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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튼짓 좀 작작해!
02/09/2017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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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튼짓 좀 작작해!

조사무


   고등학교시절이웃에 좋아하는 여학생이 있었다초등학교 동창이었다이른 아침까만 교복차림으로 집을 나서는 그녀를 눈으로 마음으로 전송하며 속깨나 태웠다그건 생병이었다.

어느 여름날초등생인 그녀 남동생더러 쪽지편지를 누나에게 전해달라고 당부했다뇌물로 한 달 치 교통비를 몽땅 털어 녀석 호주머니에 찔러주었다쪽지에다 어설픈 사랑타령을 횡설수설 늘어놓고 말미에 모월 모일 모시 모모빵집에서 만나자고 썼다.


   이튿날 꼬마 메신저를 통해 답신을 받았다그녀 체취가 배인 듯싶은 하얀 쪽지를 손에 쥐고 얼마나 설레었던지두 근 반 세 근 반가슴에서 콩콩 소리가 다 들렸다한 차례 심호흡을 크게 토한 다음 떨리는 손으로 종이쪽지를 펼쳤다

거기에는 달랑 한 줄기 가지런한 글씨가 또박또박 적혀있었다.

공부나 해허튼짓 좀 작작하고.”


   허튼짓이란 쓰잘머리 없는말하자면 백해무익한 짓을 의미한다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미친 짓이란 뜻이 아닌가. 허튼짓의 후과(後果)는 너무나 참담했다그 후 한 달 동안 인도 타르(Tahr) 사막을 고행하는 선재동자(善財童子)라도 되는 양 늦여름 뙤약볕에 비지땀을 뻘뻘 흘려가며 학교를 걸어 다녀야만 했다

자업자득(自業自得)이었다.


   자업자득은 무척 엄중한 낱말이다엄청 잔인한 말이기도 하다잘못을 저질렀으니 당해도 싸다는말하자면 쌤통이라는 뜻이 함축된 사자성어가 아닌가자업자득은 죄업(罪業)을 뜻하기도 한다죄업의 사슬을 끊어내지 못하면 평생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달포에 걸친 생고생 끝에 허튼짓은 그만하고 이제부턴 코앞에 닥친 대학입시준비에 전념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져먹었다그 순간적인 반전의 계기가 있어 초라하나마 오늘날 내가 존재할 수 있으리라.


   찰나(刹那)가 곧 영원의 단초(端初아닌가찰나에서 비롯되지 않은 영원은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순간의 판단이 일생을 좌우한다는 말이 허투루 있는 것이 아니다세상에는 극히 미미한 사건이나 하찮은 계기가 대세의 흐름을 결정짓는 경우가 허다하다삼라만상(森羅萬象) 또한 그렇다태초에 겨자씨만 한 우주 씨앗이 있었단다 150억 년 전하나의 점에 불과하던 우주 씨가 고온 고밀도에서 찰나의 빅뱅을 일으킨 후 광폭의 팽창을 거쳐 광대무변한 우주가 되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부풀림은 끊임없이 진행 중이라 하니 그렇다면 만휘군상(萬彙群象)이야말로 찰나의 섬광에서 비롯된 부산물이 아닌가.


   대학진학 후 우여곡절 끝에 몇 차례 그녀와 데이트를 했지만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유야무야 미적대다 보니 서서히 멀어져갔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직도 내 인식을 통해 그때 그 모습 그대로 살아있다어찌 그녀뿐이랴삼라만상 또한 내 인식을 통해 존재한다. 인식과 행위, 그 주체는 어디까지나 자아(自我)일 수밖에 없다. 내 인식작용을 거치지 않고는 만유(萬有)는 물론 주()도 객()도 존재할 수 없다. 내가 곧 우주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 연유이기도 하다.


   사람들 일상사 대부분이 허튼짓일지 모른다명분도 실속도 없이 하염없이 헛바퀴를 돌리면서도 마치 큰일이나 하는 것처럼 착각하고 사는 것이 우리들 일생일지도 모른다.

나는 요즘도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허튼짓 좀 작작해!” 라는 소리를 적잖이 들으며 산다그때마다 새삼 옛 기억이 되살아나 가슴벽[胸壁]을 야금야금 긁어대곤 한다. 이날 이때까지 통째로 제거치 못한 진연(塵緣)의 곁뿌리 몇 가닥을 가슴 깊이 곁묻고 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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