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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십일조의 두 얼굴" (십일조X,각종 헌금X,각자 연보O)
05/02/2020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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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인및 시각장애우를 위한 18분 오디오, https://youtu.be/3s2AaItQ2S0

  Jesus Kingdom 한국교회의 회개와 개혁 메시지 모음 


[청각장애우를 위한 한글 텍스트]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저는 한국 개신교 예수복음 전도자입니다. 오늘은 장로교 개혁교단 N교회 박아무개 목사의 십일조의 두얼굴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2004년도에 설교한 메시지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지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구약에 존재했던 주님의 모형이며 그림자들을 모두 다 제거하셨다고 믿는 줄로 아는데, 그렇다면 십일조는 구약의 요구입니까? 아니면, 신약의 요구입니까?


먼저, 구약시대를 사신 예수님이라는 점을 알아야함에도, 신약시대의 예수님께서 직접하신 말씀이라면서, 목사들은 이상한 용기를 얻고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다시 한번 상고해 보고 과연 이 말씀이 오늘날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반드시 적용되어야 하는 말씀인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저는 박식한 성경학자는 아니지만, 마태복음 2323절의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아도, 십일조라는 의미가 얼마나 거짓이고 가증하며 추악한 것들로 드러나고 있는가를 알 수있는 것입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아멘..


모든 대화에는 항상 상대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서 그 의미는 흑백의 논리처럼 다르게 나타납니다. 특히, 마태복음 23장 전체의 내용을 보면 시종일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꾸짖으면서 하시는 말씀으로 일곱 구절의 말씀은 서두에서 부터, 화 있을찐저라고 저주를 전제로 하셨고, 33절에서는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라는 그들의 결과론을 필설하셨습니다. 더욱이, 마태복음 23장의 말씀에서 깨달아야할 것이 있다면


이 말씀들이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도 되지만, 오늘날 소위 종교지도자들이라고 하는 목회자들에게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에 대해서 누가 아니라고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232절에서, 이미 교황과 같은 목사들을 일컬어 하시는 예언의 말씀으로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라고 하셨다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않고 오늘날의 목회자들에 적중하는 말씀으로 느껴질 정도이니, 그저 탄복할 지경입니다.


저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함은 율법의 자리에 앉았음을 일컫는 말이요, 더 나아가서는 예수님의 자리에 해당하는 하나님의 자리에 앉았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얻기 위해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오늘날 한국교회 목사들은 하나님의 자리에 앉기 위해 장로. 집사. 성도들의 혈세인 십일조를 착취하지 않았습니까? 아니라면, 어디서 도적질한 것일까요. 구약의 십일조나 신약의 연보는 가난한 자와 고아와 과부에게 사용하라고 한 것인데,


구약의 십일조를 돈으로 거두어 들이는데 혈안이 되어 있으니, 독사의 새끼들아! 뱀들아! 라는 말을 들어도 싼 것입니다. 수 천만원 또는 억대가 넘는 자가용들은 예수를 팔고, 장로. 집사. 성도들의 피를 태우면서 달리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한국교회를 향하여 다음과 같이 호통치실 것만 같습니다.  "로마 천주교의 바티칸 궁전을 바라보면서 손가락질하는 자 들이여! 너희들은 어찌하여 십일조라는 면죄부로 궁궐같은 가짜 성전들을 짓고 있느냐? 그리고, 너희들은 스스로 교황들이 되어 가난한 백성들의 혈세로 부를 누리고 있는 것이냐?


멜기세덱은 드리는 자가 아니요, 받는 자로 그 멜기세덱이 되는 나 예수는 내 자신을 바쳐서 속죄의 제물로 종결하였다. 그래서, 제사는 예배로 바뀌었고, 모든 절기가 예배의 날로 바뀌었으며, 제물은 너희의 헌신으로 대신하게 되었고, 십일조는 연보가 되었는데, 그것을 정녕 모르고 있다는 것이냐? 아니면, 알면서도 이를 철저하게 속이거나 무시하는 것이냐? 십일조는 강제적인 율법이지만, 연보는 은혜로 즐겨내는 것이다.


