러니까 삼양라면이 일본보다 4년 뒤에 나온 것이다어쨌든 숱한 어려움을 거쳐 삼양식품이 첫선을 보였지만 라면이 무엇인지 몰라 옷감 종류냐고 묻는 국민에게 라면을 알리느라 전 회장은 또 재산을 거의 쏟아 붓다시피 한다.

더구나 허기진 국민에게 제대로 영양공급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무리하게 양질의 스프를 만든 것도 자금 압박을 가져왔다.

“밀가루로 수제비만 해먹어도 견디는데 거기에 비해 라면의 영양가는 대단한 편이었어. 그때 우리 뱃속에는 지방분이 없었어. 사람이 지방을 하루에 최소한 70g은 먹어야 하는데 5g도 못 먹었으니까. 밀가루는 지방분이 3~4%밖에 안 돼요. 지금은 소득이 높아져 오히려 비만으로 고생할 정도가 돼서 지방질을 멀리해 18g밖에 안 넣고 비타민·칼슘·단백질 같은 영양분을 다양하게 추가하지만, 초기에는 제대로 밥을 먹지 못했으니 식량 대용으로 이보다 좋은 게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만든 거예요.



그래서 이걸 우리 국민한테 보급만 하면 나로서는 이보다 더 큰 보람이 없겠다 했고, 다른 생각 할 겨를도 없이 첫 제품을 낼 때부터 일본보다 양이 많은 100g으로 해서 주황색 포장지에 ‘즉석 삼양라면’이라는 상표를 새겨 판매했어. 그런데 국민이 라면을 알아야지. 허허허…. 그걸 알리는 기간이 나로서는 정말 고통이었어. 솔직히 그때 심한 좌절감을 느끼고 그만둘까 몇 번이나 망설였지. 가진 재산 거의 다 털고 보험회사 채권까지 거의 넣었으니까. 애들은 커가는데 큰일났잖아.
아마 그 당시 서울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라면을 알리는 현수막이나 광고를 한두 번씩은 봤을 거고, 무료 시식도 해봤을 거야. 그런 식으로 라면을 알렸으니 수익도 없이 얼마나 투자가 됐겠어? 그런 상황에서 끝까지 버틸 수 있게 해준 것은 허기진 국민한테 희망을 잃지 않도록 해줘야 한다는 내 나름의 사명감 같은 것이었어요. 그런 진심이 없었다면 정말 포기했을 거야….”

결단 4

고진감래라고 했던가? 전력을 다해 라면 홍보를 한 지 1년쯤 지나면서 회사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삼양라면이 있다는 것이 알려졌다는 징후가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예상하지도 못했던 기업들의 공격이 삼양식품을 향해 진격해왔다.
갑자기 분위기가 이상해요. 1년쯤 되니 이제 좀 알려졌구나, 찾는 사람도 많고 맛이 있다는 소리도 들려오고 그러는데 어느 날 보니 라면공장이 여기저기 생기는 거야. 허헛…. 내가 한동안 기가 막혀 쳐다보고 있었어. 경쟁사가 네다섯 군데나 나온 거야. 상상도 못했던 일이지. 배고픈 사람을 위해 봉사한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는데 1년 남짓 사이에 어렵게 알려놓으니까 경쟁자가 그렇게 나오리라고 어떻게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어?
당시 복서들이 챔피언 돼서 인터뷰하면 거의 라면 먹고 운동했다고 그랬잖아? 그 정도로 배 채우기가 어려웠고, 당시 자장면이 40원인데 라면 값을 10원 받고 했는데 말이야. 그러면 한 개에 5전쯤 남아요. 이게 돈 될 게 뭐 있어? 자장면은 라면에 비해 원가가 4분의 1도 안 들어. 라면은 기름부터 다르고 스프에 들어가는 게 천지 차예요. 그렇기 때문에 라면은 한 개에 1원도 아니고 5전 정도 남더라니까. 그런데 여기저기서 생겨나니 말이야. 참 별일이 다 있었어. 이게 그냥 할 수 있는 사업이 아니야. 나중에 그네들이 워낙 이익이 박하니까 라면값을 올리자고 했지만, 나는 끝까지 인상할 수 없다고 고집했어. 먹지 못하는 고통을 아느냐고 말이야. 저 사람들한테는 10원도 크고, 10원이 생명 값일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가격을 올리느냔 말이야. 그렇게 했더니 결국 맛이나 가격에서 우리를 당할 수 없자 점차 정리되더라고. 그때도 나로서는 위기였지. 집에 생활비도 갖다 주지 못하고 말이지….”

