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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스케치 4 화 보길도에서 (2019)
07/15/2019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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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복 양식이다. 완도에서 보길도까지 온통 전복 양식자이었다


서울 스케치 4 화 (2019) 보길도에서 

 그곳이 완도군 홍보실이었는지 박물관이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완도로 귀양을 온 사람들의 이름을 나열한 것을 본 기억난다. 윤선도, 송시열 부터 근대에 한글학자로도 유명한 지석영에 이르기 까지 참으로 많은 인재들이 귀양을 왔다. 그 중에서도 윤선도와 송시열이 완도 바로 앞 보길도와 인연은 특히 많은 문인들로부터 꽤나 들어 왔다. 우리는 렌트한 차까지 배에 실리는 소위 페리보트를 타고 보길도로 향하였다. 

완도에서 보길도 가는 페리보트 


보길도 지도 


가는 동안 온통 전복양식이 바다 전부를 매운 것 같다. 그리고 보길도에 도착해서 마을 풍경을 보니 넉넉한 살림을 볼 수 있었다. 초등학교 입구까지 도보 바닥이 대리석이고 차량 보호 철책도 비싼 철재이었다. 그리고 무덤은 옛날 당상관 벼슬아치의 무덤처럼 호석 하니까 돌짐승 조각, 비석, 석상을 갖추어진 것들이 꽤나 많았다. 그리고 마을 입구마다 공적비가 즐비했다. 옛날에야 고을 사또가 주민들이 주머니를 짜내어 강제로 했다하지만 그건 근간의 돈을 들여 한 것이니 동네 사람들 주머니에 돈이 여유가 넘쳐나는 것을 웅변하고 있는 듯 했다. 

마을 입구마다 송덕비가 즐비하다


병자호란 때에 윤선도가 인조 임금에게 눈에 벗어나는 말을 했는지 아니면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에 화가 났는지 인조임금과 불편한 관계가 된 것 같다. 임금이 곤란해지니 제주도로 귀양을 보냈는지 그가 자진해서 제주도로 가려고 했는지 좌우간 배를 타고 떠났다. 나의 판단으로는 대외적으로 윤선도의 존재를 인조가 좀 세인의 관심에서 벗어나기를 바란 것 같다. 그런데 그가 제주도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잠시 피한 곳이 보길도이었다. 그리고 그는 보길도에 반해서 그곳에 눌러 앉았다. 임금도 고산 스스로도 구태여 제주로 가기를 종용하거나 가기를 원하지도 않은 듯하다. 

윤선도 초상


후손 윤위가 보길도지에 윤선도와 보길도의 인연의 글을 남겼다


그리고 이곳 보길도에 와서 새삼 느끼는 것 인대 사실 나는 조선시대에 양반과 서민,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토지의 소유권 등에 관해서 역사적인 글을 읽을 때 마다 고개를 갸우뚱 해 질 때가 많다. 보길도에서 윤선도의 자리 메김이 좋은 예이다. 윤선도가 이 조그마한 섬에 지은 3 곳의 낙서재, 동천석실, 곡수당은 유유자적하며 어부사시사 같은 시나 짖고 살기에는 꽤나 규모가 크고 엄청난 시설이다. 그런대 고산 윤선도가 자기의 사유재산을 들여서 그렇게 크게 지었는지 아니면 주민들을 수탈을 해서 지었는지 잘 모르겠다. 더구나 윤선도의 정원(?)은 나라의 산이고 토지일 것이고, 그리고 이 시설물인 낙서재 와 산 중턱에 있는 동천석실, 정원을 낀 연못이 있는 곡수대 등을 지을 때에 마무래도 꽤나 민폐를 진 것으로 나는 생각이 든다. 

윤선도가 살던 낙서재


바로 옆에는 사당을 짖고


앞뜰에 작은 연못을 만들어 이 거북이 조각까지 이 산 중턱에 갖다 노았으니,,,


곡수당 갈림길에서 아랫쪽으로 가면 곡수당이 있다


곡수당


바로 새면정이 있고 이곳에서 시를 읊조리면 


이 바위 위애서 춤을 추개 했다니....귀양온것 이 아니라 보길도 왕으로 왔나?


