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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 장군박물관- General Douglas MacArthur museum
04/16/2017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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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로 가는 길에  맥아더장군박물관을 보기로 하였습니다.

맥아더,존경하는 장군,낯선 우리나라에 와서 인천대첩이라는 역사적인 전쟁역사를 쓰다간 그이지만,중국의 인해전술작전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영웅이었습니다.

이글을 쓰면서 만약 맥아더장군이 아니었다면,한국은 공산화정권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암울한 결과를 보게 되었습니다.

정말 천재일우의 위기때,도와준 맥아더장군, 대한민국을 빛처럼 밝혀준등불이었습니다.





맥아더박물관을 보기위해 주차장을 검색하였는데요?맥아더장군기념관빌딩사이뒤로 주차빌딜이 있었습니다.그런데 문이 닫혀있네요?몇바퀴를 돌다가 보이는 건물옆으로 길거리에 주차할 공간이 6대있습니다.

일찍왔고,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일요일아침이라,주차할 공간이 있었습니다.

관광객들이 많이 와서 그런지,주위를 어슬렁거리는 사람  한명이 눈에 들어옵니다.




와,,신난다

정말 여기에 올 수있다니 말입니다.

맥아더 박물관바로 옆에는 거대한 쇼핑몰 딜리아드(Dillard)가 있었습니다.

주차장에 굳이 돈을 내지 않고 주차를 하고 싶다면,이 곳 딜리아드주차장을 이용해도 좋을 듯합니다.

길하나사이에 두고 있어서,길만 건너면 됩니다.

실제로 검색해보면 주차장은 무료주차가 3시간 가능하다고 합니다.

비지터센터에 가서 무료주차권을 받아서,차를  맥아더 센터 South Deck Garage 에서만 주차를 해야 무료라고 합니다.







차가운비가 부슬부슬내리는 겨울아침에,마을이 잠들어 버린 도시처럼,아주 조용하였습니다.

이 곳은 다운타운이기에 무척이나 복잡할 것 같은데요?동화에 나오는 것처럼,사람들이 다 어디에 갔을까?상상을 하게 됩니다.






건너편에도 작은 맥아더 테마공원이 있었습니다.

스피커에는 음악이 나오고,가로등은 밝았다가,꺼지기를 반복했습니다.

비가 내려서 앉을 수도 없고,또 아직 문을 열지 않아서 주위를 두리번 거려보았습니다.



맥아더 장군기념박물관,맥아더 비지터센터,리서치센터가 있었습니다.

리서치센터안에는 96,000개의 사진과 자필로 쓴 일기와 수많은 자료와 책들이 있습니다.








1845년에 노오포크(Norfolk)는 독립된 도시가 되었으며,도시는  다양한 공간의 기능이 충족되어지기를 필요로합니다.고전적인 재건빌딩은 1847년에 시작되었으며,1850년에 노오포크의  City와 Court house가 완성됩니다.

건축가는 William Singleton(Portsmouth출신이며,St Louis 에서 공부하였습니다.

건축보조자로  워싱턴 디시 수도의 돔을 설계한 Thomas Ustick,walker(필라델피아출신)가 맥아더장군기념관 돔을 디자인했습니다.







 이 건물의 시작은 Mayor Lamb는Union General John E,Wool 에게 권리를 이양을 받습니다.(1862년 5월,10일) 빌딩은 1918년 이전할때까지 ,City office로 사용하였으며,Court는 1960년대까지 계속 사용하였습니다.





건물의 인테리어는  재건축되고,역사적인 유물과  기념관인 General Douglas MacArthur(1880-1964)에게 헌정됩니다.





장군의 엄마인 Mary Pinkney Hardy는 Berkley에서 태어났고 자랐기에 ,마지막장소를 Norfolk으로 선택합니다.

맥아더장군도 1964년 4월 이곳에 안장되었습니다.




수많은 이들의 기부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일본지배하에 있었던 필리핀섬 민간인 포로들

오랫동안 해온 고달픔,배고픔그리고 희망(1942년 1월-1945년2월)



 인천상륙작전의 모습입니다.(1950년 9월15일)

인천은 세계에서 조류간만차이가 아주 심한 지형중에 하나이며,높고 낮음이 32feet나 됩니다.

