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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의 밀서 >>
02/26/2019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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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상하이에 밀사..."세계에 독립의지 적극 과시해야"
이상재, 김성수 등 개신교-천도교 종교조직 총동원 나서

인보길 칼럼 | 2019-02-24 19:36:34

기사본문

역사에게 ‘3.1운동100년’을 묻는다. 한민족 최대의 독립투쟁 3.1운동은 누가 시작하였는가? 

민족대표 33인은 언제부터 어떻게 만세운동을 준비하였을까? 당시 전국 220개군 중에 211개군 100여만명이 들고 일어난 독립만세 횃불 봉기가 다만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만으로 가능했던가? 고종의 일본독살설에 분노한 애국심이 그렇게 조직적으로 폭발할 수 있었는가? 

역사가 대답한다. 

”모든 투쟁엔 리더가 핵이다. 3.1운동은 이승만이 처음부터 기획하고 불지른 항일투쟁이다. 

윌슨 민족자결론이 나온 직후부터 이승만은 절호의 찬스를 잡자고 결심하였고,

그해 가을부터 국내동지들에게 구국운동을 벌여야한다고 요구하고 기다렸다.여기 증거들을 보아라.“ 

역사가 내미는 자료들은 나 혼자 보기에 너무나 놀라운 보물들이다.

몇 개만 펼쳐보면서 왜곡된 3.1운동100년사가 사실그대로 복원되기를 기대해본다.

◆ 인촌 김성수의 증언 ”이승만의 밀서 받고 천도교 손병희 설득 나서다“


<1918년 12월 어느 날, 워싱턴에서 재미동포들과 구국운동을 하고있는 우남 이승만이 밀사(密使)를 보내왔다. 그 밀사는 이런 내용의 밀서(密書)를 휴대하고 있었다.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론 원칙이 정식으로 제출될 이번 강화회의를 이용하여 한민족의 노예생활을 호소하고 자주권을 회복해야 한다. 미국 동지들도 구국운동을 추진하고 있으니 국내에서도 이에 호응해주기 바란다.’ 12월이면 세계1차대전이 막 끝난 시기, 다급해진 이승만의 재촉이었다.


인촌(仁村 김성수) 고하(古下 송진우) 기당(幾堂 현상윤) 세 사람은 ‘이제야말로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절박감’을 느끼고 숙직실 방에서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 할까를 논의했다. 그러나 묘안이 없었다...> (인촌 김성수의 사상과 일화, 동아일보사 발행.1985)


중앙학교를 김성수가 인수한 다음해 겨울, 이승만의 밀서를 받아본 28세 김성수는 동지 송진우(29. 중앙학교장) 현상윤(26)과 숙의 끝에 그나마 조직이 살아있는 천도교를 동원하기로 작정하고 지도자 손병희의 팔다리와 같은 최린(보성학교 교장)에게 그 제자 현상윤이 설득을 개시하였다. 


”이제야말로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절박감“이란 당시 조선 식자층의 공통된 초조감이다,.

세계1차대전 마지막 해 1월에 발표된 윌슨 미국대통령의 연두교서 14개조항중 ‘민족자결권’의 폭발력은 모든 피압박 약소민족을 흥분시켰음은 물론, 특히 조선 땅의 독립운동가들에겐 다시없는 복음이었다. 윌슨이 누구인가, 이승만 박사의 스승, 망국민의 ‘신화’이자 ‘구세주’같은 존재로 떠오른 미국박사 이승만이 윌슨을 움직이면 조국독립은 성큼 다가올 것 같은 기대감이 뜨겁게 부풀었다. ”우리도 뭔가 하지 않으면 안된다“며 우왕좌왕 설왕설래 해보지만 그러나 선뜻 나서는 이가 없던 그때 눈앞에 나타난 이승만의 명령, 20대 청년지도자들이 뛰쳐일어났던 것이다. 그 밀서엔 분명 ‘종교조직을 활용하라’는 지령도 들어있을 터였다.



 임영신의 회고 ”이승만의 비밀 메시지 전달 받고 전주 만세운동 벌였다“

1918년 스무살 처녀교사 임영신이 천안에서 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가르치는 항일운동을 시작하였을 때 어느날 허름한 행상청년이 다가왔다. 당시 독립운동하는 지하조직 연락원들은 행상차람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보따리를 풀자 물건들 밑에 삐라같은 것이 보였다.

임영신은 그에게 선뜻 속마음을 보일 수 없었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넌지시 ‘이승만 박사’란 단어를 꺼내자 행상의 눈빛이 달라졌다. 임영신은 더 참을 수 없었다.

“당신은 지하윤동본부에서 왔지요?” 고개를 끄덕이는 행상을 임영신은 와락 끌어안고 말았다. 얼마 전부터 전국적인 통신망을 만든 지하조직, 행상은 몇 장이나 삐라를 몰래 건네주었다. 거기엔 이승만 박사의 다음과 같은 지령문을 필사한 내용이 선명하였다.

