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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있는 나날
02/13/2018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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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讀後斷想]

남아있는 나날

조사무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있는 나날을 읽고 나니 문득 로버트 피어시그의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이 생각난다. 소위 여행자 소설에 속한다는 관점에서 그렇다. 전자가 사회적 신에 상응하는 품위를 주제로 다룬 반면, 후자는 가치에 대한 탐구라는 부제가 암시하듯 또는 가치를 명제로 다룬 진리탐구서라고 할 수 있다.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은 아들 크리스를 뒷좌석에 태우고 17일에 걸쳐 미네소타 주 소도시를 출발하여 캘리포니아에 이르는 주인공의 철학적 사유의 여정을 기술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남아있는 나날’은 주인공 스티븐슨이 모처럼 허용된 엿새간 휴가를 이용해 반평생을 봉직한 달링턴 홀에서 출발해 리틀 컴프턴에서 옛 동료 켄턴(벤 부인)을 만나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 웨이머스라는 마을에서 집사로서의 각오를 다지는 도정을 그려낸 소설이다.


   문학작품이란 통상 미적범주 한둘을 예술적 기법으로 조리(調理)해낸 결과물이 아닌가. 그 요리를 즐기는 것은 손님 몫이다. 개중에는 구미에 맞아 탐식하는 독자도 있을 테고, 입맛이 까다로워 수저를 내려놓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이시구로의 남아있는 나날에서 주인공이 일관되게 추구한 품위는 우아미에 속할 것이다. 여행 마지막 날 권위적인 영국인 옛 주인과는 달리 보다 개방적인 미국인 새 주인을 제대로 모시려면 객쩍은 농담까지도 스스럼없이 공유할 줄 아는 기술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말하자면 골계미의 필요성을 인지한 셈이다.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은 편도여행이다. 당연하다. 보편적 진리를 탐구함에 있어서는 그 과정 또는 깨달음 자체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태여 현실세계로 회귀할 필요가 없다. 그에 비해 남아있는 나날은 왕복여행이다. 그 또한 마땅하다

보편적 진리와는 달리 실용적 노하우는 이를 구현할 수 있는 실험공간이로서의 현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에서 화자는 여행 내내 정서적 결함을 안고 사는 아들과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다. 매사에 끝도 없이 서로 엇박자를 내곤 한다. 부자유친이라는 덕목마저 무색할 지경이다. 결국 종착지에 도착한 후에야 겨우 부자지간의 유대가 복원된다남아있는 나날에서 집사 스티븐슨과 총무 켄턴 사이도 소통이 원활치 못하긴 매한가지였다. 함께 일하는 동안 하찮은 것을 갖고도 시시비비가 끊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적의가 있는 암투도, 시비곡절을 따지는 의견충돌도 아니었다

그건 남녀 간의 은밀한 사랑싸움이었다.


   요즘 '저녁 있는 삶'이란 말이 자주 회자된다. 삶의 질을 중시하는 말일 것이다. 이 말은 역설적으로 '저녁 없는 삶'을 영유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스티븐슨이 휴가에서 업무복귀를 위한 귀갓길에 잠시 바닷가 선창에서 회상에 젖다가 만난 시골노인이 하루 중 가장 좋을 때가 저녁이라면서 만날 그렇게 뒤만 돌아보아서야 쓰겠습니까. 사람은 때가 되면 쉬어야하는 법이요. 날 좀 봐요. 퇴직한 그날부터 종달새처럼 마냥 즐겁게 산답니다.”라고 말했다.


   해가 질 무렵부터 밤이 시작될 때까지가 저녁이다. 자정에 이르러 오늘이라는 여정을 마감하기까지는 아직 밤이라고 하는 겨를이 남아있는, 말하자면 이 아니라 이다. 황혼인생 또한 그렇다. 지나온 세월이야 어떻든 나는 지금 가장 찬란하고 아름다운 황혼녘을 살고 있다. 누군가 황혼을 노래했다. ‘다시 황혼입니다. 오늘도 저물어갑니다. 하루가 아무리 완벽했어도 오늘 하루는 끝입니다.’ 라고 말이다. 아니다. 그리 서두를 필요가 어디 있는가. 황혼은 하루의 끝이 아니라 긴긴밤을 앞둔  일 뿐이다. 자정까지는 아직도 만리장성을 쌓고도 남을 만큼 시간이 널널하지 아니한가.

, 이젠 황혼녘 삶을 즐기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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