윤선도 후손이 이곳에 서당을 짖고 후학을 길렀다 한다


그런데 당시 그의 신분은 단지 양반이고 선비일 뿐이고 벼슬살이를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찌 그가 이 고을에 왕처럼 살 수 있었을까?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또 고산이 외로워 할 것 같아 마을 사람들이 중지를 모아서 젊은 여자 설(薛)씨를 진도에서 모셔와(?) 소실로 들여 모셨다니 이해가 더 더욱 안 된다. 더군다나 낙서재 라는 곳에서 동천석실은 한 산의 중턱에서 반대편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어 보통사람이 걸어도 족히 두세 시간이 걸릴 거리인데 양편으로 지금으로 치면 케이블을 설치해서 낙서재에서 동천석실로 도르래로 술과 음식을 보냈다니 이건 진짜 갑질의 횡포가 아닌가 싶다. 

나는 그동안 많은 문인들이 고산의 어부사시사를 비롯한 시, 그리고 그의 낙서재를 비롯한 그의 삶의 터전에 아름다운 풍광을 칭송하는 윤건도의 문학작품에 대한 여러 글을 보아 왔다. 하지만 나는 그를 향한 칭송의 그늘진 곳에 서민 어쩌면 지방관속까지도 꽤나 고달픈 생을 보내지 않았나 하고 잠시 생각해 보았다.



낙서재 반대편에 있는 동천석실이다  이곳으로 낙서재와 케이블로 연결하여 

술을 보넸다니..참...나는 힘이들어 올라가 보지도 못 했다  


하지만 막상 페리보트로 실려 온 차를 가지고 보길도 전체를 즐기기에는 참으로 좋았다. 그리고 마치 중국 북경에 가면 이화원이라고 청나라 서태후가 국가재정의 막대한 피해를 주도 지은 별장의 경치를 즐기듯이 당시 보길도 사람들이야 고생을 했겠지만 낙서재, 곡수대 등은 경관을 즐길 만큼 아름다웠다. 윤선도가 나이 81 세 말년에 정쟁으로 다시 귀양을 갔다가 풀리자마자 다시 보길도로 돌아와 3 년을 더 살다가 이곳에서 생을 마쳤다니 진정 그가 보길도의 삶을 즐긴 것 같다. 

 윤선도의 발자취를 뒤따라 본 뒤 우암 송시열의 ‘글쒼 바위’ 탄식 속에 쓴 시라는 뜻의 탄시암(嘆詩岩)을 찾기로 했다. 송시열은 서인의 거두이고 고산 윤선도는 남인의 거두이다. 나이는 윤선도가 20살 정도 위지만 서로 미워하였다고 하며 송시열이 제주귀양길에 풍랑으로 이 보길도에 들려 바위에 탄식하는 글을 남기며 얼마 동안 머물렀다 하나 윤선도의 낙서재는 오지도 않았다 한다. 그의 글쒼 바위가 그의 마음 이었던가 윤선도의 낙서재와 정 반대편에 있었다. 

송시열의 탄시 글씨


시문 해설 


 나는 보길도에서 걸렀다는 막걸리에다가 전복을 안주 삼아 점심을 먹고 송시열의 글쒼바위 앞에 섰다. 생각보다 글자는 그리 크지 않았고 비석에서 본 것 같은 전서체 이였다. 20 년 전에 83 세로 세상을 떠난 윤선도, 제주도로 귀양을 떠나야 하는 80의 노구 송시열 그들도 내가 지금 즐겼던 막걸리라도 마시면서 노년의 삶을 보냈을까? 보길도를 떠나는 페리보트로 향하면서 내 스스로에게 물어 보았다.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라고 목포로 향하는 길에 해남의 땅 끝을 찾았다. 이곳 역시 꽤나 돈을 들여 잘 꾸며 놓았다. 확실히 지방마다 고을마다 정원 같았다. 언제인가 동백꽃 시절에 다시 찾고 깊은 생각이 들었다 좀 아쉬운 이야기가 있다. 돌아오는 길에 해남에서 그 유명하다는 떡갈비 정식은 먹었다. 10 여 년 전에 먹었던 식단을 기대하고 갔지만 이름만 남았지 음식은 별로이었다. 옛날에는 젓갈만도 어리굴젓 등 7-8 개 이었는데 실망스러웠다. 다시 들리면 주위에 식당가에서 별미 식당을 찾아야겠다.

해남 땅끝 전망대 


땅끝 표지 


옛날의 해남 떡갈비가 아니었다. 이제 다시 새 곳을 찾아야 겠다



윤선도 어부사시사 송시열 탄시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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