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osamoo
팔로마(chosamoo)
North Carolina 블로거

Blog Open 08.02.2015

전체     133826
오늘방문     31
오늘댓글     0
오늘 스크랩     0
친구     28 명
  달력
 
풋사랑
08/17/2019 20:00
조회  952   |  추천   5   |  스크랩   0
IP 71.xx.xx.140

풋사랑

조사무


   어려선 현재에 집중하도젊어선 미래에 매달리지만늙어지면 과거를 곱씹으며 사는 것이 우리들 일생일지도 모른다그래서일까, 요즘 들어 부쩍 케케묵은 고릿적 일들이 뇌중(腦中)을 비집고 떠올라 현실을 호도하는 경우가 빈번해진다. 세월 부스러기가 겹겹이 쌓인 패총(貝塚깊숙이 매몰되었던 옛일들이 추억으로 되살아나 촉수(觸手)를 간질이기 일쑤다노화현상일 게다나이 들어감에 따라 팽팽하던 더듬이가 장력(張力)을 잃고 느슨해지면서 주변이나 전방보다는 자꾸만 후미를 더듬는 꼴이 아닌가.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개나리꽃이 활짝 핀 어느 봄날이었다휴전협정을 두고 피아가 한창 줄다리기에 몰입할 즈음이었다. 문산(汶山인근 미군부대 주변에서 부랑아들과 어울려 얼씬대다가 엠피(MP)에게 붙잡혀 서울로 후송된 후 고아원에 수용되던 첫날서로 눈길이 마주친 그녀는 원장실에서 잔심부름하던 열 살가량 된 소녀였다그 후 삼 년 동안 오누이보다 가깝게 지내면서 원생들의 질투와 놀림을 받다가 식구가 늘고 고아들 몸집이 불어나면서 남녀원생을 격리수용하는 바람에 생이별을 하고 말았다.


   풋사랑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렌다온갖 세상사 인간사에 이리저리 부대끼며 이 나이에 이르러서까지도 그녀만 떠올리면 파김치로 찌들었던 심기마저 생기를 되찾곤 한다.

풋사랑은 첫사랑과 사뭇 다르다첫사랑은 말 그대로 처음 사랑이다나이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다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일생에 단 한 번의 가능성이 열려있는 것이 첫사랑이다

풋사랑은 다르다불그스름 색소가 배기 시작한 고추가 풋고추일 수 없듯이세상물정을 빠삭하게 터득한 선남선녀의 사랑은 풋사랑일 수 없다


   어린 나뭇가지에 맨처음 맺은 열매가 하찮은 비바람에도 쉬이 떨어지듯첫사랑 또한 온전하게 결실를 맺기가 쉽지 않다하지만 채 영글기도 전에 낙과(落果)한 첫사랑은 세월이 흘러 주름살이 자글거리고 백발이 성성할지라도이제는 잊어야지 제아무리 마음을 다져먹을지라도, 찰거머리처럼 뇌리에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모르기 마련이다틈만 나면 중독성 환각이나 습관성 아픔을 안겨주는 것이 바로 첫사랑이다.


   첫사랑과 달라 풋사랑은 가탈도 모르고 해코지도 모른다심술꾸러기마냥 깐질깐질 시시비비를 따질 줄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네까짓 게 뭔데라며 푸념하거나 토라질 줄도 모른다일편단심은 오직 풋사랑 덕목에만 남아 유효한 사자성어가 아닐까싶기도 하다풋사랑의 단심(丹心)은 죽음의 사신이 문지방을 밟고 서서 왼눈을 찡끗할 때까지도 한결같다풋사랑이 첫사랑일 가능성은 있으나 첫사랑이 풋사랑이라고 예단(豫斷)할 수는 없다.


   풋사랑이었다. 해방직후 공산치하에서 탈출해 연륜의 굴렁쇠를 굴려가며 타향에서 타향으로 전전하면서 이렁저렁 견디다가 그녀를 만나 가정을 꾸미고다시 구라파를 거쳐 미국까지 흘러왔건만 여태껏 모습도 여전하고 체취도 생생한 소녀풋살구 같은 잔털이 손등을 간질이면 심근(心筋)이 봄눈 녹듯 스르르 잦아들고풋풋한 숨기운이 코끝을 스치기라도 하면 정신이 아뜩하니 황홀하고행여 풋마늘마냥 봉곳한 젖가슴이 팔꿈치에라도 슬쩍 스치면 온몸 구석구석으로 찌르르 전류를 방류시키던 소녀그녀는 지금까지도 상큼한 풋사랑풋풋한 인식으로 내 안에 존재한다.

이 블로그의 인기글

풋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