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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위해 6.25전쟁에 참전한 유엔(UN)공원에 가다
10/15/2019 22:09
조회  296   |  추천   3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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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 가면? 전세계유일한 역사를 알려주은 재한 유엔공원이 있습니다.

출렁이는 바다와 푸르른 물결속에 있는 한국의 역사에는

민족동란의 비극적인 전쟁 6.25가 있습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

예전에는 대연동 유엔묘지라고 했는데,지금은 명칭이 바뀌어서 재한 유엔공원이라고 불리웁니다.


너무나 주위가 많이 바뀌었기에 기억을 못합니다.

주차장에 내려서 간판을 보고 이리저리 하늘을 보고 시티간판이 눈에 띕니다.

20여년전에 뜨거운 햇살사이로,무척이나 더웠던 기억이 납니다.

쉴곳도 없고,그 당시에는 물병같은 것을 들고 다니는 개념이 없었나 봅니다.

유엔공원은 더웠어..

현관입구를 보면서 탁 떠오르는 느낌입니다.



분명히 친구랑 갔었는데,친구얼굴은 생각안나고 부채만 연신 흔들어대던 기억이 

이십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뜨거운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습니다.

뜨거웠던 전쟁만큼이나 젊음을 낯선곳에서 묻혀버린 영혼들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대한 민국이라는,남한이라는 나라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승만대통령,,

한국의 가장지식인중에 한사람이며 좌파의 지성인이라 불리우는,도올선생님.

개인적으로 학문열에 상당히 존중을 해왔으며,

예전에 주역,노자등 거침없이 강의를 하시잖아요?

이승만대통령에게 막말을 하신 것을  보니,참으로 참으로 애석하나이다.

이제야 그분의 진실된 모습을  보았습니다.



수고하십니다"'라는 인사말을 하고 들어가보았습니다.

전에는 아파트건물이 없어서 말이죠,지금은  아파트 숲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1951년에 만들어졌으며,세계유일하게 유엔군장병들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습니다.

1950년 6월에 북한군이 대한민국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6.25노래는 김대중정권때 금지곡으로 되었다가,노무현정권때 가사를 바꾸어놓았습니다.



6.25노래

1.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주먹 붉은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2.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불의의 역도들을 멧도적 오랑캐들

하늘의 힘을 빌려 모조리 쳐부수어

흘러온 갚진 피의 원한을 풀으리.


3.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정의는 이기는 것 이기고야 마는 것

자유를 위해여서 싸우고 또 싸워

다시는 이런 날이 오지 않게 하리.

후렴구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쫒기는 적의 무리 쫒고 또 쫒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겨례




6.25한국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굵직했던 서해대전,연평도 사건,그러나 그때는 대적이나 했습니다.

빗장문을 열고 기다리는 문재인정권과 임종석을 선출한 국민들은 

제 2의 6.25가 기다리고 있는 상황으로 지금 돌진하는 모습입니다.

문득,국군의날 행사가 그리워집니다.

한국의 정체성을 지울려고,역사를 바꾸고,이승만대통령을 모독하고,

그것은 말입니다.

허경영총재님의 말씀대로라면,핵전쟁의 탄두속으로 들어갈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것입니다.

제 3차핵전쟁을 막으러 내가 왔다...




지금 역사의 순간에  정치여,야당에서 사람을 선출한다.

언제군대를 정비하고,나라를 세울것입니까?

좌파에 물든 핵심인사들이,언론,군대를  장악해 있는 한국입니다.

트럼프탄핵절차가 시작되어가고,이제 미국은 한국에 대해 이렇게 무수한 피를 흘리며 우리나라를 도와줄까요?

반미를 외치는 소원대로 북한편으로 적화통일구상안이 나온지 오래죠.


한쪽은 좌파요,다른쪽은 박근혜대통령을 탄핵시킨무리요,앞서 행동하지 않았더라도,

왕의자리를 탐내고자,밑으로 배신과 내각제만 꿈꾸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맡길 것입니까?

이글을쓰는즈음에 윤상현(자유한국당을 대변해서)이 유승민바른미래당과 대보수통합하자고 건의를 했습니다.

결국은 이렇게 시나리오가 나올것이라고 예상했지요.

