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stsong
쉼터마을(castsong)
California 블로거

Blog Open 07.26.2013

전체     864120
오늘방문     43
오늘댓글     0
오늘 스크랩     0
친구     57 명
  최근 방문 블로거 더보기
  달력
 
남한산성
10/15/2017 22:13
조회  1946   |  추천   7   |  스크랩   0
IP 198.xx.xx.185

1636년 인조 14년 병자호란.
청의 대군이 공격해오자 임금과 조정은 적을 피해 남한산성으로 숨어든다. 추위와 굶주림, 절대적인 군사적 열세 속 청군에 완전히 포위된 상황, 대신들의 의견 또한 첨예하게 맞선다.
순간의 치욕을 견디고 나라와 백성을 지켜야 한다는 이조판서 ‘최명길’(이병헌)과 청의 치욕스런 공격에 끝까지 맞서 싸워 대의를 지켜야 한다는 예조판서 ‘김상헌’(김윤석), 그 사이에서 ‘인조’(박해일)의 번민은 깊어지고, 청의 무리한 요구와 압박은 더욱 거세지는데...
나아갈 곳도 물러설 곳도 없는 고립무원의 남한산성,  나라의 운명이 그곳에 갇혔다!


영화 남한산성이 이곳 저곳에서 화제다. 아직 보지는 못한 영화이지만 언젠가는 볼 영화이기에 이 영화에 관한 칼럼, 오피니언, 기사들의 내용을 내 나름대로 정리를 해보았다. 글들은 대부분 영화를 본 입장에서 작성이 되었지만 영화를 아직 보지 않은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정리를 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되기에 여기저기에서 본 글들을 정리해 보았다.


영화 ‘남한산성’은 김훈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로, 조선 인조 14년에 발발한 병자호란 시기에 남한산성에 갇힌 왕과 대신들의 47일을 그려주고 있다. 영화는 순간의 치욕을 견디고 청과의 화친을 주장하는 주화파 이조판서 최명길(이병헌 분)과 그의 반대편에 선 척화파 예조판서 김상헌(김윤석 분)과 의견 대립이 핵심이다.


정치권에서는 여야가 영화 남한산성을 두고 현재의 외교안보 상황에 빗댄 엇갈린 해석을 내놓고 있다. 여야 모두 국력의 중요성은 공감하면서도 전쟁의 원인을 놓고는 시각 차를 보였다. 여권은 영화의 소재인 병자호란의 원인으로 '외교적 노력 부족'을 지적하면서 한반도 위기 상황에 대한 외교적 해결을 강조한 반면, 야권은 '군주의 무능'에 초점을 맞춰 현 정부의 안보 무능을 부각시켰다. 어떤이는 우리도 하루 빨리 핵보유국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아래는 10/12일자 한국일보 오피이언중에서 [김회경 정치부 기자의 저마다의 남한산성에서 내려올 때] 중에서 발췌한 글이다.


많은 이들이 영화를 보면서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북한 핵 위기를 풀어나가야 하는 현 한반도 상황을 떠올린것 같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감상평이 넘쳐나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각자 영화에 대한 소감을 밝히는 것을 문제 삼기 어렵지만, 특히 정치인들이 영화를 상대 세력을 비판하는 도구로만 활용하고 있다는 점은 불편했다. 진보ㆍ보수 할 것 없이 ‘무능한 군주의 책임’을 탓하며 각각 이명박ㆍ박근혜 정부나 문재인 정부를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재단해 비판하는 행태에 입맛이 썼다. 그런 탓에 “병자호란의 시대상황을 지금 북핵 위기와 견주는 것은 호사가들의 얘기일 뿐”이라며 “외교란 무엇인가, 지도자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하도록 한다”는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입장에 대체로 동의한다. 

영화와 소설이 조선왕조 500년 역사 중 가장 치욕적인 삼전도의 굴욕을 들추어 낸 것은 주화파(主和派)인 최명길이 옳았느냐 척화파(斥和派)인 김상헌이 옳았느냐를 따지기 위함이나, 병자호란 당시 주화파와 척화파가 현재 어떤 정치세력을 대변하느냐를 가리기 위함은 아닐 것이다. 병자호란 전후의 역사적 경로를 알고 있는 현재의 정치인들로선 당시 최명길의 선택이 옳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병자호란 당시의 상황에 처한다면 최명길의 길을 걷는 것이 쉬운 선택이었을까. 명(明)ㆍ청(淸) 교체기라는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한 채 자신만의 남한산성에 갇혀 상대 탓만 했던 조정 대신의 모습과 더 가깝지 않았을까. 