만약 배가 들어갔다가,물이 빠지면,마치 바다물에 밀려온 고래처럼 수렁에 빠지는 곳입니다.

우선 을미도를 높은 밀물때 세시간만에 점령하고,해병은 3일만에 인천을 진압합니다.

이 작전을 위해 일본에 주둔했던 70.000군인과 미해군과 KATUSA 라고 알려진 한국부대,86.00명과 유연군대 와 260척의 배가 참여하는 대작전이었으며,다른 해군은 9월17일 다시 서울을 들어가 수도를 회복합니다.의회의 승인없이 감행한 인천상륙작전은 대 성공이었고,역사를 기록할 만한 것인데도,트루먼한데 불신임과 경고를 받습니다.(의회승인없이 감행한 것에 대해 )






비지터센터에는 영화상영이 있으며,선물코너가 있습니다.

먼저 비지터센터로 들어가니,안내인이 꼭 영화를 보라며 권유아닌 권유에 앉아서 보았습니다.

역시 보기를 잘했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맥아더박물관에 오시기가 어려운분들은 유튜브에 이 다큐멘터리필림이 있습니다.

Douglas  MacArthur 치시면  the best film archives 에서 상영하는 28분짜리 필림이 있습니다.

이 필림만 보아도 이 곳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을 다시 박물관에 사진과 그림으로 진열해놓은 것입니다.






격동의 1950년대 한국과 지금의 한국과 너무나 비슷한,분단상황에 맞물려서 정권에만,집착하는 권력과 나라의 부강보다는 분열을 자초하는데,온갖힘을 다 쏟아내는 정치인과 종북세력과 맞불려서 뜨거운 용광로처럼 달아오르는 한국을 바라보며,우리는 어떻게 이 분단상황을 이끌어내야할지,대통령을 함부로 대하는,무리들,(해도 해도 너무합니다)그러나 ,소리없는 아우성처럼 강건한 대한민국을   우리는 해낼것이라는 믿음하나에,국기를 올려다보았습니다.



미사일이 발사되고,핵무기가 날아오는 이즈음에 대통령을 탄액해야한다는 무리들,어떻게 나라를 지켜내야합니까?그렇게 북한의입장을  옹호하고 앞장서도 아무도 북한에서 살고 싶어하지 않은 이중성과 탈북자들의 행진이 일어나고 있는 즈음에,6,25전쟁이 일어났는데,부산앞바다에 도착한 미국군인이 찍은 사진에는 아이가 수영을 하고 있었습니다.전쟁이 일어났다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고요한 부산앞바다사진이 몽글합니다.




그럼 5성장군이며,웨스트포인트대학동상까지 있는  맥아더장군

과연 그 영웅의 삶은 어떠하였는지,그 격동의 전쟁속에서 뚫고 지내온 길을 같이 볼까요?

맥아더는아칸소에 리틀락에서1880년에 태어났으며,할아버지는 순회판사였고,아버지는 군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뉴멕시코,인디애나,칸사스,등 아버지를 따라,여러곳을 전전하며 어린시절을 지냅니다.

두명의 형이 있었으며,한명은 일찍 죽습니다.그 이유로 엄마는 맥아더에게 더한 애착을 가지게 됩니다.





맥아더주니어는 아버지는 따라,18살에 Civil war 에 참가하였으며,이때 이 부대가 위스콘신출신이어서 언덕으로 올라가 Go Go winsicoins을 외쳤지자고 하여 나중에 그렇게 하였다고 합니다.그 전쟁에서 아버지는 Missionary Ridge(테네시 차나누가외곽지역) 라는 전투에서 메달을받았으며,장교로 승진됩니다.

1893 년 16살에 텍사스 샌아티니오에 있는 West Texas Military Academey  에 입학합니다.



맥아더는 West Text military를 일등으로 졸업하고, 19살에 웨스턴 포인트대학에 입학원서를 낼 즈음에,당시,주지자인 클리브랜드, 민주당인 대통령인 멕켄리도 거절합니다.

결국은 2년간 과외를 따로 받어서 시험을쳐서 학교에 들어갑니다.