"다 바꾸어야 합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낯선 하늘에 잠든 영혼들



변희재씨가  이봉규티비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감옥에서 종북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양승태대법원장이 있을때,유죄로 판정받았다가,김명수대법원장으로 바뀌면서 무죄를 받았다.

민변출신4명,검사출신 5명 1표로 이겼다고 합니다.

이정희씨가 지금 대한미국에서 종북이라는 단어를 이제야 마음놓고 사용할 수있다고 말했는데,왜 쓰면 안돼느냐고 항의를 했다고 합니다.

변희재씨,,우파,좌파는 법의 개념으로 구속할수 있는 사항이 아니라고 합니다.

변희재씨가 감옥에 간 것은테블릿PC사건은 가짜다,라며 반박하다가 감옥에 기소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영상보시겠습니까"

입구에 들어가자 말자 어느여자분이 말씀하셨습니다.

"녜"

자 자리에 앉았습니다.

영상을 틀고 방송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여기에 근무하시는  여자분이 티비를 틀자말자,커피를 가지고 와서,시원한 에어컨이 도는 이곳에 앉아서 수다를 뜨는 것이었습니다.

다른분은 친구분같았습니다.

도대체,,

두 여자분..

밖에는 날이 상당히 더웠습니다.

그래도 그렇지,끝까지 방해공작을 하기위해 쉬지않고 떠들어서,확 돌아보았습니다.

움찔,

나갔다가 다시와서 수다를 떨기 시작합니다.

와,,



유엔공원에 근무하는 여자분,,이래도 됩니까?

나라의 세금으로 잘 지내고 있고,낯선젊은이들의 핏값으로 세워진 공원묘소에,

참배하러 먼길을 온 사람에게,그것도 모자라,티비를 틀고 있으니,더 큰소리로 끝까지 이야기합니다.

예의가 정말,진저리나게 아예 없었습니다.

영상을 틀어주면서 일을 하는 여자분,이래도 됩니까?

더운날씨에 더운감정까지 확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딱 저 혼자서 보고 있었는데,,그 난리였습니다.

최소한의 유엔공원의 예의도 안지키시는 분이 어떻게 이 곳에서 일을 하시는지 의심스러웠습니다.

이게 제 만의 일일까요?

다른분들도 겪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너무 뻔뻔스럽게 이야기를 큰소리로 끝까지,끝까지 하십니다.





재한 유엔군의 역사


1950년 6월 전투가 시작되면서,대전근처 (1950년 7월9일)인 금천,신동등지에 임시 군사묘지를 세웠으나,조선인민군이 부산으로 진격하면서 유엔군은 이들 임시 군사묘지를 포기하게 됩니다.

71-In to the Fire(1950년 8월11일포항여자중학교에 겪은 실제  학도병이야기)-나중에 들었습니다.

(여기에 참가한 배우들 결국은 ,좌파들에게 꼬투리를 잡혀서 다  쫒겨 나갔다구요.)

신일수 해병-맥아더가 만난 군인_1950년 6.28일)

부산교두보전투가 벌어지면서 마산,밀양,대구등지에 임시묘지가 세워지고,부산에는 7,11일에 세워집니다.




북한과의 싸움이 길어지자,신천,원산,유단리,교토리등의 마을에 임시묘지가 세워졌다.

한국전쟁이 벌어진뒤 처음 두달동안에 11개사단규모의 묘지가 세워졌고,

이후 북한지역에 5개의 유엔군묘지가 있습니다.





한국전쟁이 시작되었을때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미국육군영현부대는 

일본 요코하마시에 주둔하여 제2차세계대전당시에 실종되었던 

미국장병들의유해를 찾고 있었던 제108영현등록소대였다.



제 108영현등록소는 114영현등록중대로 개편되었고 흥남과 평양 등지에 파견되어 임시 묘지를 세웠다.

제 2병참 영현등록과 미국 제2보병사단을 지원하여,미국과유엔군의 유해를 봉안하였고,

나중에는 제 148영현등록대로 재편되었으며,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을 펼쳤을때,제 565영현등록소중대의 한 소대가 배속되었다.




1951년4월부터 제 293영현등록중대는 임무를 시작했지만,여러가지 어려움의 

위협으로 유해를 봉환하기가 어려웠다.


일요일아침  배달된 신문을 펼쳤습니다.