 

언젠가 전 회장의 부인 이계순 여사를 만난 기억이 있다. 흔히 이웃에서 만날 수 있는 어머니들처럼 평범한 모습의 여사는 인터뷰라는 것을 알고는 “아유~, 애들 일곱을 키운 사람이 뭘, 우리는 말도 잘 못해요” 하며 손사래를 쳤지만, 당시 상황을 겨우 확인해주는 몇 마디를 했다.
“직원들의 월급은 이날까지 한 번도 거른 적이 없다고 하셨지만, 집에 가져오는 생활비는…. 월급날이 오늘이면 이틀 전부터 12시 사이렌이 울려야 들어오시고 3~4일 후까지는 눈 뜨기 전에 얼른 새벽에 나가세요. 뒷모습을 보면 제가 느끼죠. 그러니까 사는 게 말이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라면 하기 전에 보험회사를 가지고 계셨으니 여유 있는 사람을 주로 만나고 그렇게 좋았던 양반인데, 그걸 마다하고 뜻이 있어 하시는 걸 제가 듣기 불편한 소리를 할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 저만 속이 숯덩이가 되는 거지요, 뭐. 초기 몇 년은 참 힘들었어요.그러고 너무 어려울 때는 중간 중간에 그만둬야겠다는 말씀을 몇 번 하셨어요. 그래서 이제는 그만 정리하나보다 했죠. 그런데 하루는 난데없이 쌀 5가마하고 연탄 600장을 사다 줘요. 그러면서 알아서 하라고, 나는 더 이상 모르겠다고 그러시잖아요? 그게 나중에 보니 갖고 계시던 채권까지 전부 팔았던 거예요. 그때는 눈물이 죽 나더라고요. 연속극 같은 거 보면 닦아도 닦아도 눈물이 멈추지 않더라는 말을 하던데, 그때 그런 말이 제 이야기 같더라고요. 그런 시절도 있었죠, 뭐.”

결단 5

우리나라에서 소에 사료를 먹이지 않고 풀을 먹이는 목장은 서울 여의도 넓이의 6배가 넘는 1,800만m2 규모의 대관령목장이 유일할 것이다. 대관령목장은 뛰어난 자연경관과 주변 환경 때문에 최근에는 많은 관광객이 찾는 명소가 됐다. 그가 대관령목장을 만든 계기는 무엇일까?

“목장은 내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한 거야. 식품회사를 하면서 목장 운영하는 회사가 삼양식품 말고 어디 있어요? 다시 말하면 하지 않아도 될 목장을 해야겠다고 결심했을 때는 이유가 있었다는 얘기야. 내가 라면에 어떤 정신을 심고 있었는가 하는 것은 대관령목장을 보면 알 수 있을 거요.
사실 라면을 하다 보니 라면 한 개 가지고 한 끼 먹는 어려운 사람에게는 도저히 영양학적으로 모자랄 것 같아.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140억 개의 뇌세포와 60조나 되는 일반세포로 구성되잖아? 그 중 매일 10만~20만개의 세포가 사멸하는데 특히 왕성하게 일할 나이에 영양이 결핍되면 어찌 되겠어? 세포가 더 급속히 죽을 거 아니오? 그래서 스프에 소고기를 넣어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일본도 그렇고, 지금까지 소고기를 넣는 라면은 삼양라면을 제외하고는 세계 어디에도 없어요. 일본은 소고기 맛이 나는 향료를 넣어. 우리나라도 다른 회사는 소고기를 안 넣어요.
삼양이 소고기라면을 시작한 동기가 바로 거기 있어요. 잘 먹이자고 말이야. 그래서 소를 직접 길러야겠다, 직접 키워 건강한 소고기를 듬뿍 넣자 하고 시작한 게 목장사업의 계기예요. 그런데 이 나라에서 처음 시작하는 사람은 뭐든지 고생하고 힘들어. 개척자는 외롭고 힘들다지만, 무척 고생했어. 정부 지원? 아이구, 순 엉터리들이야. 오히려 십수 년 동안 어렵게 가꾸어 놓으니까 세금으로 빼앗아갈 생각이나 하고…. 그런 이야기, 한두 시간에 다 할 수도 없고, 정말 제대로 된 식품을 내놔야겠다는 일념으로 목장을 했다는 얘기만 하지요.”