또한, 연보는 나를 바쳐 십일조로 완성시킨 전부를 드리는 것의 표가 되는 과부의 두렙돈이 아니고 무엇이냐? 율법 아래에 있는 자는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행할 것이나, 율법의 완성 아래에 있는 자는 모든 것이 나 예수의 것으로 여기는 산 제사의 표본이 아니겠느냐? 또 성전을 허물어 버리고 너희를 성전 삼지 않았느냐? 모든 것을 다 이루고 이제는 실체로 내가 성령과 말씀으로 나타났는데, 왜 십일조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냐?.. 이런 경고의 말씀과 일맥상통하는 성경구절이 마태복음 2323절입니다. 다시한번 읽겠습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초대교회의 성도 중에는 자신들의 재산을 기부한 사람도 있었는데, 유대교에서 개종하고 거듭난 그리스도인들끼리 정통 유대 동족을 피하여 공동생활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의 신앙은 율법적이요 계산적인 십일조가 아니라, 기부하는 연보 정신이었음을 기억해야할 것입니다.


바울 서신들이나 제자들이 기록한 신약의 모든 성경을 살펴보아도, 십일조를 하라든가 주일성수를 하라는 가르침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연보와 십일조를 구분하실 수있으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많은 교회들이 신약에 와서 본질적으로 사용하지도 않는 십일조를 다시 율법화해서 장로. 집사. 성도들을 꽁꽁 묶어 놓으려하는데 이는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신약시대에 십일조가 없었다는 사실은 바울을 통해 확실히 드러났습니다. 만일, 사도 바울 당시에도 십일조가 있었다면 바울이 직업을 가지고


구태여 천막을 짓거나, 루디아를 비롯한 많은 성도들에게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 또한 그러했으며, 특히 일곱 집사를 세운 것은 십일조의 관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연보를 관리하도록 한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한가지 더 확실하게 기억해야 할 것은 갈라디아서가 말하는 율법과 복음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수차에 걸쳐서 다른 말들로 여러분들을 이해시키려 하고 있지만, 한국교회의 장로. 집사. 성도들은 바리새인들 같은 목사들 때문에,


십일조라는 율법에 완전히 묶여버리고 말았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쉽게 말해서 약속어음과 같은 것이라고 '윌리엄 헨드릭슨' 이라는 사람이 갈라디아 저서에서 밝혔습니다. 약속어음은 현찰과 교환되고 나면 그것은 어디에도 쓸 수 없는 버려진 휴지에 불과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십일조에 대한 크나큰 복의 약속을 지킬 것이라면서, 변질된 목사들은 목에 힘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율법의 다른 얼굴을 벗어 버리고, 은혜의 얼굴 곧 그리스도의 얼굴로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그분 자신을 드려서 우리를 사신 것처럼 우리의 전부를 드려서 그분을 사야만 합니다. 저는 언제나 바울의 고백을 즐겨 듣고 봅니다. 고린도전서 1531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아멘.. 그리스도를 향하여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을 하는 자들에게는 십일조라는 제도 자체는 오히려 가증스러운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에게 숫양이나 물질을 바치는 제사보다도 말씀 순종을 원하고 계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약에서의 우리 제사는 로마서 121절의 죽은 제사가 아니라, 산제사임을 깊이 명심해야 합니다. 예배의 어떤 의식적인 날이나 제물이나 절기나 규례나 나타나 보이는 어떤 물질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산 제사로서의 삶속에서 열매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모든 율법은 그리스도의 삶과 죽으심으로 완성이 되었고, 이로 인해 모든 절기와 제사는 폐하여지고, 안식일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께 모든 날을 주의 날로


안식할 수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성전이요 율법이요 절기며 제사와 십일조를 말하는 자들은 구약이나 율법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율법을 완성하셨지, 율법을 폐하신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율법은 존재를 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마태복음 517절에서 20절을 채택하고 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율법의 완성을 아래와 같이 답변을 드리고 본질적인 것을 논하고자 합니다. 마가복음 123031절 말씀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우선, 근본적인 논리로 율법은 종이며 백성의 신분에서 지켜야 하는 법이라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하는 자들의 법으로 곧 하나님의 근본 사랑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바울 서신들인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에서는 율법의 초등학문을 버리고 담대히 그리스도 앞에 서라고 요구하심을


