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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관성이 없는 선은 결국은 자기 이익을 위한 위선일뿐이다>
05/24/2020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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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일관성(一貫性)이 담보되지 않는 선(善)은 위선(僞善)이다.>

*2019.5월, 포스팅한 원고를 다시 읽으며.....

“그 사람은 참 예의가 바르다”
“그 사회는 인권을 소중히 여긴다”
한 개인이나 한 공동체에 대한 평가가 진정성을 가지려면 반드시 일관성이 담보되어야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예의가 바르다’고 정평이 났는데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는 깍듯하게 대하고 자기 보다 무능한 사람에게는 함부로 대한다면 그 사람은 결코 ‘예의가 바른 사람’이 아니다. 다만 어떤 사람에게 잠시 ‘예의 바른 사람’처럼 보였을뿐이다. 이렇게 일관성이 결여된 선(善)을 우리는 위선(僞善)이라고 부른다.

<미얀마의 아웅산 수치 여사>는 미얀마의 민주화를 위해서 군부에 맞서 투쟁하다가 30년 가까이 가택연금을 당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녀는 1991년에 노벨평화상을 받고 세계인권운동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마침내 2016년 4월 총선에서 국제적인 지지를 받고 승리함으로써 미얀마의 실제적인 국가 지도자가 되었다.

그런데 최근 미얀마의 소수 종족인 로힝야족 수천명이 조직적으로 군부에 의해서 학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문제는 인권운동가 출신인 <아웅산 수치>가 이 사건에 대해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침묵하므로 군부의 손을 들어줬다는 것이다. 평생을 ‘미얀마의 민주주의와 인권회복’을 위해서 헌신하였고 또 그 헌신을 힘입어서 국가 지도자가 되었는데 정작 소수민족이 인종청소를 당한 사건에 대해서는 침묵을 하다니? 국제 사회는 그녀에게 분노하고 비난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침묵 가운데 있다. 이에 캐나다, 영국 등 세계 각국에서는 그녀에게 수여한 ‘명예시민, 수상을 비롯한 각종 명예’를 박탈했고 또 이미 수여한 <노벨평화상> 수상 취소에 대한 청원도 올랐다. 그녀에게 인권은 일관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해방 후, 우리의 현대사 70년을 정치적인 면에서는 <민주주의 실현과 인권을 위해서 달려온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0년 4.19,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1987년 6월 항쟁....그래서 우리 대통령 가운데서도 민주화 운동 및 인권운동을 했던 인물이 4명씩이나 있다. 그들은 권력의 부당한 폭력에 대항하여 싸웠던 ‘민주주의 화신과 같은 이미지’를 등에 업고 대통령이 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민주주와 인권을 위한 투쟁과 헌신>이 진정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그들이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일관성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인권>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모든 인류가 누려야 하는 보편적 가치>이므로 우리 국민을 넘어서서 전 인류에게도 확장 적용해야 할 것이다. 한때는 <아웅산 수치>처럼 인권운동의 힘을 빌어서 권력을 쥔 이후에 돌변하여 인권탄압을 한다면 그는 거짓의 사람이다.

<5.18 민주화운동 보상자의 문제>....<일본 종군 위안부 소녀상, 징용자상 설치 문제>로 여전히 온 나라가 시끄럽다. 그러나 이 싯점에 우리가 깊이 생각해볼 것은? 과연 우리가 흥분하고 외치는 것이? 정말로 <인간의 존엄성>을 위함이었는가?를 스스로 물어야 할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면 우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할 것이다. 과거 우리가 당했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김일성 유일체제의 무자비한 국가폭력>으로부터 고문, 공개처형, 강간, 낙태, 강제수용소 강제노동을 당하고 있는 <현재의 북한인권의 실상>을 외쳐야하고 또 그 문제 해결을 위해서 헌신해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가 <80년 전에 유린당한 일제의 종군위안부 소녀상과 징용자상>을 설치해서 조선의 딸과 누이를 짓밟은 일제의 만행을 규탄한다면 지금 이 시간 <현재 중국 땅에서 우리 국민인 탈북여성들>이 년간 1억달러 규모의 성매매시장에서 중국 사내들에게 성노예로 살아가는 것에 분노하고 또 그 문제 해결을 위해서 국가적으로 헌신해야 할 것이다. 한번에 겨우 5,000원에 치마를 벗어야 하거나 단돈 17만 2,000원에 중국 홀아비에게 팔려서 성노예처럼 살아가는 탈북여성들이 중국 땅에 수만 수십만이 있다. 심지어 10살짜리 가냘픈 비둘기같은 탈북 소녀도 무지막지한 사내놈들에게 성노예로 유린당한다고 영국 언론은 보도했다.

우리 사회는 한때 산속의 도룡뇽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국가적 사업인 고속철도(KTX) 공사를 가로막고 청와대 앞에서 단식 시위를 하던 대단한(?) 여자 스님도 있었다. 또 오늘날은 길에 버려진 개나 고양이를 학대하면 감옥으로 보내고, 또 버려진 그 동물들을 돌보고 입양하는 미물의 생명까지도 존중하는 사회가 되었다. (물론 어머니 자궁 속의 태아는 낙태해도 처벌하지 않는 희안한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현재 국가폭력으로 비참한 박해를 당하고 있는 <북한의 주민들>을 위해서나 또한 중국 땅에서 <성노예로 살아가는 탈북여성들>의 문제에 대해서 분노하지 않고 침묵한다면 그 동안 우리가 외친 <위안부 할머니 인권, 생명 존중>은 모두 위선이다. 그리고 침묵하는 우리는 <북한정권과 중국공산당 정권과 공범자들>이다. 또 우리 지도자 역시 이 문제를 당당히 국민들과 국제사회에 외쳐 공론화하지 않는다면 그는 <아웅상 수치>와 무엇이 다른가? 그리고 우리 국민들 또한 <아웅산 수치에 대해서 침묵하는 미얀마 국민들>과 무엇이 다른가?

<일관성이 없는 선은 결국은 자기 이익을 위한 위선일뿐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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