한반도 긴장을 부추기는 북한의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과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간 말 폭탄이 행여라도 군사적 충돌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게 대통령을 포함한 정치인들의 책임이다. 그러기 위해선 국가 지도자와 정부가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정치권의 역할이 중요하다. 정파의 입장에 매몰되지 않고 상대의 주장도 존중하면서 상대로부터 취할 것은 취하는 태도를 갖춰야 한다. 

결국 영화와 소설이 말하고자 함은, “다만 봄에 씨를 뿌려 가을에 거두어 겨울에 배를 곯지 않는 세상을 바랄 뿐”이라는 영화 속 대장장이 날쇠의 대사에 함축돼 있다. 다수 국민들은 진보가 집권하든 보수가 집권하든 전쟁의 불안 없는 평온한 일상을 바라고 있다는 걸 마음 속에 새겨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유엔총회에서 국제사회에 ‘한반도 전쟁 불가론’을 호소하고, 국내에서는 안보에 관한 초당적 협력을 당부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정부 출범 초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ㆍ사드) 배치를 둘러싸고 미중 사이의 균형 외교를 시도했고, 국제사회에 ‘한반도 운전자론’을 강조하며 지지를 호소했다. 
그러나 정부의 노력과 의지에도 불구하고 북한 핵ㆍ미사일 도발이 고도화하면서 우리가 위기 타개를 주도하기 어려운 현실적 한계에 부딪혔다. 때문에 현 정부는 일부 지지층과 진보진영의 반발을 무릅쓰고 한중 간 균형보다 한미공조를 우선시하면서 전략자산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오락가락했다는 비판도 거셌지만, 정권 초의 입장을 고수하기 보다 전쟁 발발에 대한 국민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냉혹한 국제정치 현실과의 타협을 선택한 셈이다. 

물론 정부의 결정 과정에 오류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최소화하고 교정하려면 정치권이 머리를 맞대 격변하는 국제정세를 분석하고 국민들을 설득해 최선의 길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머리를 맞대기 전부터 영화가 묘사한 역사를 두고 현재의 유불리만 따지는 모습에 “나는 벼슬아치를 믿지 않소”라는 날쇠의 대사가 유독 가슴을 후볐다. 혹여 안보 위기 극복을 위해 내부 단합이 필요한 시점에 일반인들의 정치 불신과 냉소로 이어져선 안 될 것이다.  
출처 : [한국일보 김회경 정치부 기자의 저마다의 남한산성에서 내려올 때 중에서]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목적은 단순한 과거를 돌아보려는 것만이 아니라 이를 통해 올바르게 살아가는 길을 찾기 위함이다. 영화에서 보는 날카로운 논쟁과 갈등은 380여 년이 흐른 현재의 2017년에도 공감할 수 있는 주재로 깊은 울림과 메시지를 전달하고있다. 때문에 영화의 감상평도 제각각의 주관적인 사고를 담고있는 것 같다.

영화 남한산성의 뒷얘기들을 보면 최명길 엮을 맡았던 이병헌은 최명길이 인조를 설득하는 마지막 대사를 조금더 직접적으로 바꾸자고 감독에게 건의했다고 한다. 그는 다소 은유적인 대사를 [백성의 삶]과 연결지어 호소하고 싶었다고했고 감독은 이에 동의를 해서 대사가 수정되었는데 수정된 대사 부분은 아래와 같다고 한다. 

[무엇이 임금입니까? 오랑캐의 발밑을 기어서라도 제나라 백성을 살릴 수 있는 자만이 진정 신하와 백성이 마음으로 따를 수 있는 임금이옵니다]  

수정 된 대본은 영화에 그대로 적용이 되어서 영화에서 절체절명한 순간을 한마디로 대변해 주었다고 한다. 

영화속의 대사들을 보니 영화의 시대적 배경과 상황을 역사적으로 잘 설명해 주었던 며칠전 읽은 칼럼이 생각난다. 바로 미주 중앙일보 오랜지카운티 본부장으로 계시는 이종호님의 [역사의 창 : 남한산성과 청나라]라는 칼럼이었다.