68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오다.(10-13-2019)

군인인 Winfred L "Dick" Reynold 가 알링턴국립묘지에 묻히다.

너무 오래되어 남아있는 가족도,겨우 연락이 되었다는 기사였습니다.

1951년 4월26일 적에 부상당한 군인을 도와주려다 죽었는데,그 때의 나이가 22살이었다.

한국전쟁에 참전하였으며,남한의 화천부근이었다.

그는 medical unit 32nd Infantry Regiment,7th Infantry Division에 소속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6.25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아직도 우리곁에서 이렇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유엔묘지는 1951년 부산 남구 대연동 당곡마을에 인력으로 만들기 시작했으며,같은해인

 4월에 유엔군묘지(United Nations Military Cemetry)가 완성되고,4월 6일 매슈 리지웨이 (Matthew Ridgway)장군이 봉헌했습니다.



6.25전쟁은 어떻게 보느냐?

과거 6.25는 강대국의 대리전쟁으로 보는 시각이 많았으나,

90년대 냉전체재 해소로 구소련기록들이 많이 드러나면서,6.25발발은 

김일성 개인의 강력한 주도적개혁에 의해 전격 개전되었음이 자료를 통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전쟁으로 일본은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하고,제 2차 국공내전으로 풍전등화같았던

 중화민국이 살아나고,중국은 20여년 넘게 고립되는 상황을 맞이합니다.



6.25전쟁의 정의는

1950년 6.25 새벽 북위 38선 전역에 걸쳐 북한군이 불법남침하여,일어난 한반도 전쟁

영어로는 The Korean War이며,자유 민주주의 진영에서 전쟁을 주도한 UN군사령부에서 붙인 것입니다.

북한에서는 조선전쟁,조국해방전쟁이라 부르며,(북한은 한국을 인정하지 않는다)

중국도 조선전쟁,혹은 항미원조라하여,미국에 대항한 조선을 지원한 전쟁을 말합니다.

지금현재도 중국은 지원군최초 교전일인 10월25일을항미원조지원 의용군의 날로 기립니다.



매슈 리지웨이(Matthew ridgway)장군은 트루먼대통령에게 해고당한 맥아더장군의 뒤를 이어 유엔참모로 한국내전을 지휘합니다.

중공군이 침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여,압록강까지 진출했지만,100만의 중공군침입으로,장전호전투등,많은 장병들이 죽어가자,맥아더장군은 핵폭탄으로 중국을 발사하고자 했지만,해임당합니다.

이제 그 핵폭탄은 대한민국 남한으로 몰려오고 있다고 말씀하시죠.



맥아더는 해임소식을 듣고,자신은 명령을 어긴적이 없으며,자신의 해임건은 극동지역에서 

미국영향력을 약하게 만들기 위한 워싱턴내에서 음모라고 말했습니다.

1962년 10월-11월 까지 미국을 방문중인 김종필을 만나서,맥아더는 말씀하였습니다.

"한국이 하루빨리 통일이 되기를 바란다.나는 한국이 통일이 될때까지는 죽을 수없다.

"6.25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만주폭격을 주장했으며,6.25전쟁의 휴전에 있어서,

미국은 잘못을 저질렀으며,한국에서의 북진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았기때문에,

오늘날 인도네시아사태가 발전된 것이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트루먼의 맥아더 해임은,중국이 강대국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한국분단역사와 중국의 티벳의 지배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매슈 리지웨이 (Mattew Bunker Ridgway)-1895-1993


 구글이미지


제 2차세계대전 당시 82공수여단의 치휘관으로 ,시칠리아,이탈리아,노르망디에서의 작전에 참여한뒤,1944년 8월 새로형성된 Xvlll공수여단을 지휘하여,

제 2차세계대전 종전까지 벌지전투,바시디 작전,서부 연홥군 독일침공에 참여하였으며,

제 2차세계대전이 끝난후에도 주요직 사령관을 지냈으며,유럽에서 전투가 끝나고 

육군중장진급한 리지웨이는 태평양 전투중이던 맥아더 장군휘하로 가게 됩니다.



1950년 한국전쟁중 교통사고로 사망한 미 8군 사령관워커의 후임으로 한국전쟁에 참여하게 됩니다.