“윌슨대통령은 세계평화를 위한 14개조문을 선언, 그중에 하나가 민족자결권인데 이를 최대한 이용해야한다. 한민족의 분명한 의사표시가 국제적으로 속히 알려져야만 한다. 윌슨 대통령이 반드시 우리를 도울 것이다.”

이 삐라 말고도 임영신은 상하이를 통해서 이승만 박사의 메시지를 받고 있었다. 상하이에서 몰래 전해오는 메시지는 두만강이 얼어붙을 때를 기다려 달려와서 연락원에게 주면 곳곳에 전달되었다. 이때 용기를 얻은 임영신은 본격적인 비밀투쟁에 나서서 다음해 3.1운동때 전주에서 만세운동을 벌인다. (이상 [승당 임영신 ‘나의 40년 투쟁사, 2008] 회고룍 발췌).

 ▲ 1903년경 한성감옥의 종신죄수 이승만(왼쪽)과 감방동료들. 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이상재.ⓒ자료사진

◆ 33인 이전에 43인 있었다. 기독교의 힘- YMCA 청년조직


3.1운동을 “이승만이 기획하고 연출했다”는 역사의 증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좀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3.1운동이 선언한 자유독립국 그림은 3.1운동으로부터 20년전 이승만이 한성감옥에서 써낸 옥중저서 [독립정신]에 ’대한민국 건국설계도‘로 구체화되어 있었다. 이 책은 미국서 출판되자마자 독립운동가들의 비밀 필독서로서, 총독부가 판금시켰지만 “읽지 못하면 낙오자”가 될 정도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 독립국은 ’자유민주공화국‘이란 목표가 확고부동하게 각인되었다. 그러므로 3.1운동은 [독립정신]에 명기된 개인의 자유와 평화의 ’기독교국가 정신‘을 그대로 실천에 옮김으로써 이승만의 기독교국가 건국운동이 되었으며, 전세계 최초의 비폭력 독립투쟁이란 ’3.1정신‘을 탄생시킨 역사적 사건이 된 것이다.


이 보다 먼저 특기할 일은 1899년 투옥직후 ’성령받은 기독교인‘으로 변신한 사형수 이승만이 종신형으로 감형된 후, 잇따라 들어오는 감옥동료 개화파 청년들에게 전도하여 무려 43명이나 기독교로 개종시켰던 사실이다. 유명한 월남 이상재(月南 李商在)를 비롯, 유성준, 김정식. 신흥우, 김린, 유동근 등은 출옥후 교회를 세우고 전도활동과 YMCA조직활동에 집중하였다.

특히 미국 박사 되어 돌아온 이승만은 이상재와 함께 전국8도 수십개 교회에 YMCA청년조직을 급격히 확산시킨다. 이에 놀란 총독부가 “개신교를 파괴하라” 비상령을 내려 105인사건을 조작, 수백명을 검거하는 중에 이상재는 투옥되고 이승만은 미국감리교본부 도움으로 기약없는 망명길에 오른다.

이승만보다 25세 연상인 이상재는 청년 이승만이 독힙협회 만민공동회 시위정치에 나섰을때부터 가장 존경하는 멘토였고, 이승만 가족을 돌봐주었으며 하와이에서 수시로 “돈 보내달라”하면 개화파 갑부 윤치호의 돈을 타내 보내주곤 하였다. 두 사람은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이심전심 일심동체였기에 민족자결주의 선풍에 대응도 그러하였다.

감옥에서부터 “기독교 국가를 세우자”는 기독교의 영웅 이승만의 ’시위촉구‘ 밀서가 전달되자  기다렸다는 듯 개신교계는 총궐기하였고 이상재가 개신교대표 16인 선정등 진두지휘했다는 기록둘이 남아있다. 

이와같이 감옥동지 43인과 YMCA 청년들이 3.1운동의 주력부대가 되었으며, 기독교 십자군같은 독립전사들을 미리 양성해놓은 이승만의 선견지명은 그에게 조직적 전략적 리더로서의 카리스마를 더해주었던 것이다.


 

▲ 이승만이 일본 유학생들을 모아 독립운동 의식화교육을 했던 일본 카마쿠라 세미나.ⓒ자료사진

★도쿄 유학생 ’2.8 독립선언‘=1912년 3월 망명길에 일본의 기독교대회에 참석한 이승만은 7~8개로 나눠진 유학생 조직을 YMCA로 일원화하도록 종용하면서 YMCA 건물자금도 모금해주었다. 이후 일본 유학생들은 하와이에서 이승만이 발행하는 [태평양잡지]를 몰래 구독하면서 ’독립의 우상‘과 밀착하던 중에 ’이승만 밀서‘를 받아보자 본국보다 먼저 2월8일 독립선언을 감행한다.

 ▲ 미국판 만세운동 필라델피아 제1차 대한인회의. 임정 대통령 이승만이 워싱턴이 앉았던 의자에 앉아있다.ⓒ자료사진

 미국판 만세운동 ’필라델피아 국민대표회의‘ ..."기독교 국가 세우겠다"

윌슨의 민족자결권 선언을 누구보다 반긴 것은 두말할 필요없이 이승만이었다.