영향력이 있었던 사람들의 추천으로 겨우학교에 들어가는데,아버지가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 바꾸고,Civil war에서 상당한 승리를 이끈,영웅이었지만,어떠한 명예도 가지도 못했으며,오히려 필리핀으로 가게됩니다.

아버지에 대한 시기심과 질투의 그늘아래 놓여있었던  맥아더는 웨스턴 포인트대학에서 상급생에게 고문에 당하는,학대를 받습니다.



동료인 학생이 죽어서,당시 민주당대통령이었던 멕켄리가 직접조사를 지시할 정도였는데요?

이에 고문을 가한 학생과 당한 학생들이 학교를 떠나는데,여기서 맥아더가 가혹행위를 한 학생이름을,위원회에  말하면서,학교생활은  힘들게   됩니다.어두운학교생활과 영웅인 아빠에 대해 시기하는 사람들,집착하는 엄마인 핑키는 웨스턴 포인트학교근처에 있는 호텔에서 지냅니다.



운동중에서도 풋볼을 좋아하여 웨스트포인트학교시절 풋볼주장이었으며,야구도 하였고,시니어때에는 학교회장을 하게 됩니다.

당시 졸업할때 성적은 미국아카데미 백년역사에서 100점 점수에서 98,1라는 놀라운 성적으로  졸업을 하게 됩니다.



졸업후 맥아더도 필리핀으로 파견되었으며,그 즈음에 필리핀에서 근무를 하시던 아버지(1912년)가 돌아가십니다.

쓸쓸한 영웅의 이름없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맥아더가 이렇게 전세계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것은 역시 한 사람의 힘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형(1923년)도 나중에 이름없이 해군장교로 전사합니다.





맥아더의 업적가운데,전 26개의 다른주에서  사람을 모집하는 national guard를 제안하였으며,당시 대통령인 윌슨이 받아들였고,42개의 모양의 레인보우깃발을 만드는 일을 먼저하는데요?이 것도 아버지의 전투방법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현재에도 national guard가 있습니다.)





1917년 이 군대(42n division)를 이끌고 프랑스와 함께 합니다.일차대전동안 독일과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나서,명예훈장을 받고,39살에 웨스트포인트교장으로 옵니다.

당시 전쟁중에서 맥아더는 상처와 독가스의 휴유증으로 고생도 합니다.



웨스트포인트대학에서 학생유니폼을 바꾸고,수업과정을 바꾸고 혁신을 꾀하는 노력을 해서 많은 갈등을 불러일으키며,학생들사이에  벌주는 것을 막으려했고,실제훈련을 더 중요하게 하였으며,역사를 가르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이런행동들때문에 주위에 많은 사람들에게 불만을 야기시켰으며,특히 어떠한 운동에 가입하는 것을 격려하였는데 그 방안으로 심지어 운동하는 선수에게 돈을 지급하는 (당시 5불이,지금으로 환산하면 70불)것에 대해서 모두들 반대하였으며,학부모와 교수진까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수업시간에 실제있었던 일차세계대전,혹은 civil war에 대해서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도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후일에 웨스트 포인트대학은 맥아더가 했었던 교육방식을 받아들이고 실천하게됩니다.

맥아더 동상이 웨스트  포인트대학에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집착하는 엄마틈에서 겨우 만난 백만장자인 Louise 와 42살에 결혼을 합니다.



엄청난 부를 상속받은  Louise는 맥아더의 상관이었던 장군  John Pershing 과 아내가 친해지면서,두사람의 관계는 악화되고,맥아더는 필린핀으로 거의 강제퇴출처럼 가게됩니다.

큰나무에 바람잘날 없다는 옛이야기가 떠 올려집니다.





그 후 아내는 군대를 그만두고,비즈니스를 하자고 하였는데,맥아더장군이 거절하면서 이들의 결혼생활도 막을 내리게 됩니다.



1930년 John Pershing 장군이 은퇴하면서,맥아더는 4성장군이 되며 Army chief of staff이 됩니다.필리핀에 있는 동안에 필리핀대통령인 Manuel Kazon와도 친밀하게 지냅니다.