1951년 맥아더가 트루먼대통령에 의해 해임되자,대장으로 진급됨과 동시에 맥아더 뒤를 

이어 연합군 최고 사령관,유엔군 사령관이 되었습니다.

한국전쟁이후 NATO 사령광,미 육군참모총장등을 거쳐 퇴역합니다.

퇴역후에는 자서전과 한국전쟁에 대한 책을 집필하기도 했으며,사망후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됩니다.



매슈 리지웨이는,양평에 있는 지평리전투에서 전세를 회복하였으며,  38선을 확정하여,

그나마 한국의 적화통일을 저지하는 큰 역활을 하였습니다.



전쟁이 일어난 배경을 찾아보았습니다.

대한민국은 선거를 실시하여,8월에 이승만대통령으로 나라를 수립하며,

북한 인민민주주의 공화국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9월에 정부를 수립하였으며.

북한은 미중양국 군대철수를 요구하여,소련은 10월에 철병을 하였고,

미국은 1949년 6월에 500여명에 달하는 고문만 남기고 군대를 철수합니다.




이러한 분단과정에서 김일성은 확실하게 준비를 시작합니다.

1948년 10월 완전무장한 4개의 보병사단과 소련제 T_34중형전타로 장비한 제 105호기갑대대를 편성

1949년 3,17일 소련,북한간에 조소군사비밀협정체결

          3,18일 중공과 방위조약을 체결하여,중국공산군에 있던 

조선군 2만5000여명이 북한에 인도되어

이로써 북한은 10개 북한군사단 13만명이 38선에 배치되었고,

10만명의 예비군까지 후방에 배치해 놓았습니다.(이들은 6.25당시 남침과 서울점령선봉을 맡음)

6.25 전쟁때 당시 북한정권을 지원한 중국인민사령관은  평더와이 총사령관이었습니다.



막강한 군사력을 갖춘 김일성은 무력통일을 행사하게 됩니다.

그 당시 주변상황은

1.1949년 10월 중국대륙이 공산화

2.1949년 6월 미군철수 완료

3.1950년 1월 미국의 극동방어선에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시킨다는 에치슨 미국무장관의 성명

4.1949년 2월 스탈린은  김일성과 박헌영을  모스크바로 불러,소련군의 철수로 인한 군사적공백과 한반도정세를 논의합니다.


                                  스탈린을 만나기위해  모스크바로 간 장면입니다,

  남한의 무력침입계획에 대한 스탈린으로 부터 승인을 받아냄.

(나중에 자료에 의하면,김일성은 마오쩌둥과 스탈린에게  48번이나 남침허락내지는 전쟁지원을 요청)

공개된 구소련자료에 의하면,애초에 스탈린은 미국과 마찰을 피하기위해 거절하였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김일성은 수차레 스탈린을 설득하였고,옛소련의 문서를 근거로 주장하는 이론에 의하면,

스탈린는 미국을 시험하고 ,미국의 관심을  유럽에서 아시아로 돌리기위해 중화인민공화국이 전쟁에 대한 원조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하는 조건으로 김일성남침을  승낙하였으며,이리하여 스탈린은 강력한 군사적원조로서,소련의 최신무기를 대량으로 제공하였다.




남한의 국내요인으로는

1.박헌영과 같은 좌익정당,또 김구와 같은 국내파의 민족주의자인 독립운동가들,그리고 이승만과 같은 해외파독립가들은 서로를 불신하여,대한민국은 여러개의 정당이 난립하고 있습니다.

2.그런데..김구선생님은 통일되기전에 독립운동가로 남아야 했습니다.

요즘에 새로운 자료가 나왔죠. 백범일지를 읽으며,뜨겁게 독립을 갈구하고 노력했던 그 분.

그러나 이승만대통령이 주도하는 남한 정부가 되려고 할때에 김일성이 보낸 성시백의 주선으로 만난 김구선생님은,북한에서 김일성을 만나고나서 100도로 변해서 돌아왔습니다.

이야기를 풀어내자면 길지만,요점은 대한민국수립반대,미군철수,(미군이 철수해도 절대로 북한은 침입하지 않는다.6.25동란을 모르시고 돌아가셨습니다))유엔정부등,남한정부수립을 끝끝내 반대하였습니다.