프린스턴대학 시절 총장 윌슨은 이승만을 “장차 코리아를 독립시킬 지도자”라며 자택에 초청, 딸들과 피아노치고 노래하고 만찬과 토론을 즐겨 하였다. 그때마다 ’대한독립‘과 일본 제국주주의 및 약소민족 자결론을 강조하였던 이승만은 대통령이 된 은사가 세계대전을 정리하는 강화회의에 참석하리란 예상에 마음이 급해졌다. “이번에도 실패하면 안된다” - 1905년 러일전쟁 강화회의때 미국에 왕따 당했던 이승만은 파리강화회의엔 반드시 직접 참석하여 윌슨의 도움을 받아 독립문제를 해결하자고 결심하였다. 이승만 연구가 유영익의 [이승만의 삶고 꿈]에 보면, 1918년 10월경 하와이를 방문한 유학생 여운홍 등과 평북의 미국선교사 샤록스(Alfred M. Sharrocks) 등에게 이승만은 ’윌슨 협력 구상‘을 설명하고 국내 송진우 함태영 양전백 등에게 알려 ’대한독립 의사‘를 세계에 강력히 전달할 대중투쟁운동을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연말이 지나 새해가 되도록 소식이 감감하자 초조하였다. 파리회의는 1월18일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개막되었다. 이승만은 서재필에게 미국판 만세운동을 제의, 필라델피아에서 독립만세운동을 결행한다. 제1차 대한인대표자 총회 The First Congress는 4월 14~6 사흘간 독립신언서 낭독, ’건국종지‘(Aims and Aspirations of the Koreans) 발표, 독립기념관까지 시위를 마치고, 이때 상해임정 소식에 접한 대표자들은 안에 들어가 이승만을 조지워싱턴이 대륙회의를 진행하였던 의자에 앉히고 독립결의를 다진다. 

유일한이 기초하고 이승만이 다듬은 ’건국종지‘는 글자그대로 새로운 독립국가 자유민주 공화국의 헌법 대강이었고, 그것은 훗날 대한민국 건국헌법에 반영된다.

한편, 필라델피아 독립선언후 4월23일 서울의 한성임시정부에서 ’집정관총재‘로 추대되자 이승만은 즉각 영문으로 Presedent of the Korean Republic 대한공화국 대통령 이름으로 각국에 “정부 수립’을 통보, 임시정부 승인과 독립지원을 요청한다. 일본 왕에게도 영문으로 ”민주정부가 수립되었으니 일본은 한반도에서 철수하라“고 요구하였다.

AP통신 회견에서는 ”우리가 동양 처음으로 기독교 국가를 세우겠다“고 천명한다. 20대에 감옥에서 ‘하나님께 맹세하고 맹세한’ 기독교 국가세우기 약속을 50세에 처음 국제적 공약으로 내건 셈이었다. 이것은 그후 73세 대한민국 국회의장으로, 건국대통령 취임사로써 하나님께 서약하였고, 또한 85세로 하야할 때까지, 아니 숨지는 순간까지 ‘하나님의 택자’로서 완벽히 헌신하는 순교자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누가 나를 뭐라고 욕해도 좋다. 독재자라 해도 좋다. 하나님만 나를 비난하지 않으신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승만이 휴전후 1954년 여름 방미때 ‘기독교 건국혁명가’답게 고백한 신앙 간증이다.

▲ 상하이 임시정부 요인들의 대통령 이승만 환영회(1920.12)ⓒ자료사진

◆ 통합 임시정부는 첫 좌우합작...그때부터 이념투쟁-반공투쟁 100년 


1919년 3월 3.1운동과 같은 시기에 소련 레닌의 콤민테른(공산당 국제화)도 민족자결론을 앞세워 약쇼민족들을 공략, 공산주의 수출에 나선다. 때맞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통합되면서 ‘노령정부’의 공산세력이 헤게머니 쟁탈에 돌입한다. 레닌의 거액공작금을 받아 자유민주세력 이승만 대통령을 축출하고 임정을 장악하려 한 것, 그때부터 한민족의 좌우 이념투쟁이 시작되었다. 이즈음 이승만이 발표한 ‘공산당의 당부당’ 논문(1923)은, 마르스크 공산당선언과 레닌의 폭력혁명선언에 정면 대항하는 세계최초의 ‘반공선언’이었다. 

이렇게 임시정부 출범과 함께 시작된 이념투쟁은 3.1운동100주년-임시정부 100주년과 나란히 ‘좌우투쟁 100주년’을 기록하며 오늘의 대한민국 자유진영은 ‘트럼프의 강대국 이기주의’에 희생양으로 바쳐질 위기에 몰려있다. 북한의 비핵화보다 ‘우리민족끼리’ 깃발을 따라 ‘김일성 민족끼리’ 잘 살아보자는 세상이 된 지금,  '3.1운동의 기획자' 이승만이 살아있다면 ”제2의 3.1운동을 일으키라“ 호통칠까. 아니다. 진작에 국군 총동원령을 발하여 ‘단독북진통일’ 명령을 내렸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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