1935년 필리핀 대통령인 Kazon의 부탁으로 필리핀  Marshal Army 가 되며,루즈벨트도 이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1937년 맥아더장군은 Jean Marie Faircloth 와 결혼하였으며,그 다음해에 마닐라에서 아들이 태어납니다.

맥아더장군의 아내 Jean은 결혼과 함꼐 늘 전쟁에도 따라다니는 적극적인 성격이었습니다.



공식적으로 1937년 12월에 군대에서 은퇴를 합니다.그러나 필리핀대통령의 제안으로 고문으로 남아달라고 부탁하였으며,같이 일했던 아이젠하워는 미국으로 돌아갑니다.

* 루즈벨트대통령은 재임기간 (1933년3월4일-1945년 4월12일)입니다.

세명의 부대통령이 있었습니다.

1933-1941년 John Nance Gamer

1941-1945년 Henry A Wallace

1945-Herry S Truman(갑작스레 루즈벨트가 사망하여 트루먼이 대통령이 됩니다)




Call of Duty

61살이 된 맥아더장군,어느날 아침에 루즈벨트대통령으로 부터 전화를 받습니다.

미국을 위해서 다시 일을 할 수 있겠느냐고?(1941년7월26일)








역사를 바꾸는 데 나이는 숫자에 불과합니다.단지 준비된자에게만 오겠지만 말입니다.

루즈벨트는 맥아더를 Commander  U.S. of Army force of the Far East으로 임명합니다.

여기서 맥아더가 필리핀 섬근처에 정박한  일본배를 침략하자고 워싱턴의회를 설득하였지만 거절당합니다.(만약 이 때에 맥아더 의견을 받아들였더라면??)



1941년 12월 7일 새벽 3시30분 일본진주만 공격을 시작으로 엄청난 폭격을 퍼붓었으며,필리핀도 공격하여,루즈벨트는 1942년 3월 보트로 몰래 맥아더를 오스트레일리아로 피신시킵니다.

# 당시 맥아더의 명성은 높았고,만약 맥아더가 포로가 된다면 이미 전쟁은 졌다는 국민의 기대감과 어울려 루즈벨트는 결정을 내립니다.



그때 맥아더장군은 떠나면서  말했습니다.

"l came through and l shall return"

4월 9일 필리핀 본거지였던 기지인 Bataan은 일본에게 점령당하고 항복을 합니다.

그리고 맥아더장군이 거의 삼년뒤 필리핀(1945년 1월)에 와서 일본군을 물리치고 포로를 해방시킬때 앙상하게 포로생활을 한,눈물나도록 피골이 영접한  Wainwright Marshall장군을 만나게 됩니다.(1945년 9월에 이 일로 명예훈장을 받습니다)



#lwo Jima 섬을 탈환하기까지 5개월에 걸친 죽음을 무릎쓴 군인들의 피눈물나는 전투가 있었으며,POW 켐프라고 불리우는 수용소는 굶주림과 고문,각기병,이질로 100도 넘는 온도까지 ,비참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루스벨트가 1945년 중반에 갑작스런 죽음으로,부대통령인 트루먼이 대통령이 됩니다.

꼼꼼한 트루먼과 무조건의 믿음으로 맥아더를 지원했던 루스벨트가 죽음으로 맥아더장군과 투르먼의 알력은 코리아전쟁에서 거침없이  나타납니다.



얄타회담에서 암묵적으로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는 것을 인정했던 루스벨트는 일본이 이렇게 급부상할지는 몰랐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한국에서 나오는 엄청난 곡물을 기반으로 전쟁을 일으켰으며,만주를침공하고,이어 필리핀까지 전세를 확장시키자,루스벨트는 맥아더장군에게 요청하게 됩니다.



#원자폭탄준비

독일계유대인인 아이슈타인 박사가 미국으로 망명하면서 루즈벨트에게 말합니다.

독일은 원자폭탄을 준비하고 있으니,서둘러 준비해라고 말입니다.

#원자폭탄 프로젝트

Fat man이라고 불리우는 프로젝트를  영화로 나온 것이 험프리 보카트와 로렌 버콜이 주연한 영화이며,실제 폭탄을 리틀보이라고 하였습니다.