(오호 통제라)......



붃한공산당은 침략계획을 은페하기 위해,남북한 최고인민회의를 서울에서 개최하자,

남북 국회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등 평화공세를 펼칩니다.

요즘에도 비슷하네요?

고려연방제니,,하면서 

그리고 남한군사장비가 너무 열악하였으며,예비군도 없이 8개사단중에 

4개 사단은 38도선에서 부터 먼 후방에 배치되어있었으며,공산게릴라 소탕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6.26일 김일성은 6.25전쟁을 일으켜,남한을 해방시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으로 

하여금 조국통일을 성취하기 위한 전쟁이라고 발표를 하였습니다.

무방비상태였던 남한은 6.27일 서울을 점령당했으며,7,3일 한강을 건너 파죽지세로 남진하였습니다.

민족해방정책이라고 표방하였던 북한은 인민재판이라는 피비린내나는 숙청으로 하는 

공포정치를 자행하였습니다.



유엔군의 폭격아래에서도 점령지역에서 북한은 직업동맹,농민동맹,민주청년동맹과 

여성 동맹등 여러전위단체들을 조직,7.14-9월13일까지 점령지역의 시.군.면.이동까지도

 전부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여,전쟁수행을 위한 동원정책을 취하였다.

남한에 거주하던 남북인사들도 강제로 납치하여 북으로 이송하였습니다.



이때 유엔군은 겨우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며 힘들게 싸우고 있을 때였습니다.



전쟁와중에서도 도로복구와 다리파손등을 빌미로 군수품과 식량을 조달하였으며,

심지어 의용군이라는 이름하에 강제징집하여,필요한 병력을 충당하였다.

(이 부분에 대해서 조선인민군 정보문건에 의하면 대한민국 행정소재지의 군단위까지 1950년도의 쌀,보리등의 모든 농작물에 대한 예상 수확량이 기재되어 있어서,조선인민군은 이 정보를 바탕으로 수확량과 공출량까지 확보해놓은 상태였습니다.)

후일 정전협정으로 포로 송환문제에서 반공포로라는 이름을 낳아,협상을 어렵게 합니다.






드디어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수도를 다시 탈환하였지만,맥아더 장군과 워커장군과의 의견도 같지는 않았습니다.무조건 전진하여,한국을 통일해야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맥아더와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중공군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맥아더의 판단과 반대로 135만명이라는 인해전술로 남한군과 유엔군을 공격하여 수많은 전사자를 낳았으며, 결국 트루먼의 맥아더해임이라는 전쟁중에 선포를 하게 됩니다.

그뒤를 이어받은 분이 매슈리지웨이 장군이었습니다.

허경영총재도 말씀하시죠.

남한이 적화통일안되고 자유로 하게 된 것은 미국의 절대적인 도움이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반미를 외치고,미군철수를 논하는 것은 북한과 중국공산당의 획책입니다.



1951-1954년 사이에 기념공원에는 유엔군전사자 11.000명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었으나,벨기에 콜롬비아,에디오피아,그리스,필리핀,태국용사의 유해와 미국용사유해,프랑스인,노르웨이유해일부가 그들의 조국으로 이장되었으며,현재는 오스트레일리아(281),캐나다(378),프랑스(44),네덜란드(117),뉴질랜드(34)

노르웨이(11)대한민국(36),과 아울러,무명용사(4)와 비전투원(11)등 2,300용사의 유해가 잠들고 있습니다.



또한 무덤마다 고인의 기록을 담은 묘비가 놓여있고,경내에 심어진 묘묙의 대부분이 정부,각 기관이나 개인에 의해 기증된 것이다.

고지에는 20개의 소지구가 있는데,각 지구에는 6.25전쟁에 참전하였던 유엔회원국과 대한민국 국기가 연중게양되며,그 국명이 개별적으로 청동비에 표시되어 있으며,이곳을 상징구역이라고 합니다.



6.25전쟁에 참여했던,터키여단묘역은 서편에 2개의 기념비를 세웠으며,그 중앙에는 그리스 기념비가 세워져있습니다.