받지 않았습니까? 십일조는 레위지파. 과부. 고아. 객을 위해 지정된 것입니다. 레위지파는 다른 어떤 분깃도 없기 때문이었지요. 그렇다면, 신약시대인 오늘날에도 레위인이 존재합니까? 결단코 아닙니다. 가톨릭을 비롯한 구교와 신교에 구약의 레위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를 포함한 우리 성도들 모두가 만인 제사장들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목사들은 자기자신을 레위인이나 제사장들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줄곧 입에서 나오는 말들을 들어보면, 성전이 어떻고, 제단이 어떠하며, 제사와 십일조가 어떻고,


절기를 찾으면서, 그리스도를 완전히 욕되게 하고 성도들을 기만하고 있습니다. 은혜가 무엇이며 믿음이 무엇입니까? 은혜 아래에 있고, 믿음 아래 있다고 하면서 율법의 종처럼 굴어야 하겠습니까? 생명의 피를 주신 예수님의 이름을 영접하여 참 믿음생활을 하는 참된 성도라면, 영혼과 생활에서 속박을 벗어난 새들처럼, 자유로움과 다정함을 나누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넘쳐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는 예수믿고 인간화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덧입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도덕군자의 피를 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의 피를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훌륭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격으로 살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으로 명하기를, “내가 완전한 것처럼 너희도 완전하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피조물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로 완전할 수 없었기에, 인간은 율법의 명령을 어길 수밖에 없었고, 그렇다보니 율법에 사로잡힌 바 되어 율법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감사할지니 율법의 규제를 받을 필요가 없는 완전한 권세를, 예수님의 피를, 자유의 생명을, 주님의 은혜로 값없이 받게 된 까닭에 인간들도 마침내 피조물만을 억압할 수 있는 율법의 세력을 뛰어넘어서 모든 율법으로 부터 자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교회라고 하는 장로. 집사. 성도들이여! 제사장을 가장한 목사들이여! 아직도 제2의 이스라엘을 꿈꾸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율법의 노예들이었던 저들의 누추함이 그렇게도 좋아 보였던가 말입니다.


교회들이 십일조에 목숨을 걸 만큼 중요한 사안이었다면, 왜 바울이나 사도들이 십일조에 대한 언급은 전혀 하지 않았는지, 성령께 간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제자들에게 마태복음 1010절과 누가복음 93절에서,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적인 답으로 그들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누가복음 2235절입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이르되, 없었나이다.".. 제자들이 복음 전도에 나섰을 때, 사도적인 권위나 제사장적인 위엄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주님처럼 형제요 친구처럼 찾아갔던 것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의 모습은 형제요 식구요 친구처럼 모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율법적인 성전세나 열한 지파에게 내는 십일조의 세는 더 이상 존재할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입니다.


십일조와 각종 헌금은 단순히 돈을 교회에 내는 기부금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이고, 하나님이 바치는 손길의 믿음을 본다는 것이며, 봉헌의 마음을 살펴 복과 화를 준다는 것으로, 무당들의 복채 개념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이를 다른복음으로 보고 문제를 삼는 것입니다. 십일조와 각종 헌금을 당장 중단하시고, 무기명으로 각자가 결정한 기부금에 해당하는 연보를 교회 공동체 앞에 내어 놓거나 형편이 어려우면 하지 않아도 됩니다. 시각장애우를 위한 오디오는 맨 상단에 있고, 청각장애우를 위한 한글 텍스트는 맨 하단에 있으니, 주변에 가까이 계시는 분들의 친절한 안내를 부탁합니다.


끝까지,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개신교, 초교파, 회개와 개혁, 신구약 어디에도 제물로 바치는 헌금(돈)은 없다, 신약교회는 자발적인 무기명 연보(기부금)로 구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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