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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석동엔 처마가 없다
04/25/2017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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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석동엔 처마가 없다

조사무


   회색구름이 좀 낮게 드리운 듯싶었으나 사오십 분 거리에 어쩌랴싶어 산책길을 나섰다숲길을 겨우 벗어나 집으로 향하는 중에 느닷없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잠시 비긋고 쉬어갈만 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옛날 같으면 기와집이건 초가집이건 여인네 치마폭처럼 공간이 넉넉한 처마가 있어 과객이 소낙비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즘 집들은 겉보기에는 번듯해도 처마다운 처마가 없다. 가끔 스커트자락만큼 인색한 처마가 있긴 하지만 비그을 정도는 못된다. 게다가 곳곳에서 감시카메라가 눈을 번득이고 핏발선 맹견주의 팻말이 잔뜩 겁을 주기 때문에 접근조차 어렵다.


   처마 넓이와 인심은 비례하지 않을까싶다. 처마가 야박한 마을 이웃은 이웃사촌은커녕 사돈의 팔촌이 되기도 어렵지 않을까. 길거리에서 서로 눈길이 마주치면 습관처럼 하이!’ 하고 인사를 나누지만 막상 서로 속내를 털어놓기가 껄끄러운 세상이다. 혹시 길거리에서 어린이가 귀엽다며 볼이나 머리라도 쓰다듬다간 아동 성추행범으로 오해받기 십상이다. 뿐만 아니라 이웃에게 정을 표한답시고 이러쿵저러쿵 장황하게 말을 걸다보면 별 미친 놈 다 보겠네!’ 라는 욕설을 듣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치마 너비로 인간사를 가늠해보면 어떨까. 여인이 치맛자락을 땅바닥에 닿도록 늘이고 휘적휘적 걸어가면 시선이 하체보다는 상체, 즉 얼굴로 직행하기 마련이다. 그리고는 속으로 그 여인 참 곱기도 하군.’ 숭얼대며 감탄한다

그런데 미니스커트나 핫팬티차림의 여인이 눈에 띄면 부지불식간에 눈길이 하체로 굽는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화중지병이로다.’라며 탄식을 토하게 된다이젠 불 꺼진 장작같이 별 볼일 없는 늙은이도 그렇거늘 하물며 한창나이의 젊은 녀석들 음심(心)인들 오죽하랴. 필시 마그마가 꿈틀대듯 욕정을 못 이겨 온몸을 불태우며 군침을 질질댈 것이 아닌가.


   옛 여인들 치마폭은 더없이 안전한 도피처요 피난처였다. 옛날에는 길을 가다가 모래바람을 만나거나 강풍에 흙먼지라도 밀려들면 치마폭으로 아이를 감싸주는 여인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치마폭은 정결한 수건이요 편리한 보자기였다. 땀에 흥건히 젖은 얼굴과 목덜미를 훔쳐주는 손수건이었다. 엄마가 이웃 잔치에 갔다가 자식들 생각에 이것저것 먹거리를 챙겨 치마폭에 담아오는 그럴듯한 보자기이기도 했다.

치마폭은 질 좋은 화선지이기도 했다. 헤어지기 못내 아쉬워 정인 치마폭에 서화 한 폭을 정표로 남기고 석별의 정을 아파하기도 했다.


   요즘 여인들은 특별한 날이 아니면 아예 치마를 입지 않는다. 그러니 길거리에서 갑자기 장대비나 눈보라를 만나도 어린아이를 보호해줄 마땅한 피난처가 없다. 근처에 적당한 가게나 찻집이라도 있어 잠깐 들리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소몰이하듯 아이를 마구 다그쳐가며 길을 재촉할 도리밖에 없지 않는가.

행여 피치 못할 사정으로 정인 곁을 떠나야한다면 치마폭대신 은밀한 살갗 부위에다 일필휘지 정표를 문신으로 남기고 싶겠지만 호락호락 응해줄 여인이 있을 턱이 없다

그래서 떠날 때는 말없이(Keep Silent When Leaving)가 꽤나 멋진 이별사 같기도 하다.


   비에 흠뻑 젖은 채 집으로 들어섰다. 새로 일군 채소밭이 제법 말끔해졌다. 우리 부부가 열흘 동안 대륙을 횡단한 후 보름 전에 이곳 노스캐롤라이나 시골마을에 안착해 처음으로 시도한 대사(事)가 채소밭 일구기였다

닷새 동안 흙벽돌처럼 굳어버린 땅을 뒤집고 마른 흙거름을 골고루 섞어 고랑을 내고 이런저런 씨앗을 뿌렸다

군데군데에다 홈데포에서 구입한 토마토와 피망 모종을 옮겨 심었더니 봄비를 맞아 흡족해하는 듯 청초해 보기에도 좋고 기특도 하다내친김에 이번 비가 그치고 나면 꽃밭을 일굴 계획이다.


   이곳 주택단지 이름은 블랙스톤(Blackstone)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동네를 흑석동(黑石洞)’이라고 부른다

흑석동엔 우악스럽지도, 그렇다고 결코 초라하지도 않은 백여 채의 단아한 가옥들이 드문드문 숲속에 웅거하고 있어 웬만해서는 주민과 맞부딪치기가 쉽지 않아 아직 정식으로 인사를 나눈 이웃이 없다가끔 차량이 지나다가 눈이 마주치면 말없이 서로 손을 흔들어줄 정도다.


   그래서일까, 아직 동네에 정이 붙지 않는다. 오늘처럼 준비도 없이 산보를 나갔다가 비라도 만나면 잠시 비를 피할 수 있는 처마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하지만 야속하게도 흑석동엔 처마가 없다뿐만 아니라 폭이 넉넉한 치마를 입은 여인도 보이지 않는다그래서 동네가 객지 같아 낯설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어쩌면 엊그제 파종한 씨앗들이 새싹으로 모습을 들어 낼 즈음이면 이웃에 친구도 생기고 동네에 정도 붙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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