"소유와 무소유"로 번역된"To have and Have not"

 이것을 영화에서는 "Little boy"로표현




멕시코 Alamogordo 에서 원자폭탄시험을 끝내고 (1945 7월16일),일본에 1945년 3월 10일 도쿄에 원자폭탄을 터트리면서 ,일본의 항복을 기다렸고,러시아는,미국과의 약속대로  73,000명이 주둔하고 있었던  일본군기지에 Munchuia를 공격하면서,일본의 점령을 무너지게 합니다.1945년 9월,맥아더장군은  일본왕 히로히토에게 항복문서를 받아내는 역사적인 일을 하였습니다.

항복문서를 받을때,일본수용소에 지냈던 Wainwright장군과 영국장교인 Arthur Percival(pow 캠프수용소와Hasin수용소를 지낸적이 있음) 서명을 받아내는 일에 함께 참여하였습니다.

히로히토가 개인적으로 맥아더장군을 찾아와 재건에 힘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맥아더장군은 일본에서 지내게 됩니다.

#중국만주를 정복한 절대적인 공헌을 한 러시아장군은 나중에 스탈린에게 고문을 받아 죽습니다.






러시아는 Munchuia를 공격하는 조건으로 일본이 지배하였던 한국을 반으로 나뉘어 삼일만에 지배합니다.

당시 한국은 지배자가 없었고,외곽지역에 1.6 million군인이 지키며,반란의 여지를 없앴으며,당시 한국의 철이 필요하여,소련은 무리없이 지배를 하게 됩니다.




한국의 독립운동은 일본의 지배를 벗어나게 하는 것에 중점을 둔,그러나 대부분이 소련에서 마르크스와 레닌주의를 공부하게 한 엘리트한국교육자를 양성하게 합니다.그러한 분위기라 소련의 지배에 대한 저항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 지배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소련은 얼지않은 항구에 대한 지배적인 땅의 확장과 시베리아철도 건설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말입니다.일본지배에 대한 것은 두고 두고 말하지만(위안부,소녀상),중국의 인해전술로 겪었던,한국전쟁의 파란만장한  고초에 대해서는 역사가와 일반정치인들은  말이 없습니다.

(만일 중공군만 아니어도 우리는 통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 general Patton

(거의 맥아더장군과 같은 급이었지만,소련과 동맹하는 것은 위험하며,배신할 것이라는 충고를 하여,트루먼에게 해고를 당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차사고로 의문의 죽음을 당합니다.

후에 소련의 첩보작전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단지 일본지배대신에 러시아지배라는 것 외에는 말입니다.

소비에트연합은 35살 젊은 김일성장군을 지도자로 추대합니다.




일본정부에 대항하는 게릴라전법을 구사하였고,또 만주공격도 김일성을 따르는 자들은 전쟁에 참가한 공헌을 인정받게 됩니다.

김일성은 북한을 지배할때 ,모든 정부직원들을 내쫒았으며,공산당원 외에는 죽임을 당하거나,당원이 아니면 모두 배제하는 정책으로 시민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이에 반해 남한은 워싱턴 행정부가 파견한 미군장군 Huge는 전쟁의 영웅이었지만,일본전투(오키나와전투)에서 엄청나게 힘들고 탈진한 상태였으며,그는 전쟁은 잘 알았지만,정치에 대해서는 너무 몰랐고,한국사정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도 단점이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태도를 모두들 받아들이기를 어려워했으며,남한은 그야말로 파당과 정책이념으로 혼란과 혼란을 가중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추대한 이승만대통령(조지워싱턴대학 철학박사)은 70대 노장이었으며,1919년-1945년 한국독립을 위해 워싱턴로비 활동을 벌인 인물입니다.북한은 강압적인 힘으로  모든 것을 정리한 것에 비해,이승만대통령은 강압이 아니었고,남한에 공산당파들도 많아서 상당한 어려움에 직면했으며,소련과 어떠한 대화도 하려하지 않은 반 공산주의정책을 강력하게 실행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북한이 남한까지 공산화를 꾀하는 것에 무척이나 두려워하였으며,이에 대한 정책으로 법과 질서라는 슬로건을 내걸었으며,한반도의 자유민주주의로 통일하는 것을 강하고 밀어부쳤고,심지어 미국군대를 동원해서라도 통일을 해야한다는 생각때문에, Huge장군과 갈등을 겪었습니다.