 

결단 6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먹을거리 사건만 터지면 언론이 예로 드는 사건이 ‘우지사건’이다. 그만큼 사회에 던진 파장이 크기도 했지만, 냉정히 분석하면 우지사건을 인용한다는 것 자체가 우지를 넣어서는 안 되는데 넣었거나 식용으로 사용할 수 없는 우지를 넣어 마치 불량식품이 된 것처럼 아직도 잘못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우지파동은 ‘사건’만 있고 ‘진실’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대체적 시각이다. 물론 대법원의 무죄 판결로 진실이 밝혀졌지만, 그간의 피해는 여전히 지워질 수 없는 한처럼 남아있는 것도 사실이다.

2000년 7월4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이 다른 사유와 함께 서울지검 재직 때 ‘우지라면사건’을 지휘했던 검사가 사법부 최고기관인 대법원의 대법관으로 임명제청된 데 대해 공개적으로 임명을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한 것만으로도 우지사건이 진실을 왜곡한 정치적 사건이었음을 입증하는 셈이 됐다.

어쨌든 1989년 11월3일 ‘라면을 공업용 우지로 튀긴다’는 익명의 투서로 검찰의 수사가 시작됐고, 삼양식품을 비롯한 식품 관련 5개사 대표 등이 ‘보건범죄 단속에 관한 특별조치법’과 ‘식품위생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전 회장은 그때의 가혹한 악몽을 잊지 못해서가 아니라 진실이 무엇인지는 국민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창피를 모르는 노태우 정권과 무지한 검찰의 정치적 합작이야. 말할 것도 없어. 처음에는 너무 황당하고 절대 불법을 저지르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에 아예 다른 생각은 할 수도 없었어. 정치적으로 맞을 일이 있었는지, 조사도 하기 전에 결과부터 언론에 흘리고, 꼭 함정수사 같은 느낌도 들고 말이지.
그런데 사건을 어마어마하게 확대하니 우리는 원래 규정보다 10배나 좋은 우지를 써왔기 때문에 제품으로는 위반될 게 절대 없는데 혹시나 해서 우리가 그때까지 정제한 물건을 전부 미국에 다시 보내 분석을 의뢰했어97개 항목에 걸쳐 해왔는데 하나도 유해한 게 안 나와요. 그래서 확신과 자신감을 가지고 내 방에 써 붙인 것처럼 정직과 신용이라는 신념에 욕될 일은 결코 하지 않았다, 절대 무해하다는 말을 했지. 그런데도 계속 확대되고, 그러면서 검찰이나 언론이 일제히 비도덕한 기업이니 악덕기업이니 그런단 말이야. 그때는 정말이지, 사회가 어떻게 이럴 수 있나 하고 전율을 느꼈어요.”
이때의 사건으로 전 회장은 형언할 수조차 없는 정신적·물질적 피해를 보았다. 특히 수사의 핵심이 된 삼양라면은 결과적으로 검찰 발표와 언론 보도로 당시 60%에 달했던 시장점유율이 10%대로 급격히 하락했고, 100억 원 이상의 시중 제품이 반품·폐기되는 등 그 피해는 수천억 원대에 달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회사의 명예가 끝없이 실추된 것은 계산할 수 없는 큰 손실이었다. 전 회장이 모든 것을 던져서라도 진실을 밝히려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분명히 말하지만 검찰이 우지를 공업용이라고 했는데, 공업용이나 비식용유라는 용어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어요. 모든 식용기름은 원유에서 출발해요. 콩기름도 짜면 처음에는 원유, 채종유도 짜면 원유, 샐러드유도 원유요. 그 원유에 대해서는 세계 어느 나라도 규정이 없어요. 그걸 반드시 정제 과정을 거쳐야 먹는 거야. 정제 과정을 거친 기름에 대해서는 국가 규정이 다 있어.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요.
그러니까 우지의 경우도 원유를 들여다 정제해서 그 산가, 주로 산가로 계산하는데, 산가 0.3 이하를 튀김용으로 써야 한다고 돼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산가가 많아야 0.03 정도, 그러니까 10배는 더 좋은 기름을 썼어. 그런데 공업용이 도대체 무슨 소리냐 이 말이야. 우지는 1등급에서 16등급까지 있는데, 1등급은 이터블(eatable)탤로라고 해서 그대로 먹을 수 있는 우지라는 뜻이고, 소 한 마리 잡아야 한 주먹 나올 정도요. 그 다음 2~3등급은 정제해서 얼마든지 먹을 수 있는 기름이야. 그걸 1등급이 아니니 다 먹을 수 없는 우지라고 판단하는 것은 세계적으로 웃음거리밖에 안 되는 거야.
우지파동 때 우리가 사용한 것이 2~3등급이라고 했지? 2등급 ‘톱 화이트 탤로’나 3등급 ‘엑스트라 펜시 탤로’는 식용을 목적으로 건강한 소에서 채취한 신선한 지방 부분이야. 그렇기 때문에 ‘한국식품과학회’에서 식용 우지로 사용해도 아무런 장애나 문제가 있을 수 없다는 공식 견해를 밝혔던 것이고, ‘미국동물유지협회’에서도 똑같은 의견을 냈단 말이야. 그 사람들이 전부 평생을 그 분야에서만 연구해온 학자들인데 유해한 것을 유해하지 않다고 하겠어?”

