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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
05/24/201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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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

조사무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읽어도 예전처럼 공감이 가지 않을 때 나는 슬프다. 혹시 내가 정서적 결핍증이나 무감각증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도 된다. 그가 열거한 그 숱한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은 하나같이 약발이 다해 진짜 슬픔다운 슬픔을 자아내기는 역부족일 듯싶다. 좀 듣기 좋게 말해 고전적 슬픔거리라고나 할까, 그래보았자 상한 우유와 매한가지로 진즉에 유효기간이 지난 구닥다리들이다. 누가 있어 그런 케케묵은 메뉴에 입맛을 다시겠는가.


   칭얼거리는 손녀를 어르다보면 밉살스러울 때가 많다. 배가 고파서도 몸이 아파서도 아니다. 단지 심심풀이 땅콩을 아작아작 씹어대듯 징징대곤 한다. 그럴 때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설화도 씨알이 먹히지 않는다. 콩쥐팥쥐 이야기를 해줘도 한두 번 눈을 빤짝이다가도 느닷없이 한여름 쓰르라미마냥 울보를 허문다. 녹 슬은 베어링 돌아가듯 뻑뻑한 눈을 달래가며 애써 동영상을 틀어주면 그 순간부터 할아비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그래서 나는 슬프다.


   안톤 슈낙은 경적소리를 길게 끌며 밤을 달리는 기차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고 했다. 그러나 요즘은 광속으로 질주하는 전동열차, 그 불 밝힌 차창에 비스듬히 기대어 모나리자 같은 미소를 흘려주는 얼빠진 여인은 어디에도 없다. 꼭이 기차가 전광석화처럼 빨라서만도 아니다. 짐작컨대 어떤 사내를 부둥켜안고 밀어를 속삭이든가, 아니면 둘 사이에 삼팔선을 그어놓고 각기 스마트폰 삼매경에 빠져 애꿎은 시간만 죽이고 있을는지도 모른다기찻길이나 플랫폼에 얽힌 낭만이 증발해버린 현실이 나는 슬프다.


   정든 임 편지라도 한 통 있으려나, 하염없이 동구를 바라보며 우편배달부를 기다리는 여인이 있을 턱이 없다. 육필편지를 써본 적이 언제였을까. 요즘 사람들은 주마등처럼 스쳐간 옛사랑의 그림자에 연연할 만큼 여리지도 미련하지도 않다

기다림과 설렘을 모르는 즉석시대에 열흘이 넘도록 문자메시지 한 줄도 보내지 않는 임은 잡초보다 못하다. 잡풀이야 때 되면 풀꽃 한 떨기라도 피우지만, 소식 끊긴 임은 기억에서 가차 없이 솎아내야 속이 후련한 법이다그리 덧없는 사랑이 나를 슬프게 한다.


   산더미 같은 재화를 어디다 숨길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명사들이 입방아에 오를 때, 해외 비밀구좌에 부를 숨기고 세금을 꿀꺽한 저명인사들 명단을 읽을 때, 떡값명목으로 오가는 푸짐한 떡고물 인정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때, 묵비권행사에 이골이 난 독직죄인의 당당한 모습을 볼 때, 울화통으로 세상을 등진 부모님이 유산이랍시고 남긴 빚더미에 치여 난감해하는 이웃을 대할 때, 나는 슬프다.


   콘크리트로 중무장한 고궁 담벼락 앞에 마주 설 때, 허울뿐인 이름 석 자나 지킬 마음이 쥐뿔만큼도 없는 사랑의 언약 또는 헛소리가 놀부 심보마냥 삐뚤빼뚤 음각되어있는 바위산을 오를 때, 빈틈없이 인조잔디를 덮어 늘 푸른 묘역에서 고인의 묘비명을 들여다볼 때, 죽은 자를 위한답시고 지은 우중충한 구조물 내벽에 장마철 독버섯처럼 닥지닥지 매달린 성냥갑 마을을 몇 바퀴째 돌며 옛 친구 이름을 찾아 헤맬 때, 나는 슬프다.


   각본에 의한 연기일 듯싶은데도 마치 우연한 노출사고인 척 호들갑떨어가며 옷자락을 여미는 예인들, 이 책 저 책에서 닥치는 대로 남의 글귀를 훔쳐 비빔 글을 발표하고 기고만장하는 문필가들, 말말끝마다 국민, 국민 해가며 사욕 채우기에 여념 없는 수전노 양반들, 나랏일은 뒷전에 팽개치고 이권 챙기느라고 눈두덩까지 뻘겋게 멍든 공직자들, 인민공화국인가 빈민공화국인가, 그 별종 나라 보도일꾼 흉내를 내며 사자후를 토악질해대는 자칭 원로나 지성들도 나를 슬프게 한다.


   어디 그뿐이랴. 불신시대를 견디느라 '99 센트 스토어'에서 구입한 99전짜리 돋보기를 콧부리에 걸치고 마켓 영수증을 조목조목 따져보는 아내 이마에 각인된 잔주름 계급장도, 왕방울을 부라리며 행인은 물론 이웃까지 감시하는 차가운 부엉이 눈깔도, 현금인출기 앞에서 쭈뼛쭈뼛 사주경계를 하며 자판을 누르는 여인의 겁먹은 눈길도, 정류장 인근 지린내 나는 전봇대에 기대어 발을 동동대며 이제나 저제나 마음 졸여가며 다 큰 손녀를 기다리는 허리가 기역 자로 꺾인 할머니도 나를 슬프게 한다.


   안톤 슈낙의 눈에는 고급 승용차 뒷좌석에 앉은 출세한 여인의 좁은 어깨도, 밤늦은 시각 사무실에 남아 서류를 만지작거리는 아가씨의 손길도 꽤나 슬퍼보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요즘세상을 살아가는 별 볼일 없는 민초 나부랭이들에게는 거들먹대는 귀부인도, 지겹다는 듯 컴퓨터자판을 집적거리는 여직원도 부러울 게 틀림없다이웃으로 이웃과 더불어 살면서 이웃을 부러워하는 이웃들 시선이 나를 슬프게 한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세월이 흐를수록, 지구촌이 좁아질수록 기쁜 일은 속속 줄어들고 슬픈 일은 마냥 늘어만 간다

한여름 밤 숲속 반딧불보다 촘촘한 잔별처럼 많고 많은 슬픔 중에는 차마 내색도 못하는 슬픔 또한 많다

벙어리냉가슴에 잔불로 남은 가슴앓이 고질병이 오늘도 나를 슬프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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