6.25전쟁에서 전사하였으나,항공기사고등으로 유해를 찾지못한 386용사들을 추모하는 영연방위령탑은 1965년 5월 영국정부가 건립하였으며,묘역낮은 동편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1998년 11월호주조각가가 기증한 호주 기념비는 서쪽 호주묘역에.캐나다 한국참전기념사업회가 기증한 캐나다 기념동상은 2001년 11월에 캐나다 묘역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묘역아래쪽에는 1978년 10월 한국정부가 건립한 유엔군위령탑벽면에 참전국들의 지원내역과 전사자수가 동판에 새겨져 있으며,탑내부에는 한국전에 전시한 유엔군전몰장병들의 명부가 소장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몰랐던 6.25에 대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이형근씨가 자신의 회고록"군번1번의 외길"을 월간중앙에 연재하면서 언급한 내용입니다.

이 분을 몰랐는데요?제 1공화국에서 9대와 직무대행으로 참모총장을 역임한 분입니다.(검색결과)

이형근씨는 당시 한국군 내부에 간첩내지는 북한과 동조하는 세력이 있었을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그래서 연구를 하였지만,학술적가치로는 연구가 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 중에서 6.25의 10가지 미스테리를 올려봅니다.



1.일선부대의 적정보고를 군 수뇌부에서 묵살내지는 무시했다는 점


 6.25발발 직전인 1950년 4월-5월까지는 이형근이 지휘한 8사단뿐아니라,다른사단에서도 적의 대규모 남침징후가 보인다는 보고가 잇따랐다.

예를 들어 8사단의 경우,1950년 3월-5월태백산맥으로 침투한,이호재부대의 잔당과 김무현 유격대를 토벌하는 중,생포한 포로를 잡아서 심문한 결과,이구동성으로 적의 대규모남침을 거듭예고하였기에,이 정보를 육군본부에 수차례보고했으나,반응이 없었다고 합니다.




2.각급주요 지휘관의 이른바 6월 10일 인사이동       

6,25가 발발하기 2주일전에 중앙요적을 포함한 전후방 사단장교,연대군의 대대적인 교류와 이동을 단행합니다.중요한 것은 한꺼번에 많은 인사를 단행한 것입니다.


3.전,후방 대대적인 교대

6월 13일-6월 20일에 걸친 전후방부대교대 역시 부적절한 조치였다.

전투를 지휘해야할 지휘관들은 지형은 커녕 부하신상파악조차 할수가 없었다.


4.북한의 평화공세에 남한은 6월11-23일까지 해오던 비상경계령을 내렸다.


6월10일 조국통일 투사 체포사건에 대해 평양방송이 맹렬한 비난과 무력행사위협을 해왔기 때문인데요?공교롭게도 6.23일 김일성이 남침준비를 완료하고 대기하도록 결정된날 비상경계령을 해제한 점입니다.



5.이러한 위기상황에 육본은 비상경계령해제와 더불어 장병의 1/2에게 휴가를 주어

 외출과 외박을 시켰습니다.

육본 정보분석과에서 북한의 움직임이 심상치않다는 보고를 육군참모총장에게 올렸음에도 불구하고,이런결정을 내린것입니다.


6.육군장교클럽 댄스파티가 6.24일밤에 열렸습니다.

 육군장교클럽 낙성파티를 연다고 전 후방 고급장교들에게 초청장을 보냈습니다.

이형근대장도 받았지만,시기적으로 너무 엉뚱하다고 판단하여,불참하였다고 합니다.



7.북한이 남침한후,대한민국 국군병력을 서울북방에 축차투입해,불필요한 장병들의 희생을 강요하였습니다.

  

아무리 급한 상황이라도 군사적기초상식을 깬 작전지도였습니다.


8.적의 공세에 국군이 퇴각하는 상황에서 6.25-6.27일 우리중앙방송은 국군이 반격하여 북진중이라고 허위방송을 함으로써,군부는 물론 국민들까지 상황을 그르치게 하였습니다.


9.우리측의 한강교 조기 폭파


전술의 원칙상,폭파나 차단은 퇴각군의 퇴로를 막기위해,추격군이 감행하는 법인데 한강교는 우리측이 그것도,한강이북에 있는 국군만 믿고,있는 많은 시민,그리고 병력과 군수물자를 방치한채 서둘러 폭파를 하였습니다.

