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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며 살기(grace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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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초상집과 잔칫집 ④
01/24/2020 0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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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초상집과 잔칫집

(전도서 7:1-4)

 

3. 초상집에 가는 마음이란 어떤 마음일까?

 

1) 초상집에 가는 마음이란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향하는 마음이다.

우리는 결국에는 다 버리고 떠나게 될 것이다. 지푸라기 하나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 당신이 아무리 많이 모아서 쌓아두면 무엇하겠는가? 결국은 다 남의 것이 되지 않겠나? 그러니까 이왕이면 죽은 다음에 남들이 내 재물을 마음대로 처분하도록 하지 말고, 아직 내가 주장할 수 있을 때에 좋은 일에 쓰면 얼마나 좋을까

예수님은 빈천자들을 위해서 일생을 사셨다. 예수님은 가난한 집에서 나셨고, 가난한 동네에서 사셨고, 가난한 사람들을 제자로 삼으셨고,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다니셨다. 베데스다 연못가의 병자들을 찾아가셨고, 아무도 상대하려고 하지 않는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주셨다. 문둥병자들을 더럽다고 쫓아내지 않으셨고, 오히려 그들을 만나서 고쳐주셨으며, 가난한 과부의 외아들이 죽은 것도 살려주셨다.

그런데 우리도 그렇게 하는가? 우리는 누가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하면 입이 벌어져서 부러워하지 않는가? 교회에서도 돈 많은 사람이 큰소리치고, 가난한 사람은 숨도 크게 쉬지 못하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지 않은가? 목사가 돈이 많으면 어떤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에게 오지 않고, 돈을 요구하려고 찾아온다. 결코 아름다운 일이 못된다.


예수님이 부자 청년에게 말씀하실 때에 결론적으로 이르시기를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라고 하셨다. 그러나 그는 돈이 많았기 때문에 근심하면서 돌아가고 말았다. ! 이 돈이 얼마나 매력이 있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바르게 따르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빨리 깨달아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마음을 두자. 나를 부요하게 하신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잔치를 배설하려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14:13-14)라고 하셨다. 또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발을 불지 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6:2)라고도 하셨다.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이 가난하고 병들고 외롭고 감옥에 갇힌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찾아오신다. “예수님의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가 바로 이런 모습으로 오늘도 우리에게 찾아온다. 눈이 열려야 한다. 예수님의 원수를 예수님의 형제인 줄로 착각하지 말자. 우리가 마땅히 도와야 할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외면하면서, 세상의 부와 영광과 권력을 자랑하는 자들을 부러워하여 그런 자들을 따라가고 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 염소의 무리에 속한 자가 될 것이다.


삭개오는 당시의 유대인들이 볼 때에는 가장 혐오스러운 인물이었을 것이다. 세리 중에서도 장()이 아니었는가?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그런 나쁜 사람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선언하셨을까? 역시 우리는 외모만 본다. 그러나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우리가 섣부른 판단을 자제할 줄 알아야 한다. 남을 판단하기 전에 좀 더 신중히 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삭개오는 예수님을 뵙기를 사모하여 뽕나무 위에까지 올라갔던 사람이었다. “오늘 내가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라는 말씀을 기쁘게 받아서 자기 집에 모셨다. 그리고는 말하였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4배로 갚겠나이다.” 드디어 예수님이 선언하셨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부자 청년과 비교해 보자. 삭개오는 완전히 자발적으로 예수님의 뜻을 먼저 말하고 있지 않는가? 그런 인물이 되어야 한다.

 

2) 초상집에 가는 마음이란 의인의 죽음을 생각하는 마음이다.

발람이라는 사람은 이방 선지자로서 모압 왕 발락의 초청을 받아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했다가 실패하고 자기도 비참하게 멸망한 불운의 사람이다. 그런데 그도 나는 의인의 죽음같이 죽기를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도다.”(23:10)라고 하였다. 의인의 죽음이 우리가 고종명’(考終命)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세인들 보기에 아름다웠던 것은 아니다. 순교자적인 죽음이 많았다. 그러나 발람은 선지자였기에 의인의 죽음의 참 가치를 알았다. “하나님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하나님의 귀는 의인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지”(34:15) 않는가? “악인의 길이 형통하는 것 같아도 그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지만, 의인의 길은 돋는 햇빛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지”(4:18-19) 않는가?


순교자들의 신앙을 본받아야 한다. 죽음이라고 해서 다 똑같은 것이 아니다. 참으로 값진 죽음을 택할 줄 알아야 한다. 그 앞자리에 순교자들이 있지 않은가? 한번 태어났다가 어차피 한번은 죽는 것인데 이왕이면 순교의 영광을 얻을 수 있다면 그 얼마나 복된 일일까? 예수님은 친히 가르치시기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로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5:10-12)라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의를 위해 사셨기에 인간들에게는 가장 큰 박해를 받으신 분이셨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께는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신 분이요, 그래서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지금도 영원토록 하나님 우편이 앉아 계시면서 우리를 살피지 않으시는가?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겠는가”(벧전 2:20)? 주님의 십자가 고난을 늘 마음에 기억하면서 주님이 원하시는 그길로 나아가야 한다.


또한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살아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요, 또한 그분의 인도를 믿고 그 길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이 항상 우리 위에 있음을 기억하고 감사하자. 아무리 어려워도 낙심하지 말고 더욱 감사하자.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살아야 한다. 성령이 계셔야 마음이 밝아지고 새로워진다. 성령이 계셔야 내 영이 살아나고 드디어 새로운 생명이 약동한다. 성령이 내 안에 계셔야 지혜와 지식이 생기고 능력이 가득해진다. 성령이 계셔야 항상 바른 가르침을 받고 거룩한 길로 인도를 받는다. 성령이 계셔야 죽음에도 초연할 수 있고, 험한 이 세상을 넉넉히 이겨나갈 수 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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