당시 남북한을 비교해보면 일본인들이 북한에는 공업화정책으로 공장시설이 많았고,남한은 쌀 생산기지국으로 두어서 거의 개발이 되지 않은 상태였고,북한이 월등히 뛰어난 산업시설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당시 1945년 남한 군대는 45.000명으로 추산되며,무기등이 너무 열악하였고,스스로 나라를 지킬 방어가 되어 있지 않다는 보고를 워싱턴에 보냅니다.




Cold war

1950 년 6.25일 아침 4:00 북한은 엄청난 폭격을 퍼부어며 침입합니다.(ninety thousand 군대와 소련제 탱크 150대) 부슬부슬 비내리는 일요일 아침 6시에 전쟁을 선포하고,그리고 11:00시에 평양라디오방송에서 남한이 9:40분에 미국과 합세하여  침입했다는 보고를 합니다.(저자는  이 부분이 강력하게 거짓말이라고 했습니다.밀어부치는 탱크를 방어하고 수도를 지키려고 한 것을,트루먼은 9:40분쯤에 보고를 받았다고 합니다)




당시 한국은 북한에 비해 총은  20-35%가 작동이 안되었고,일요일이라 미국군대오피스는 주말을 쉬었습니다.그리고 한국군대가 잠들어 있는 시간에 박살을 냅니다.심지어 소련제 탱크를 한국군인은 이렇게 강력한 무기를 경험한 적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그리하여 보안과 용기를 잃어버리고 도망가거나 죽습니다.

(1948-1950년사이에  너무 많은 국지전싸움이 잦아서,방어하기에도 급급했다는 자료였습니다)

1949년 12월장군 Willoughby는 워싱턴과 맥아더에 보고

1950년 3-6월사이 침입할 상황


6월중반에는 중국에서 급부상하는 Mayo는 중국군대를 5millon 추가로 투입하여 한국으로 보냅니다.

#Mayo가 장계석을 물리치는데는 소련 스탈린의 절대적인 도움을 받았으며,나중에 스탈린은 만주를 중국에 돌려줍니다.



이에  맥아더는 중국이 한국전쟁에 침입하자,워싱턴에 문자를 보냅니다.

그 뒤로도 중국은 소련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군대를 더 보내며 지원합니다.

"Please Free to go,since the reaponisbility is yours"

맥아더는 한국이 통일이 되어야한다고 생각했으며,이것은 이 승만대통령과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서로 의견을 나뉘어서 같기보다는,중국이 소련에 뒤를 이어 한국전쟁에 돌입하는 것을 보고 내린 결정이라고,보입니다.




8월 20일 Chou 가 유엔에게 문자를 보냅니다.

"한국은 중국의 이웃이다.한국문제에 간섭하는 것은 아니다.평화적으로 정착하기를원하지만,이승만이 원하는 정착은 아니다.북한이 원하는 정책으로 지속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공산화를 원하는 무리들이 이승만과 맥아더를 싫어하며,김일성우상화를 따라야한다며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역사속에서 이미 해왔던 것임이 보입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

용맹하고  대담한 계획, 전쟁역사를 새롭게 쓰다

조류간만의 차이때문에 이 날에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 맥아더는,두 번이나 보냈지만  의회의 승인없이 일을 감행합니다.딱 두번,9월과 10월밖에 할 수없는 이 날.

그 쯔음에 낙동강방어선을 두고 너무나 많은 전투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의견을 냈을때에도 맥아더장군의 계획을주위의 장군들도 이해를 하지못했다고 합니다.

역시 교과서를 열심히 공부를 해야한다는 것을 알게 하는데요?맥아더장군은 인천앞바다의 조류가 심하고 뻘밭인 이 지형을 보고,예전에 웨스트포인트수업시간에 들은 (Francis Parkman 선생님)전쟁을 기억해냈다고 합니다.