전 회장은 권력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고도 했다. 그러나 무죄로 밝혀졌으니 이제는 다 말할 수 있을 텐데도 그는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했다.

“우리 국민의 건강이야. 이것만은 분명히 알아야 해. 우지사건 이후부터는 정부가 팜유를 쓰라고 그랬는데, 우지보다 팜유가 더 싸요. 우지사건 당시에도 팜유가 있었고, 훨씬 가격이 싸고 우지가 높았어. 지금도 팜유가 더 싸. 그러면 우지를 쓸 게 아니라 팜유를 써야 회사는 이익이 더 남는 거 아니오? 그런데 왜 비싼 돈 주고 우리가 우지를 썼겠어. 기자들이 이런 의문만 가지고 취재했어도 나라가 온통 난리가 난 것처럼 되지는 않았을 거야.
미국식품의약국(FDA)의 감시가 철저한 미국에서는 정작 팜유를 안 써요. 이건 중요한 얘기야. 미국에서는 팜유를 쓰지 않는다고 광고해. 왜냐? 팜유를 많이 먹으면 늙어서 동맥경화증·뇌졸중·의식불명 같은 증상이 심해진다고 해서 미국에서는 아이들이 먹는 과자에도 팜유를 쓰지 않아. 일본도 그렇고. 선진국에서는 절대 팜유로만 제조하지 않아. 그 문헌이 다 있어. 이런 것은 국민 건강을 위해서라도 제대로 알려야 하는 거 아냐?
내가 팜유보다 더 비싼 우지를 쓴 것은 지금도 소신으로 가지고 있는 창업정신과 국민건강 때문이야. 꿀꿀이죽을 왜 먹었어? 그나마 우지라도 먹지 않으면 다리에 힘이 빠지고 골다공증이 생겨. 나이 먹으면 앉은뱅이가 된다고. 뼈가 쉽게 부식돼. 두 다리에 힘이 있어야 건강하고 왕성하게 일해서 경제를 살릴 거 아니오!비록 라면 하나지만 국민 건강을 생각해야 한다는 전 회장의 말에는 누구도 잊어서는 안 될 메시지가 깊게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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