[남한산성과 청나라 / 이종호/미주 중앙일보 OC본부장]

#. 병자호란은 우리 역사에선 가장 치욕스러운 장면이다. 당시 인조 임금은 오랑캐라 업신여겼던 청나라 황제 앞에서 3배 9고두(三拜九叩頭: 세 번 절하면서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찧는 만주족의 항복 의식)의 예로 무릎을 꿇었다. 50만 명 이상의 백성들은 노예로 끌려갔다. 화냥년의 어원이 된 환향녀(還鄕女)나 애비 모르는 근본 없는 아이를 일컫는 호로(胡虜)자식이란 말도 그 때 생겼다.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 '남한산성'은 그 때가 배경이다. 그렇다면 조선에 씻을 수 없는 수모를 안겼던 청(淸,1616~1912)은 과연 어떤 나라였을까. 


옛날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였던 만주 땅엔 우리 민족 외에도 여러 민족이 명멸했다. 서쪽엔 거란과 선비, 몽골이 있었고 동쪽으론 말갈과 여진이 있었다. 거란은 요(遼, 916~1125)나라를, 몽골은 원(元,1206~1368)나라를 세웠고 여진은 금(金,1115~1234)나라를 세웠다. 17세기 초 중국은 쇠퇴한 명(明,1368~1644)나라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명은 몽골족의 원나라를 몰아내고 세운 한족의 나라다. 임진왜란 땐 조선을 돕기 위해 군대도 보냈다. 하지만 그것이 한 원인이 되어 어려움에 처하게 됐고, 그 틈을 타 누르하치가 흩어져 있던 만주 일대의 여진족을 통합해 세운 나라가 청(처음엔 후금)이다. 직접 1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에 쳐들어와 인조에게 삼전도의 굴욕을 안긴 홍타이지는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청의 두 번째 황제다. 


명을 멸망시키고 중원을 제패한 청은 대만과 서역, 티베트, 몽골까지 영토를 넓혔다. 중국 역사상 드문 명군으로 꼽히는 황제들이 잇따라 즉위하면서 17~18세기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4대 강희제, 5대 옹정제, 6대 황제 건륭제가 그 주인공들이다. 이런 청나라가 건국 초기 한창 힘이 솟구쳐 오를 때 문약한 조선을 마음껏 농락한 것이 1636년 병자호란이었다. 


#. 역사가들은 병자호란은 충분히 피할 수 있었던 전쟁이었다고 본다. 원래 청나라가 조선에 원했던 것은 정벌이 아니라 명나라와의 일전을 앞두고 후방의 교란을 방지하기 위한 우호 관계였다. 따라서 조선이 조금만 현실적인 외교력을 발휘했더라면 전쟁 자체를 방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조 조정은 그러지 못했다. 명분에만 집착한 무능한 정치, 새로운 국제질서에 무지했던 외교, 철저히 자신의 이익에만 골몰했던 집권층의 이기심 등이 전쟁과 패전의 치욕을 자초한 것이다. 그것도 불과 한 세대 전 임진왜란이라는 처절한 국난을 겪고도 똑같은 잘못을 다시 되풀이한 것이다. 

그로부터 380년, 지금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여전히 한국은 강대국들 사이에서 생존의 줄타기를 해야 한다. 거기다 연일 핵으로 으르고 겁박하는 북한까지 머리에 이고 있다. 


누가 시작하든 한반도에서 다시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때는 파국이고 공멸이다. 그럼에도 호란 때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무책임한 강경론이 득세하고, 국민의 안위에는 아랑곳 않는 상식 밖의 주장들이 난무한다. 평화를 말하면 매국인 양 매도되고 전쟁 불사를 이야기해야 애국인 양 고무되는 분위기까지 있다.  


원래 헛말일수록 소리가 요란한 법이다. 세계 최강 군대였던 청의 창칼 앞에 그나마 더 큰 희생을 막았던 것은 당당하고 멋진 결사항전론이 아니라 당장의 수모를 감당하면서도 나라의 생존을 도모하고자 했던 대화협상론이었다. 


지금이라고 다르지 않다. 전쟁을 말하기 전에 먼저 평화를 이야기 해야 한다. 말길을 트고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나도 살고 너도 살고 모두가 사는 길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지금 한국 정부의 인내와 대화 노력을 성원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영화 '남한산성'을 보고 난 솔직한 소감이다.

출처 :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page=1&branch=NEWS&source=&category=opinion.editorial&art_id=5679802


이 블로그의 인기글

남한산성