더구나 대통령,정부고관,육군참모총장이 국민들에게 알리지도 않고,한강이남으로 도피한뒤,한강교를 폭하한 것은 전술적으로나,도의적으로나 용납될수 없는 하책이며,반역행위였습니다.


10.공병감,최상식 대령의 조기총살집행


최상식대령은 육군참모총장의 명령에 따라,북측 한강교를 폭하했을뿐인데,이에 책임을 지고,서둘러 1950년 9월 21일에 비밀리에 처형되었다.

그때는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을 하여 전세가 역전되는 시기였는데도 서둘러 처형한 것은 정치적 복선이 있었음을 의심하지 않을 수없다.

길게 설명을 하셨는데요?과연 그당시 참모총장은 누구였을까?

검색해보니,채병덕이었습니다.



저도 몇부분은 알고 있었습니다.

정말 왜그랬을까? 

역사의 오해는 이제 자료속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6.25참전용사가 들려주는 한국전쟁이야기

제목입니다.유투브로 보셔도 됩니다.(업로드가 안되어서 내용만 올립니다)

육군본부직할결사대




백골병단 26명은 2010년 6.25일부로 전역을 명받았기에,이에 신고합니다.

6.25현역의 59년만의 전역식을,치른비디오가 2019년6월24일에 올라와서 처음으로 보았습니다.

이 비디오도 거의 9년이 지나서 올렸습니다.

촬영당시에 92세였습니다.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만큼이나,굴곡진 한국의 6.25.전인식작전참모가  들려주는 실제의 이야기인데요?

그가 집필한 책이 36권이나 되며,그 중에서 "못다 핀 젊은꽃'은 1987년 티비시리즈  3부작 연속극으로 제작되었습니다.

 



6.25전쟁은 3일만에 서울이 함락당하여,당시 북한군의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강제로 징집하는 시기여서,강제차출을 방해하며,저항운동을 했는데,그 당시 22살이었으며,총은 인민군이 놓고 간 총한자루가 전부였습니다.

중공군은 압록강을 살금살금 건너와,아군과 교섭을 벌이지 않았다가,12월에 대진격하였습니다.

꽹과리,북,피리를 불면서 진격하여,아군은 철수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대구육군보충대에 들어와 있는 6-7000여명의 장병중에서 선발하여,훈련을 거쳐 유격전을 수행하면 되겠다는 판단이 들어서 시작한 것입니다.





 대한민국 최초 유격대 탄생-육군 본부 직할 결사대

710명을 1차로 선발하여,육군정보학교에 입교하여,옷도 인민복으로 입고,노래도 빨치산노래와 군가로 행진하였습니다.

비록 유격대원이라 할지라도 전투경험이 전혀 없는사람들로 구성되었으며,1951년 2.7일 결사 12연대 출동신고와 열병의식을 진행하고 살아오면,2계급특진과 무궁훈장을 수여받는다는 특전이 있었습니다.

출동하라....

단지 그 때 받은 배급이 2주일 미숫가루였다고 합니다.


3차로 나뉘어진 선발대는 1951년 강원도 명주군 연곡면 회곡리에서 집결하여,병력 647명으로 백골병단을 창설하고,전인식이 작전을 지휘하게 됩니다.

최악의 환경으로 식량보급이 어려웠으며,풀뿌리조차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영화 30도까지 오르는 혹한속에서 적의 고위간부13명 생포하고,적의 기밀문서를 노힉하며,적의 초소를 파괴하였습니다.

그 중에서 1951년 3월18일 인제 필레지구에서 은신중인 빨치산 5지대장 겸 대남 빨치산 사령관 김원팔등 13명을 전원 생포하며,기밀계획을 전해줍니다.



김일성이 준 국기훈장까지 있었으며,남부지역에 대한 비행기초소,다리파괴등 

아주세밀한 계획안이었습니다.그러나 나중에 적에 발각되어 도망을 다니다가,

단목령에서 굶고 얼어서 죽은 비전투손실이 120여명이나 되었습니다.

총이 없어서 일부는 수류탄,또는 대검만 들고 있었고,(이 이야기는 1999년 티비 드라마"이 한몸 다바쳐'로 제작),추위에 얼어서 바스락거리다가 누우면 그냥 죽어버렸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업무를 마치고 돌아온 사람은 283명이었습니다.