Abraham  평원지역에 난공불락인 절벽을 보고,프랑스와 인디언전쟁때에 당시 영국장군인James Wolfe's  이 1759년 Quebec 공격시 적군장군을 사로잡고 승리한 내용에 영감을 받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9월 13일은 Wolfe's 191년 승리의 기념날이기도 하였습니다.




인천상륙작전

중국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미국이 북한을 침공하다....




맥아더장군하면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유명한 백골부대 신일수 일병과의 만남

지금도 백골부대 게시판에 진열되어 있다고 합니다

 #신 일수일병

6,25전쟁때 참전한 학도병으로 육군백골부대 18연대 1대대 3중대포

영등포구 양화동 인공폭포공원 인근에 진지를 구축

북한이 침입하여 이미 서울이 빼앗긴 상태라는 것을 보고 받고,맥아더장군은 직접 비행기로 6월 28일 밤에 수원비행장에 내립니다.사실을 알았는지 소련무기-Yark는 맥아더를 호송하는 비행기를 두대나 부수고,개인비행기도 일부 부서질 정도로,맥아더 장군의 생명까지 위협을 받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대전에 있었던 이승만대통령을 수원비행장에서 만난후,직접 한강으로 현장을 보겠다며,폭탄소리가 간헐적을 들리는 전쟁터를 향하여 짚차를 몰고 갑니다.

수백명의 군인들이 길위에 누워있었고,다친사람들,그리고 피난가는 사람들도 잠시 멈추고 맥아더장군의 행렬을 보며 깃발을 흔들었다고 합니다. 그 때 맥아더 장군이 신동수 일병을 만난 것으로 추측됩니다.




"병사,다른 부대는 다 후퇴하였는데,왜 자네는 여기를 지키고 있나"?

"저는 군인입니다"

"상관의 명령없이는 절대후퇴하지 않습니다."

"정말 훌륭한 군인이군"

'내가 일본으로 건너가면 즉시 지원군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였으며,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대화가 끝난후 연막탄 2개와 대공표지판을 선물로 받았으며,그 뒤에는 잊어버렸다고 합니다.





얼마나 열악한 상황입니까"?

연막탄 2개라..

사흘뒤 후퇴명령을 받았으며,다리에 총상을 입고 민가 아궁이에 숨어들어서 목숨은 구했지만 다리를 치료받지 않아서 다리가 잘린 77세 영웅이었습니다.(자료에 의하면 2011년)

"6,25가 되면 군번없이 나라를 지킨 수없이 죽어간 동료들이 떠올라 잠을 이룰수가 없어요"

"어떻게 나라를 지킨 것인데,요즘 젊은이들은 그 것을 알고 있나요"?

애절한 그의 목소리는 갔지만,맥아더와의 대화는 아직도 살아 역사속에 남아있습니다.


마음이 급한 맥아더장군과와 트루먼,워싱턴의 대화와 요청간에는 암묵적으로,골이 깊어갑니다.

맥아더장군이 요청한 것은 너무나 어마어마한 자금과 병사가 다시 동원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쟁은 전술과 군인정신,,그리고 엄청난 돈이 필요하지요.


낙동간 방어선을 두고 계속 그렇게 싸우다가는 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한 맥아더 장군은 적의 허점을 찌르는 인천상륙작전이라는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작대첩을 하게 됩니다.

오직,한반도를 통일시켜야한다는 일념으로 북쪽까지 진압했으나,중국이 다시 인해전술작전으로 전쟁에 침입하면서 다시 후퇴하게 됩니다.

그 처절한 전투는 장전호와 흥남부두,백마고지...피 눈물로 지켜낸 전쟁이며,민주주의라는 이름하에 이름없는,너무나 낯선 땅에 와서 피를 흘리고 간 수많은 젊은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에게도,이름없이 나라를 지킨 우리병사들에게도 묵념을 다시 합니다.

중국에서 타이완을 두고 합의를 하려 했던 맥아더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트루먼은 사탕발림같은 먹잇감앞에서 엄청난 결정을 내립니다.

(그러나 중국은 이틀후 미국의 도움이 필요없다는 문자를 보냅니다)

그리고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트루먼은 감정적인 행돌을 하며,맥아더를 바로  해고 시킵니다.