북한군 309명생포,적 170여명사살등 업적을 남겼는데,백골병단은 1951년 4월 15일 미 8군으로 이관되어 

그해 6.28일 미 8군 테스크 포스 커크랜드라는 부대에서 제대를 하면서,제대증을 바꾸어달라고 하니,모든 것이 미 8군으로 이관되어서 제대증을 줄수 없다고 해서,소령계급을 단채로 고향에 갔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오니,가짜소령계급이라 하여,1사단 특무대에서 나를 체포해서 혹독한 고문을 다 겪었습니다.

거의 죽을뻔한지경에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는데,그당시 재판장인 김 동빈대령이"대한민국에서 훈장을 수백개주어도 될사람을 잡아놓고 무엇을 하느냐?당장 풀어줘라.'

그러면서 또 오해의 소지가 있으니,모든 자료는 두고 가라고 하여,집으로 돌아오는데 거의 엉금엉금기어왔으며,한달동안 누워있었습니다.

모든것이 사라졌습니다.

죽은 전우들,살아서 고생만 하던 전우들,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명예를 회복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 아니예요?



그 후 1961년 8월 참전 전우회 발기를 해서 앞장을 서서,전우회원발굴과 명예회복을 위해서 육군본부,국방부에 진정서를 얼마나 많이 내었는지 모릅니다.

수백통,수천장을 보내어서,진정서 하면 전인식이라는 사람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전몰 장병 위령제 1989년 4월3일

백설의 장정출판기념회 1988년 4월1일

강원도 인제군 기림면에 전사관 현규정 대위외 2인발굴

백골병단 견적비 기공식 1990년 6월 13일

스스로 증명해낸 육군본부 직할 결사대는 국회에서 의원,입법으로 통과가 되는 날,



우리전우들10여명은 국회방청석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지난 50여년간 전우회장으로써 정말 피눈물나는 고생을 하였습니다.

파란만장한 개인의 삶,그러나 전인식소령은 모든 전우들에게 명예를 회복해 주었으며,이름없이 전쟁에 

참가했다가 절망속에 삶을 살아간 모든 이들에게 횃불처럼 길을 밝혀주었습니다.



박정희대통령이 방문하셔서  심은 식수입니다.

이승만대통령과 윤보선대통령식수도 있었습니다.

좌파가 물러가고나면,박정희 대통령과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명예회복도 이루어질까요?

나라와국가에 대한 자부심을 키우고 노력했던 대통령이었습니다.





유엔군의 파병은 1950년 6.28일 제 2차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결정한 것으로 

전투병력과 장비등을 지원한 전투지원16개국과 병원선,의료진,의약품을 지원한 4개국과 

 물자지원을 약속한 44개국을 포함한  총63개국이 대한민국을 방어하기위해 참전하였습니다.



 

1950년 6.25-1953년  7.27일전쟁중에 전사한 유엔군은 40,896명이며,

대부분은 자신의 나라로, 이장을 했으나,영국 영연방 885명이  유엔공원에 안치되어 있는 것은 

숨진곳에 묻는다는 영국의 풍습에 따른 것이라고 합니다. 

또 안장자가 모두 전사자는 아니며,본인이 원하는 경우에는 사후에 이곳에 안장을 합니다.


  

낯선하늘에 잠들다


고향의 하늘은 아니어도

바람은 알고 있을꺼야

부모형제가 기다리는 곳으로 갈 수있다고 

꼭 돌아갈수 있다는 믿음으로 

굳건하게 든 총과 전우들

그러나 

피지도 못한 청춘들이 나뒹굴고

처절하게 퍼붓는 총탄에 하나둘씩 꿈이 떨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왔노라

민주주의의 자유를 위하여


바람은 알고 있을꺼야.

가슴밑바닥에 올라오는  뜨거운함성

비록 떨어진 꽃이 되어도

영원히 살아서 역사의 현장으로 남았다.

그리운 하늘이여

고향의 바람이라도 불러주오






6.25전쟁에 참가하여,대한민국남한을 위해 싸운모든 분들에게 묵념을 올립니다.

 자유의 아름다움, 그 위대함을   누릴수있게 해준모든 분들에게도 또 한번 감사드립니다.




방문한곳

부산광역시 남구 유엔평화로 93(대연동)

 051-625-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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