맥아더장군은 쇼크였고,아내는 일본에 있다가 방송을 듣고 알았다고 합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순간이었습니다.


의회에서 연설하는 장면


두고 두고 역사에 크다란 실수를 한 트루먼..

그리고 맥아더는 의회에 와서 말하지요.

"solder never die,Just fade away"

군인은 죽지않는다,사라질뿐이다




(저자는 트루먼에 대해서 이렇게 평했습니다.

그는 좋고,친절하며 감정적이고 관대한 남자이지만,통치권의 권력이 약했으며,너무 실용적인 정치입장으로 권한을 무력화했습니다.

더욱이 아이러니하게도 국민의 의지를 양보케한 민주대통령으로써 부족하다고 말했습니다.

게다가 정말 위대한 용기있고,지혜롭고,강력한 대통령이라면,스스로 보호할 수 있는 자라면 이런 행동은 하지 말았어야 한다며 ,어떠한 정치적환경에서라도 조건없이 전쟁을 끝내어야 했다고 했습니다.

맥아더는 의회에서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군대에서 50년을 일했습니다.

의회에 모든사람들이 이 소리에 기립박수를 치며 일어섰습니다.

평생을 나라와 의무를 다해 일한 것에 대한 명예의 추락

참으로 이렇게 이렇게 비참하게 맥아더를 몰고간 투루먼,,역사는 두고 두고 그를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투루먼이 좀 더 관대했더라면??

우리의 한반도 상황은  분단한 이래로 한 번도 조용한 적이 없는 그야말로 끊임없는 총성속에 살고 있으며,부단히 쉬지않은 이데오르기의 혼란과 국가이념자체를 흔들려지는 광야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뉴욕시민들은 맥아더를 위해 영웅퍼레이드를 펼칩니다.

7밀리언이상의 사람들과 19마일 맨해턴스트리트의 행진,3천톤이상의 종이가 창문에서 발코니에서 지붕에서 떨어집니다.

 맥아더장군을  미국시민들은 너무나 존경해왔고, 사랑해왔는지를 알게 했습니다.

투루먼은 재선거에 나가지를 못했으며,탄핵당합니다.

그리고 아무도 트루먼을 위해 퍼레이드를 열지않습니다.


맥아더장군은 

1962년 웨스트 포인트 학생들에게,눈물어린,그리고 너무 감동적인  마지막 연설을 남깁니다.

" Duty,Honor,Country"


"The shadows are lengthening for me.The twilight is here.

My days of old have vanished,tone tint.

They have gone glimmering through the damage of thing that were.

Their memory is one of wondrous beauty,watered by tears,and coxed and caressed by the smiles of yesterday.

l listen vainly,but with thirsty ears,for the witching melody of faint bugles blowing reveille,of far drums beating  the long roll.

In my dreams l here again the crash of guns,the rattle of musketry,the strange,mournful mutter of the battlefield.

But in the evening of my memory,always l come back to West Point

Always there echos and re-echoes:

Duty,Honor,Country

Today marks my final roll call with you,but I want you to know that when l cross the river my last conscious thought will be of The Cops,and The Corps,and The Cops.

l bid you farewell


한편의 아름다운 시처럼,처절한 현실을 받아내어야 했던 삶을,그러면서도  강인한 맥아더의 정신을 나타내는 글이었습니다.그리고 1964년 4월 5일,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떠납니다.



맥아더를 너무 사랑한 아내 Jean은,맥아더가 떠나고 나서도,그리움으로 빚어낸 세월처럼, 그녀의 소원대로 맥아더장군옆에 묻혔습니다.


민주주의를 위해,낯선 땅에서  수없이 피를 흘리고 간 많은 사람들과 한국을 지킨 군인들에게도 

묵념을 올립니다.

방문한곳

맥아더 박물관

MacArthur museum

MacArthur Square Norfolk,VA 23510

757-441-2965



월요일은 문을 닫습니다.

Tuesday-Saturday 10:00-5:00

Sunday 11:00-5:00

참고문헌

위키피디아,유트브 동영상,

Bill O'reilly& Martin Dugard-Killing the Rising sun

Drawing the line-Richard Whel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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